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 신경림

발행일 2017-05-18 19:41:4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 시집『가난한 사랑 노래』(실천문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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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께서 어떤 계기로 ‘실천 강령’이나 ‘격문’ 같은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시대의 앞장에서 자신의 삶과 궤적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란 신념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말씀이다. 거창한 뜻과 명분의 삶이 아닐지라도,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잘 새겨듣고 몇 가지 실천만 한다면 느슨한 일상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며 매순간 깨어 있게 하는 각성제가 되리라. 우린 살아오면서 수없이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했겠으나, ‘타성’이란 관성의 우군에게 발목 잡히고 제압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이 시는 20세기 초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환기케 한다. 19세기 중반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때 옥중에서 탈고한 한 편의 연애소설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회적 반향은 실로 엄청났다. 청년들에게 사랑과 혁명, 진보와 인간애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시 혁명을 꿈꾸던 청년 레닌도 이 소설을 읽고서 ‘그가 나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고백하면서 40년 뒤 같은 제목의 정치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볼셰비키 혁명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숙지해야 할 ‘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쯤 되면 문학은 그저 책 속에 갇힌 문학이 아니었다. 체르니솁스키도 문학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의 내용 가운데는 지금은 인류가 당연히 누리는 유급휴가나 장학제도 같은 복지제도의 모형도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이 왜 그토록 열광적이었던가는 당시 차르 체제의 억압과 농노제의 고름, 그리고 유럽 역사를 알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러시아의 변혁은 필연이었다. 지금은 폭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인해 공산주의가 쫄딱 망하고 이 책이 악마의 다른 이름으로 전락한 처지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에도 386세대 운동권의 바이블이었다.

심상정 의원도 피 끓던 20대에 이 책의 많은 구절을 통째로 줄줄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주인공이 방직공장에서 일한 이력도 그와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나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는 모두 개인적인 삶의 목표보다 당시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면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이 시 안에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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