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발행일 2017-08-13 19:30:2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중략)/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전쟁광 보호구역』(지혜, 2012)

전쟁놀이는 좋게 말해 파워게임이지만 엄밀하게는 폭력게임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선 잔혹한 폭력게임이 넘쳐나고 레저스포츠로 자리 잡은 모의전투 형식의 서바이벌 게임이 각광받고 있다. 요즘은 치고 때리고 부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스트레스 해소방’이 도심에 생겨서 성업 중이다. 전쟁에 거부감을 보이던 중산층들에게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는 삶을 무한경쟁, 각개약진, 승자독식이라는 살벌한 전쟁터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전쟁의 역사다. 입으로는 누구나 평화를 외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거듭해 저질러왔다.

장난처럼 시작하여 놀이처럼 진행된 전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카인의 후예인 우리 뇌 안에 살상과 파괴의 DNA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광적으로 전쟁과 테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라도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끔찍한 연쇄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나 전쟁놀이에 탐닉한 김정은 집단은 평균치를 훨씬 넘는 악성 DNA가 내재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자라면서 과도하게 전쟁 장난감을 갖고 놀았던 결과 ‘전쟁광’ 인자가 배양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거친 말싸움을 두고 국내에서도 평가와 의견이 갈리고 있다.

하태경 의원은 한반도에 전쟁이 임박했다며 대통령에게 데프콘 3의 즉각 발동을 촉구했다. 일부 보수 야당 의원들도 연일 대북 강경론을 주문하고 있다. 어쩌라고? 군인들 모두 외출외박 금지시키고 예비군들에게 총 한 자루씩 나눠주자고? 전투준비 태세를 의미하는 데프콘 5단계 가운데 데프콘 3 이상이 발령되면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령부로 이양된다.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당시 데프콘 3가 발령된 바 있다. 지금이 한반도 위기인 것만은 사실이나 우리의 카드가 몹시 궁색하고 제한적인 처지에서 꼭 그렇게 전쟁을 부추기며 전쟁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야 온당한지는 모르겠다.

전쟁이 무슨 여름철 물총 싸움도 아니고 전쟁을 신나는 놀이쯤으로 여기는 소수 극렬 정치인들에게도 그런 ‘전쟁광’ 인자가 없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이 전쟁의 광물성을 생명의 근원인 식물성으로 되돌려놓을 방도는 없을까.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아기자기한 ‘전쟁광 보호구역’을 진짜로 하나 만들어 한꺼번에 싹 쓸어 몰아넣었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폼으로 사드도 몇 개 세워놓고.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