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른고을문학 20집(작가회의 경기광주지부, 2015)
‘뭍’은 섬사람들이 육지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사정이 역전되어 오히려 뭍에 사는 사람들이 섬을 그리워하지만 예전의 섬사람들은 늘 뭍을 동경해왔다. 제주 처녀들은 육지로 시집가는 게 로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직장생활 할 때인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제주지점에 근무하는 총각들의 인기가 현지에서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수십만 평 감귤밭 농장주의 딸과 결혼한 사원도 있었다. 그녀와 집안의 끈질긴 구애의 결과였는데 당시엔 큰 뭍으로 시집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 심지어 추자도 처녀들이 건너편 육지 쪽에 보이는 완도군의 청산도나 보길도를 뭍으로 착각하고 시집갔다가 뒤늦게 낭패를 알아챈 경우도 있었다.
18세기 제주 여성으로 제주의 으뜸가는 부자였던 김만덕에 관한 일화가 있다. 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자신의 신분을 되찾아 객주를 차리게 된다. 이후 신용과 박리다매를 모토로 제주 최고의 거상으로 성장한다. 김만덕은 계속되는 제주의 가뭄과 재난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때 만덕은 ‘임금을 뵙고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라고 말해 제주 여성으로서는 처음 뭍으로 나왔다. 당시엔 ‘제주의 여성은 뭍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제주 여자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월해금법’이란 법령이다. 만덕이 금강산 구경을 소망했던 것은 그저 명산의 유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큰 상이나 벼슬을 원했을 수도 있겠으나 마다하고 제주 여인들에게 채워진 족쇄를 깨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 제주를 삼다도라 해서 여자가 많았던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도 한몫했으리라.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정네에 대한 ‘기다림은 뭍이다’, 섬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토록 제주 여성들에게는 ‘참을 때까지 참다가 바라보는 곳이 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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