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겨울 카프카』(시학, 2013)
책꽂이로 직행한 이후 단 한 번 누구의 손을 탄 적 없거나, 지난 신문지들을 묶어 내보낼 때 함께 버려질 수 있는 처지에 비해 ‘책장의 모서리 밑에’ 떠받치고 있는 시집 한 권의 굳건한 힘은 얼마나 듬직한가. 시집이란 대개 그리 두껍지도 얄팍하지도 않아 이런 용처에 전격 기용되기엔 안성맞춤의 물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몇 겹으로 접은 신문지를 쑤셔 박는 것 보다, 짝이 맞지 않은 화투장을 하나씩 올려놓는 것보다야 한결 고상한 품격이 아닌가. 짐작하건대 책방에서 돈을 주고 샀을 리는 만무하고 누구한테 증정받은 시집이겠는데, 그 시집을 낸 당사자가 이 탁월한 변용의 정경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따져보면 그 책장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거나 책장 바깥에서 깔려 누운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어쩌면 ‘시의 힘’이란 그렇듯 맞아떨어지지 않은 아귀로 균형을 잡지 못해 기우뚱하는 세상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받쳐주는 그 정도의 에너지가 아닐까. 시와 시인이 홀대받고 시집이 읽히지 않은 시대에 그만큼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감사하고도 또 갸륵한 일 아닌가. 시인의 한 수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평론가이기도 한 이진엽 시인은 ‘시인이 되려면 먼저 설한풍을 견디며 항아리 속에서 발효되는 김치를 보고 무엇인가를 배워라’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정신과 품격이 그 속성 안에 아름답게 고동치고 있지 않으면 참다운 시인이 되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궁극적으로 ‘시는 원고지 위에서가 아니라 그 시의 주제를 정직하게 실현하려는 매순간의 삶 속에서 완성’된다는 시론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시와 시인은 등가의 관계를 맺어야 하며, 모름지기 ‘존재의 깨달음’ 없이 섣불리 시 쓰기에 나서는 일은 삼가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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