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기적 / 반칠환

발행일 2017-01-03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시집『웃음의 힘』(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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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날고뛰었던 사람이나 태평하게 팔자걸음을 걸었거나 엉금엉금 기었던 사람이거나 똑 같이 새해를 선물로 받았다. 잘 나고 힘센 사람이라고 새해의 근수가 더 나가고 못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운 건 아니다. 시간이 주는 선물은 참으로 공평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누구나 고루고루 새해를 안았다. 이럴 때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벅찬 기적이란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모두 제 깜냥으로 제게 주어진 형편껏 살다가 똑 같이 새해를 맞았다. 우주의 손바닥 안에서는 모두가 뛰어봤자 벼룩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새해니 각오니 소망이니 분답하다. 황새, 말,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들은 서로 견주거나 따지며 순위를 매기지는 않는다. 인간들의 공연한 취미로 경주를 붙여보기도 하는데, 애당초 의미란 없고 판가름이 날 승부는 아니었다. 심지어 바위조차도 가만 앉은 채로 새해를 맞았지만 결과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묵묵한 결가부좌의 자태가 의젓해서 돋보인다. 이렇게 어느 누구도 낙오하지 않고 정유년 새해 벽두에 당도하여 이제 막 새 출발을 했다.

이 시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광화문 교보빌딩 벽에 대형 걸개로 내걸려 화제가 된 바 있다. 황새나 말처럼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달팽이나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다고 침울할 이유도 없이 우리 모두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결과 이렇게 살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해 첫날을 다함께 겸허히 맞이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아 시를 채택했으리라. 하지만 우리 인간에겐 새로이 펼쳐진 무대에서 첫 순간의 가지런한 카펫을 밟는 소감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엄숙하고 존엄한 것이리라.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의 균질성을 알고 오늘의 해가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잘 인식하지만 새해 첫날에 의미를 부여하며 산뜻한 기분으로 맞는 것은 오로지 사람만이 가능한 태도이다. 다만 지금까지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굴렀던 모든 걸 잊고 기득권을 지우는 일 또한 사람의 지혜라 하겠다. 서로 덕담을 건네며 복을 비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난 성과와 과오를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누구에게라도 편견 없이 겸손하게 대함이 옳지 않으랴. 촐싹대지 않고 바위의 묵직함을 배우며, 잔잔한 범사에 감사하고 조화로운 삶을 소망할 일이다. 진정한 기적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운데 잠복되어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의 샴페인도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상태이다. 배를 뒤집은 격랑을 가라앉히고 새 배를 띄우리라. 나라도 마을길도 다시 만들어 새롭게 길을 떠나리라. 그리고 걱정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리라.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새해 새날들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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