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발행일 2017-03-12 19:53:4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마음에 덜 들어도 감싸안고 배려하며서로의 마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관용의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



역사적인 순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불편한 몸을 일으켜 헌재의 선고를 듣던 어르신이 탄식한다. “이 나라에는 법이 다 죽었나?” 뒤에 서 있던 젊은이가 촛불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며 자신은 그런 결정이 날 줄 미리 점쳤다고 한다. 그러자 휠체어에 앉은 채 뒤돌아보며 어르신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철딱서니 없는 소리 하지도 마! 너희들이 뭘 알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신다.

태극기와 촛불로 대변되던 민심이 헌재의 결정으로 딱 갈라졌다. 환호성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고 기쁨에 겨워 얼싸안고 춤을 추는 쪽과 허탈함에 울분을 터뜨리다 못해 경찰차 벽을 오르는 이들의 모습까지 엇갈린다. 철석같이 믿으며 평생을 의지해온 자신들의 바꿀 수 없는 신념이 있었기에 모진 비바람을 맞아가며 광장으로 나가 힘껏 함성을 올리지 않았겠는가. 태극기 집회에 다녀오셨던 원로 선생님은 진심으로 나라가 걱정이라고 하신다. 촛불이라는 말 한마디만 꺼내어도 그만 절교를 선언하실 듯 눈빛이 이글거린다. 아픔이 많아 병원 신세를 져가면서도 몇 차례나 서울행 기차에 올라서 집회가 열리는 광장으로 나가 깃발을 흔들었다며 사진을 보내셨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늘 자랑하시던 그분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날, 서울역에 내렸다. 남산에 있는 세미나장으로 가는 택시를 타러 역 광장으로 나섰다. 어수선하리라 생각했던 역 앞의 광장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처럼 괴괴할 정도로 조용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지만,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고 남산을 오르는 길 양옆의 양화점들은 아직 해가 한발이나 남아있는데도 상당수가 문을 닫아걸었다. 개점휴업을 하고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소식이 뜸하던 동기도 헌재의 선고문을 캡처한 사진을 보내며 한마디 덧붙인다. “왜 이렇게 혼란의 소용돌이와 함께 하는 날이 우리에겐 많을까?” 대학 졸업 25주년 행사가 열리던 날, 부산 해운대 ‘누리 마루’에 모여 행사를 시작하려고 한 그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고가 있었다는 속보가 떴다. 오랜만에 모인 동기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려고 하자 행사 담당자가 급히 찾아와서는 오늘은 이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신 대통령께서 돌아가셨기에 아주 슬픈 날이다. 그러니 풍악 소리는 자제해달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는 오랜만에 만나 25년 행사로 들떠 있었지만, 우리는 그야말로 조용히 이야기만 하며 보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 인용 결정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참석자들이라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판단도 제각각이다. 학술적인 토론에서 의견이 갈리기도 하지만 헌재의 결정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힌다. 자신만의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목이 쏠린다. 같은 길을 가는 동료 의사들이기에 의견을 나누면서도 서로 마음 상하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열띤 얼굴이다. 표정을 다잡으며 무사히 일정을 마치기를 바랐다.

세미나장 대형 스크린에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면이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다. 표정으로 보는 주인공의 애절함이 절절하게 가슴으로 젖어든다. 오늘, 마음이 심란한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해주려는 것 같다. 탄핵 결정으로 광장의 촛불은 꺼졌으나 반대편의 불만의 불씨는 태풍의 눈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어찌하면 갈등이 없어질까. 조금씩 양보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며 서로를 보듬어가야 하지 않을까. 힘든 일이 있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마음의 통합을 이루어 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에 덜 들어도 감싸 안고 배려하며 서로의 마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관용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달리는 기차에서 읽은 글귀가 우리 모두에게 위안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친구가 길을 가는 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습니다. 할 수 없이 인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시간이 꽤 지나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친구가 중얼거렸습니다. “대체 이 비가 언제 그치기는 하는 걸까?” 그러자 다른 친구가 빙그레 웃었습니다. “자네 그치지 않는 비를 본 적이 있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시간이 지나면 결말이 납니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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