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 송찬호

발행일 2017-07-03 20:00: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먼데 나팔소리 울리고 누군가 이층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경찰이 몰려오고 있다!/ 그때 우리는 빨강이나 노랑 두건을 쓰고/ 튤립당을 결성하여/ 막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벌어진 일은 그대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백만 송이 대지의 등불이 꺼졌다/ 그 후 오랫동안 튤립은 천둥과 번개를 돌주머니에 감추고/ 쇠를 먹지 않고/ 설탕과 담배도 멀리 하였다// 강낭콩 꼬투리속에서 태어난/ 꾀많은 곰보 소녀는/ 일곱 개 이야기 조각을 맞춰/ 귀가 커다란 나라의 여왕이 되었다// 우리가 천국에 환멸을 느낄 무렵/ 경찰도 마법이 풀렸다/ 하여, 그들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돼지로, 빗자루로 부지깽이로

- 시집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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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하면 풍차와 함께 네덜란드를 떠올리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튤립이 무리지어 등불 같은 봉우리를 치켜세운 광경은 무슨 정치결사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튤립은 원래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에서 야생상태로 자라던 꽃이었다. 터키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로 이입된 이후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17세기 초 튤립은 교양과 부유함을 드러내는 과시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는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였다. 암스테르담은 예술과 사랑, 야망과 욕망으로 뒤얽힌 도시였다. 이 도시에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튤립의 광풍이 불었다.

광기와 탐욕의 어리석음은 파국을 맞기까지 거의 30년간 지속하였다. 튤립 하나만 잘 키우면 대박이 터지고 인생 역전이 실현되는 ‘폰지게임’의 광풍에 뛰어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희귀종 튤립 한 뿌리의 가격이 암스테르담의 고급주택 한 채와 맞먹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값이 폭락하더니 일주일 사이 양파 가격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금융투기 거품 사건으로 이후 네덜란드의 국력이 기우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튤립 광풍은 투기 거품을 설명하는 ‘더 멍청한 바보에 대한 기대’의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

‘묻지 마’ 투자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으며 20세기 말에 휘몰아친 닷컴 붐도 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주식시장도 비슷한 위험요소가 일부 내재한다. 미래에 예상되는 자산의 가치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기대를 할 경우 수요가 급증해 버블현상을 초래한다. 그 낙관적인 기대는 헛된 욕망일 경우가 많다. 최근 IT와 모바일 환경이 촉진한 ‘비트코인’에 대한 베팅도 튤립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신규 유입자의 대다수는 비트코인이 무언지, 알고리즘에 의한 채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최대발행량은 왜 제한되어 있는지, 기축통화의 대체수단으로 기능할 가능성은 있는지 등 내용들은 하나도 모른 채 덮어놓고 돈만 집어넣는다.

이래서는 삼류 루머에 휩쓸리거나 작전세력, 사기꾼에게 당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 모두는 인간의 절망과 광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리고 반드시 날개 없는 추락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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