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전조 / 윌리엄 블레이크

발행일 2018-04-10 19:58:1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중략)// 가진 자의 환호성과 잃은 자의 저주가/ 죽은 영국의 관 앞에서 춤을 춘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보지 않을 때/ 거짓을 믿게 된다/ 눈이란 영혼이 빛살 속에 잠잘 때/ 밤에 태어나 밤에 사라지는 것/ 밤에 사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하느님은 나타나시고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러나 빛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다.

- Auguries of Innocence(순수의 전조)

.

시인이며 화가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당시 그가 살았던 영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잘못되어가는 조짐들을 통해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기득권층만을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당한 하급계층이 겪어야 할 가난과 비통함을 신랄하게 묘사한 시를 즐겨 쓴 그의 철학적 바탕은 이성과 정의이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과 시대를 앞서가는 신비주의적 감각은 훗날 높이 평가받지만 난해하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으로 표현된 ‘사탄의 맷돌’은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속성을 비판하는 기제로 다시 인용된다.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자본주의로 치달아 근년 세계 도처에서 빵빵 터졌던 금융위기를 통해 목격하였듯이 마침내 경제를 거덜내고 말 것임을 예감했다. 캐피털리즘이 시장근본주의와 만나면 사탄의 맷돌이 되어 인간도 자연도 구매력도 온통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이 책은 전망했다. 또 사회 전반에 벌어지는 혼란과 고통은 경제적 수치로 계측할 수도 없다. 사회를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시각은 삶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할 뿐이다. 경제란 사회의 수많은 기능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천박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재촉한다. 1944년에 나온 이 책이 재조명 받는 이유는 좌우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보이기 때문으로 블레이크의 신비한 감각과 상통한다.

오늘의 현실은 평생을 인간의 고통과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배금주의에 맞서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에서 보여주는 불길한 조짐들이 지금 이 땅 곳곳에서 터지고 있어 ‘거대한 전환’을 예고하는 듯하다. 삼성증권의 황당한 배당 실수와 유령주식 공매도 사건을 보면서 단지 ‘모럴 해저드’ 정도로 치부하고 넘길 일인지 강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공매도 폐지 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금감원은 이번 사태를 엄밀하게는 공매도와 무관하다는 이상한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공매도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띠고 있다. 사실 공매도는 일반투자자들과는 별 상관없이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의 하락시기에도 돈을 벌 수 있도록 제도화해준 시스템이다. 여론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금융적폐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자본시장 질서를 뿌리째 뒤흔든 중대한 사태일 뿐 아니라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할 어둠의 모습이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