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정희성

발행일 2019-01-01 18:50:3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1991)

‘길’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재로 하여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해방되던 해 태어난 시인이 성장했던 시기엔 어느 집안이나 비슷한 분위기여서 부모님들은 권력이나 명예, 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시인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국어교사가 되어 가난한 시인으로 살다 정년을 맞았다. 시인이 바라는 삶은 스스로 자족하며 선하게 사는 것인데 그마저도 세상은 돕지 않는다. 세속화된 가치관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가난하지만 의롭고 선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는 세상이야말로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 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의 시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정치의 낙후로 그 세상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기회를 갖길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골고루 잘 살기란 불가능하다. 경제적 평등의 실현은 어려우나 최소한 열패감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준은 유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을 방치하면 불평등이 심화되는 속성 때문에 구조적 불평등을 공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국가의 존재 의미 가운데 하나다.

지난 12월30일은 시인의 친구인 고 김근태 의원의 7주기 되는 날이었다. 그는 생전에 ‘따뜻한 시장경제’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시장 만능의 경제는 시장의 폭력성으로 인해 결국 인간을 황폐화시킬 것이라고 예견한 그는 경제와 복지가 선순환하는 따뜻한 시장경제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더불어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김 의원의 장례 때 정희성 시인이 낭독한 조시에서는 “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 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라”며 희망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듬해 대선에서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새해 아침을 탈환하기까지 수년간 인내하며 못 볼 꼴을 보았고 많은 희생도 치렀다. 그리고 다시 새해 아침, ‘마음 단단히 먹고’ 스스로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과 함께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의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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