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 장석남

발행일 2017-05-01 19:48:5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아는가,/ 찬밥에 말아먹는 사랑을

치한처럼 봄이 오고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는 열매

앵두나무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앵두꽃잎을 내밀 듯/ 세월의 흉터인 우리들

요즘 근황은/ 사랑을 물말아먹고

헛간처럼 일어서/ 서툰 봄볕을 받는다

-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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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노천명 시인의 ‘푸른 오월’ 한 구절이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상투적 수식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다. 어쨌거나 모든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고 냉난방기구가 필요치 않으며 사람들의 생리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최적화되는 시기이므로 계절의 왕관을 갖다 바치는데 주저할 이유는 없으리라.

5월은 산천초목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 그 자체로도 빛나는 계절이다. 사람의 인생도 늘 5월만 같기를 소망하면서 5월이면 몸과 마음이 절로 들썩이고 스멀거린다. 그래서 5월은 어지럽고 몽롱하고 수다스럽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꽃의 여왕인 장미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5월은 분명 유혹의 계절이다. 시인은 ‘사랑을 물말아먹고 헛간처럼 일어서 서툰 봄볕을 받는다’고 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공항은 북새통이고 역과 터미널은 분답하다.

퐁당퐁당 브릿지할리데이가 사람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120년 전 시카고에서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숱한 노동자들이 장총에 맞아 죽고 피 흘려 승리한 5월 1일 노동절을 필두로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노래 소리 드높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세계인의 날, 가정의 날, 부부의 날, 석가탄신일에다가 가톨릭에선 성모의 달, 장미가 그렇듯 신부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계절도 5월이다. 그러고 보니 꽃의 수요가 가장 많은 달이면서 이래저래 돈 나가는 일이 잦은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얄궂기도 시끄럽기도 했던 달이다.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는 열매’를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5.16이 그렇고 5.18이 그랬다. 서로 위하고 아끼면서 사랑의 도리를 일깨우는 달이면서도 도시 한복판에서부터 울렸던 총성과 함성의 그날을 기억해야만 한다. 계절의 여왕이라지만 개별적으로 덮어놓고 누구에게나 속속들이 만면에 희색이고 유쾌할 수만은 없겠다. 더러는 무색하고 외롭기도 하겠으며 ‘찬밥에 말아먹는 사랑을’ 한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꽃무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 엉덩이 실룩거리며 오월이 눈앞으로 건너와 천지사방 출렁이는 유혹이지만, ‘서툰 봄볕을’ 조금씩 받아내며 구부러진 5월의 길 위에서 나는 그저 쿵쿵거릴 뿐이다. 그러나 2017년 5월은 그런 내게도 매우 소중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이번 5월은 쌓이고 쌓인 폐단들을 청소하고 구악을 갈아엎어 새롭게 이 나라를 출발시킬 전기가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환골탈태 우리들 ‘세월의 흉터’들이 일거에 치유되길 소망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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