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첩’에 새긴 다산의 가족사랑

발행일 2018-02-28 19:39:2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아내 다홍치마로 만든 소책자 화평·공경 등 자식 훈육 담아가정윤리 다산 가르침 배워야”



지난해 남양주 실학박물관 ‘하피첩의 귀향’전을 다녀왔다. 실로 특별한 귀향이었다. 하피첩(霞帖), 좀 생소하나 붉은 노을빛 치마로 소책자를 만들어 노을 하(霞)와 치마 피(帔)를 붙인 말이다. 이 서첩은 다산 정약용 부부가 남긴 건데 후손이 소유하다 피난길에 분실되었다. 2004년 수원에서 폐지 줍던 한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되어, 2015년에 국립박물관에서 경매로 구입해 보관하고 있다. 영영 사라질 뻔했던 귀한 문화재가 65년 만에 힘들게 살아남었다.

다산의 하피첩은 1800년 천주교도로 몰려 전라도 강진 땅에 유배된 지 10년째 되는 해에 만들어졌다. 양수리에 남아있던 부인 홍혜완이 혼인 30주년이 되던 해 겨울, 귀양 간 남편이 하도 그리워서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와 함께 사언(四言)시를 지어 보낸 지 3년 후다.

그 어떤 이별노래보다 절절한 부부애와 그리움이 녹아있다. ‘그대와 이별한 지 7년/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살아생전 만나기 어렵겠죠’로 시작하여 ‘집을 옮겨 남쪽으로 내려가/끼니라도 챙겨 드리고 싶으나/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이 애절한 그리움을/천 리 밖에서 알아주실지’로 맺었다. 한마디로 ‘사무치게 당신이 그리워요’를 조선의 절제된 여인답게 에두른 표현으로 새겼다. 진정한 부창부수다.

아내의 빛바랜 다홍치마와 사부시(思夫時)를 받은 다산도 역시 고수였다. 3년간 고이 간직했던 치마를 4첩으로 잘라 ‘나도 당신이 한없이 그립소’라는 말 대신 부부의 사랑열매인 두 아들(학연과 학유)에게 간곡한 당부를 서첩으로 만들어 답했다. 시집가는 딸에게 준 매화와 새를 그린 족자가 ‘매조도(梅鳥圖)’다. 그 시대에도 ‘딸 바보’가 존재한 셈이다.

서문에는 책이 만들어진 사연을 밝히고 있다.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을 담았네/흘러간 오랜 세월에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만년에 서글픔을 가눌 수 없구나/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부디 부모님 마음을 잘 헤아려/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기려무나’라고 적었다.

역시 다산이다. 여느 집 필부라면 상상도 못할 가족사랑의 승화였으니, 과연 조선 최고의 천재학자다. 이 세상에 유배 간 아비가 어미의 다홍치마에 혼을 쓴 가르침보다 더 값진 보물이 어디에 있으며, 이보다 더 위대한 훈육이 또 있을까? 진한 감동이다. 하피첩엔 비록 지금은 폐족의 처지나 선량하게 살아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 화평과 효심, 안목을 키우라는 당부 글이 먼저 보인다.

경직의방(敬直義方)도 선명하다. ‘공경을 바로 하고 행동을 곧게 한다’는 뜻이다. 근검(勤儉)도 있다. 벼슬이 없어 물러줄 전답은 없으나 근면과 검소는 문전옥답보다 좋아서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고 일렀다. ‘재물은 메기와 같아 잡을수록 빠져나가니’ 망상을 버리고, ‘어려울수록 옛 터전을 굳게 지키라’며 손자에 대한 당부와 기대도 덧붙였다.

물질 만능이 판을 치고, 과잉보호와 맹목적인 자식사랑이 십상인 현세에 울리는 경종(警鐘)이 바로 다산향기다. 몹시도 아름답다. 나이 마흔에 생이별했던 부부는 환갑이 다 돼서야 만나, 혼인 60주년 회혼식 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836년 2월22일 75세였다. 죽기 3일 전에 아내에게 바친 송시(送詩)‘∼살아 이별하고 죽어 떠나다 보니 이리 늙고 말았지/슬픔은 짧고 환희가 길었던 건 다∼당신 덕(德)이었네’도 짠한 울림이다.

다시 다산 생가를 찾았다. 올해로 목민심서가 발간되고, 재회한 지 200년 되는 일명 ‘다산의 해’다. 얄궂은 운명이었지만 15세에 혼인해 60년을 동고동락한 ‘정ㆍ홍 커플’은 뒷동산에 나란히 누워 지난날을 다정히 추억하는 듯했다. “위정자들이여! 목민심서 다시 읽고 나라 걱정 좀 하라”충고하면서 말이다. 가정윤리가 중한 시기다. 우리는 지금 자식과 부부간에 과연 무슨 말을 남겨야 할까? ‘화평(和平)’ 두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노을진 북한강 가에 (한 여인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날리듯이.이상섭경북도립대교수 행정학한국지방자치연구소장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