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가’의 웅지

발행일 2017-07-17 20:09:3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는 세계 최고의 명문가다. 15~16C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있던 가문으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해 르네상스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티첼리ㆍ미켈란젤로ㆍ다빈치ㆍ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이 메디치가의 후원의 산물이다.

미국의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석유정제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됐다. 그가 일으킨 록펠러가는 미국의 이념과 이상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데 공헌했다. 아메리칸 드림과 자유의 상징이다. 록펠러재단을 통해 미국 전체의 문화ㆍ교육ㆍ지식사업과 예술에 손 큰 투자를 해왔다. 이들 명문가의 공통점은 피땀 흘려 부를 일구고 이를 지역과 사회를 위해 내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재력의 규모는 크게 못 미칠지 모르지만 이들 가문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가문이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자집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다. 무려 300년 동안 만 석 이상의 부를 유지했고 흉년 때마다 수입의 3분의 1을 빈민 구제에 쓰는 등 수많은 자선 활동과 사회공헌으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전 재산을 영남대학교에 기부했다. 우리나라에서 최부자집 만큼 사회에 공헌하고 명망을 함께 얻은 가문은 없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과는 격이 다르지만 요즘 대구에서 조선 말기의 사업가이자 애국 계몽 활동을 펼친 소남 이일우(1870~1936) 가문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최근 이일우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대구에서 펼쳐지면서 관심을 끈다. 지난달에는 대구 중구 경북광유 사옥에 ‘대구를 이끈 이장가(李庄家) 사람들’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경북광유 회장의 남편 이재일이 이일우의 증손자다.

이일우 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이 전시회는 이일우의 활동 기반이 된 ‘경주(慶州) 이장가’의 인물을 조명하는 자리였다. 이장가는 이일우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상정, 저항 시인 상화, 초대 IOC위원을 지낸 상백, 대한체육회 사격연맹 회장을 역임한 상오 형제 등 큰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일우는 일제 강점기에 서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한 핵심 인물이다. 이일우는 1905년 도서관과 교육기관을 겸한 ‘우현서루’를 개설해 많은 우국지사를 양성했다. 또 교남학교를 설립한 계몽 교육의 선구자다.

이일우의 이 같은 활동 배경에는 아버지 이동진이 있었다. 이동진은 구한말 대구와 경산 등 지역 일원에서 소금상과 채금사업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이 재산이 이일우의 활동 기반이 됐다. 아버지 이동진은 근검을 실천하고 노력해 일군 재산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내놓았다. 또 상당한 규모의 논과 밭은 친지들에게 고루 나눠 주고 종족에게 농사를 짓도록 해 의식 걱정이 없도록 했다. 종족과 이웃이 함께 잘 사는 길을 열어주고 실천한 것이다. 이동진이 요즘 말로 하자면 ‘이씨 집안’이랄 수 있는 ‘이장가’(李庄家)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인 것은 후손들이 태만하지 않고 근검절약해 이웃과 종족이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가문의 긍지를 갖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이장가’라는 이 독특한 집안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명상 ‘범중엄’이 좋은 땅 수천 묘를 사들여 그 수익을 저축해두었다가 친척들 중에 결혼을 하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에게 공급해 준 ‘의장(義庄)’을 본떴다. 가문과 지역사회에 대한 다짐과 역할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유지는 이일우에게 이어졌다. 이일우는 광산개발, 섬유산업, 주정회사, 금융기관, 언론기관 등을 설립, 운영하며 민족자산을 축적하고 근대 산업화를 추진했다. 또한 상정과 상화 등 집안 인재를 양성하고 많은 독립지사를 후원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일우 기념사업회는 현재 우현서루 복원과 이일우 생가터 문화재 등록, 이장가 집안의 중요 문화유산 공개 및 연구를 추진 중이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부를 대물림하는 데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세상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친인척까지 챙기고 이웃과 지역까지 아우르는 이장가의 깊고도 넓은 뜻이 새삼 돋보인다.홍석봉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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