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전에

“기다리는 순간은 설레는 시간이다새로운 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희망곧 다가올 순간이 두근두근 설렌다”

2017.01.11

박상봉
중소기업성장 컨설턴트·시인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오래 사귈 만한 친구가 많지 않듯이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도 흔치않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영화 중에서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단연 손가락에 꼽힐 만한 명작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1995년 공개된 로맨스 영화이다.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작년에 다시 상영된 바 있는데 개봉 4일 만에 2만 관객을 돌파하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낭만적인 러브 판타지에 빠뜨리는 감동을 선사했다.

비엔나에서 파리로 향하는 유럽횡단 기차 안에서 만난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요즘 세태와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로 인식된 것은 뛰어난 연출력과 음악효과, 그리고 아름다운 명대사와 명장면 속에 인간의 순수성과 감수성을 잘 담아냈기 때문일 터이다.

기차 안에서 독일인 부부가 큰 소리로 다투는 소란을 피해 자리를 옮긴 미국인 청년 제시는 셀린이라는 여자와 동석을 하게 된다.
인사를 나누며 시작된 두 남녀의 대화는 어느덧 유년기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되고 둘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친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시는 셀린보다 먼저 비엔나에서 내려야 할 처지다.
아쉬움에 제시는 셀린에게 하루 동안 비엔나를 여행하자는 깜짝 제안을 한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제시를 따라 비엔나에 내려버린 셀린. 둘은 마치 연인이라도 된 듯 오래된 레코드숍, 프라우터 공원, 다뉴브강의 선상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각자의 유년기, 인생관, 사랑관, 미래에 대한 가치관 등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비록 갑작스레 시작된 짧은 만남이지만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이 되고 다시 비엔나역.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둘은 6개월 뒤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쉽게 헤어진다.

나는 작년에 재상영된 이 영화를 보았다.
20년 전의 영화 같지 않은 세련됨과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배경으로 하는 명장면과 명대사들, 그리고 아름다운 배경음악들의 향연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20여 년 전에 여행을 갔던 아름다운 비엔나의 낯익은 풍경들과 프라하-빈-로마로 떠돌던 기억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장면들이 나와 공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장면과 명대사들이 주옥같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서로 다른 여행 일정을 포기하고 기차에서 내린 제시와 셀린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뭔가에 홀린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설렘’이라는 감정 때문에 어떤 것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무엇에 이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내려 일정한 목적지도 없이 비엔나를 거니는 제시와 셀린에게는 흘러가는 시간과 불어오는 바람에 상관없이 ‘설렘’이 서로 이끌어주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이 고전적인 영화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설렘’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기다리는 순간은 설레는 시간이다.
기다리는 어떤 것이 애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의 연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설레는 순간이 있다.

나는 가끔 출근길에 버스를 기다리며 설레기도 한다.
6시50분 발 새벽 첫 버스를 타고 구미로 출근하면서 새벽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나의 전결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며 설레여 보기도 하는 것이다.

새해 첫날엔 해운대 바닷가에 가서 새로운 해를 기다리면서 해 뜨기 전 두어 시간 동안 상당히 강도 높은 ‘설렘’의 순간을 가졌다.
해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그렇게 두든 거릴 수가 없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라는 이 시구절처럼 해운대 바닷가에서 여명이 밝아오기를 설레며 기다렸다.
가슴에 쿵쿵거리는 그날의 ‘설렘’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해가 떠오른 그 순간 알게 됐다.

나는 요즘의 답답한 사회 정치적 분위기를 반전시켜줄 새로운 희망을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설레며 해를 기다렸다.
황지우 시인이 암울했던 70~80년대에 기다린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너’를 기다리며,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라는 시를 썼던 그 심정으로 새로운 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희망을 기다린 것이다.

곧 봄이 올 것이다.
겨울이 아무리 춥고 혹독하더라도 봄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나무들은 겨울을 견딘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처럼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이 마치 오래된 애인, 또는 미래의 연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근두근 몹시 설렌다.
박상봉
중소기업성장 컨설턴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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