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춘 아지매 / 권순진

발행일 2017-02-21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기춘 아지매의 삶은 촛불 이전과 이후로 확실히 갈라졌다. 사드란 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을 듣기 전에는 심산 김창숙이란 인물이 이 고장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고 알 턱이 없다. 자기랑 나이는 비슷한데 얼굴은 엄청 더 예쁜 탤런트 김창숙은 안다. 이 나라에 ‘껍데기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치다 간 신동엽 시인도 처음 들었다. 같은 이름의 개그맨은 가끔 보아서 안다. 김소월 윤동주의 시 한두 편은 제목도 알아 완전 맹탕은 아니라 자부했던 아지매는 이참에 몇몇 시인의 이름을 새로 주워들었다. 시를 잘 써 억대의 상금을 거머쥐었다는 문인수란 시인의 고향이 성주란 사실도 집안동생이 일러줘서 새롭게 알았다. 군청 앞마당에서 시를 읽어주던 멀끔한 젊은이 김수상 씨도 시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의 사드 때문에 신간은 고되었지만 먹물은 좀 먹은 셈이다. 기분 잡치게 성 빼고 자기와 이름이 같은 사람, 미꾸라지란 별명을 가진 우씨가 청문회에서 모른다 안했다 앵무새처럼 주낄 때, 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했겠는데 분통이 터져 주둥이를 콱 쥐어박고 싶었단다.

- 사드배치 철회 성주촛불투쟁 200일 기념시집 『성주가 평화다』(한티재, 2017)

그제가 사드배치 철회 성주 촛불투쟁 222일째 되는 날이었다. 성주군민들은 국방부가 성주를 사드 배치 지역으로 발표한 지난해 7월13일 저녁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촛불을 켰다. 짧은 티셔츠를 입고 부채를 부쳐가면서 촛불을 들었던 주민들이 지금은 두꺼운 외투에 담요를 뒤집어쓸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제는 주최 측에서 마련한 야외용 화목 난로가 군청 앞마당에 이십여 개 지펴졌고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아리송한 비가 간간이 내렸다.

이날 지난 촛불 투쟁 200일을 기념하여 발행한 시집 『성주가 평화다』 의 ‘북 콘서트’를 가졌다. 촛불문화제 현장에서 낭송 되었던 시 30편으로 엮은 시집은 이미 4쇄를 찍을 정도로 군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성주 촛불문화제는 국가폭력에 맞서 지역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결연한 투쟁의 광장이자,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의 자리였다. 민주주의를 배우는 놀라운 학습의 현장이었으며, 무엇보다 노래와 춤, 이야기가 만발한 축제의 장이었다.’

이 시집은 지금까지의 성주 촛불문화제를 생생하게 집약한 기록이자, 시집 전체가 하나의 강물 같은 서사시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집회 현장에서 낭송 된 작품들이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 시대에 문학이 민중들과 어떻게 만나고, 또 어떻게 현장 속에서 시가 생명력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성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자부한다. 여기에 되도 않은 시로 참여한 게 ‘기춘 아지매’다. 아지매는 실명을 약간 꼬부린 실존인물이며 내겐 누님뻘 되는 친척이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5분에 쓱 긁어낸 시라고 들었다. 나는 그보다 2분을 단축해 쓴 글이라 애초에 시가 되긴 틀린 거였다. 3분만 더 할애하였어도 그럭저럭 시가 될 수도 있었겠는데 너무 단숨에 쓴 글이었다. 내겐 격문을 쓸 재주도 비장감도 장착되지 않았지만 기춘 누님의 무지에서 깨어난 요즘의 사는 맛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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