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따따부따]자리 높이와 책임의 크기

발행일 2017-11-16 20:15:5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조직 지위 따라 책임의 무게 달라 목적·수단·명분 떳떳하지 못하면‘NO’라고 말해야…책임전가 비겁 ”



전방 105㎜ 포병부대에서 포 반장으로 복무할 때 군단에서 포 사격 검열을 나왔다. 포 사격은 우리 부대 6문의 포 중에서 3번 포가 영점 사격을 하고 유효사격은 내가 맡은 1번 포가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1번 포는 2차 대전 때 쓰던 낡은 포로 평소 훈련에서도 잘 맞지 않아 우리는 똥포라고 불렀다. 고민을 하던 부대장은 수를 냈다. 영점 사격한 3번 포로 다시 유효사격을 하고 대신 우리 포는 사격 제원만 입력하고 사격 흉내를 내는 것이다.

3번 포에서 사격한 뒤 포구를 닦아낸 화약 묻은 헝겊을 1번 포 벙커로 가져와서 열심히 포를 손질하고 있는데 점검단이 들이닥쳤다. 검열단 중령은 내게 사격 제원을 묻고는 사격한 것이 맞느냐고 다그쳤다. 몇 차례나 사격했다며 사격 제원을 목청껏 복창했더니 점검단장은 “너 사회에서 뭐 하다 왔느냐?” “군 생활 얼마나 남았느냐?” “아무래도 헌병대에 가야겠다”며 바른말 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쐈다고 우겼다.

점검단은 벙커에서 나가더니 한참만에 다시 왔다. “너희 부대장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며 다시 물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개 분대장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점검단은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헌병대에 잡혀갔더라도 끝까지 우겼을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첩보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대목. 상급자는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대원에게 임무를 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시간 이후로 나는 당신을 모른다. 만난 적도 없다. 물론 이런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이 국가든 조직이든 명령이라는 해결해야 할 절대명제 앞에서 조직원 개인의 소신이나 의견 따위는 논란거리가 못 되었다.

변창훈 검사가 자살했다. 국정원의 댓글 조작사건 수사에 위장 사무실까지 차려 속이려 했던 것이 들통난 것이다. 아니라고 부인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왜 그랬느냐만 남았다. 스스로 속였는지 누가 시켜서 속였는지.

당시에는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신상이나 신념 문제는 더욱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그래서 다시 사건을 수사하다 보니 그런 행위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수사 중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검찰의 수사를 검사가 방해한 것이다.

그것이 상대를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속인다면 먼저 나 자신과 우리 편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검사가 국가가 아닌 정권을 위해 전쟁을 했다는 말인가’라고 한다면. 국가와 정권을 혼동했던 잘못,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 됐다. 어떤 사람은 숙명이라고도 하는, 그것은 시대상황이 주는 검사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다.

검사인 본인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그런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그가 얻는 이익, 잘못된, 비겁한 또는 불의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그가 얻는 이익을 생각하고 그가 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일 수도 있고 ‘자의 반 타의 반’일 수도 있는. 국정원 파견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조직에서는 지위에 따라 각기 다른 무게의 책임이 따른다. 그건 지위에 걸맞은 자존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하는 행위가, 목적이 정의롭지 못하고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고 명분이 떳떳하지 못하다면 ‘노’(NO)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을 조직이나 상급자에게 전가한다면 행위보다 더 비겁하거나 부끄러운 짓이다. 변 검사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군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해 여론조작 활동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죄가 된다면 장관인 나의 책임이다. 부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군과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로 국민적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또 자신의 혐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이경우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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