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본 뒤 얻은 것

발행일 2017-11-19 19:51:2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모두 힘내고 두배로 좋은 일 있기를 세상은 아직 살만 한 일 더 많으니하루하루를 희망으로 살아가보자”



길가에 나무들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어둑한 새벽에 무언가 간절히 기원하는 듯한 모습 같다. 다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파릇파릇 돋아나 무성한 그늘을 드리웠던 나무와 잎새에 가을이 내려앉아 이젠 겨울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 표정같이 흐뭇한 겨울이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 같다.  지진 소식으로 마음이 뒤숭숭하다. 하루의 결전을 위해 공부에 매진한 아이들이 허탈해한다. 모든 실력이 잘 발휘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준비하지 않았으랴. 생리통이 심한 아이는 시험 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약을 먹고 있었다. 이제 또 더 먹어야 하느냐며 울상을 짓는다. 하지만 지진피해를 본 주민들의 심정에는 비할 바 되겠는가. 인터넷에는 아픈 마음을 더욱 쓰리게 하는 댓글들이 떠돈다. 너희 때문에 시험을 못 치게 되었다는 지극히 철없는 말장난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직접 가서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피해 당사자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변에 수험생이 있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친척 아이가 시험을 치게 되어 금일봉을 보냈는데 다음에 그냥 있을 수 있겠느냐. 그때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는 정답이라며 이야기한다. “또 보내주세요. 두 배로 잘 치라고 격려하면서요.” 그대로 따르리라고 믿어보면서 지진 피해 입은 분들도, 또 우리 아이들도 모두 힘을 내고서 두 배로 좋은 일 있기를 기대한다.

모두가 뒤숭숭한 마음이라 일이 손에 잘 잡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안팎으로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하지만 모두 제 일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쁜 일정이지만 계획된 세미나에 참석하러 서둘러 나섰다. 못다 끝낸 일은 올라가는 기차에서 노트북으로 해결해가면서 학회장에 닿았다.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고 보고서를 내고서야 하루 일과가 끝났다. 밀리는 도로, 택시 안에서 늦을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겨우 기차역에 닿았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2분도 채 남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내려 제일 가까운 기차 칸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맨 끝 기차의 자리로 이동하면서 통로에 서 있는 승객들에게 미안한 얼굴로 눈인사를 하며 가까스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쳤다. 어느새 서울역에서 동대구역에 도착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짐을 챙겨 주차해둔 자동차에 올라 차 키를 꽂고 집으로 향한다.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집에 가면 이젠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어야지.

집에 닿으니 왠지 주머니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얼른 손을 넣어보니 강의를 다니면서 저장해둔 중요한 자료가 든 USB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손으로 더듬어 봐도 없다. 혹시나 가방에 따로 챙겨 넣었나 싶어서 가방을 통째로 바닥에 부어 샅샅이 찾아도 없다. 아뿔싸! 아침에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갔고 또 세미나장의 여러 방을 오가며 강의를 듣고 또 택시를 타고 마지막으로 기차 칸을 수없이 지나는 동안에 어디에서 흘러버린 것은 아닐까? 눈앞에 아지랑이가 마구 피어오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쩌면 좋을까. 기억을 더듬어본다. 오가며 흘렀으면 소리라도 조금 나지 않았을까? 이름도 성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자료저장소이지만, 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소중한 추억의 것들이 오롯이 담겨 있는데 말이다. 16기가 용량 중 절반이 넘은 사진 자료와 모두 중요한 것만 뽑아 넣어둔 자료첩인데 어쩌면 좋을까.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진정시킨다. 심호흡하고 꼭 좋은 일이 생길 것이란 자기 암시를 걸어본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분실물센터에 전화를 해 보기로 한다. 기차역 출발역부터 도착역까지 어디부터 해볼까. 맨 먼저 상행선 종착역 분실물센터부터 찍었다. 전화 신호음이 울린다. “혹시 USB-분홍 노리개가 달린 것 하나 들어온 것 없나요?” 잠깐 기다리라는 직원의 대답이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찌르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어찌 생겼지요? 색깔은요? 자세히 묻더니 “바로 그것이 여기 있네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가장 빠른 편에 실어 보내 줄 테니 해당 역 분실물센터에서 찾아가라는 것이 아닌가. 아~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의 기대에 따라 좋은 일은 꼭 찾아올 수도 있구나. 세상은 아직 살만한 일이 더 많지 않으랴. 하루하루 희망으로 살아가 보자.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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