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따따부따]2018년에 보는 영화 ‘1987’

발행일 2018-01-18 19:33:0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987년과는 다른 언론환경 탓일까이름·장소·원인 생략된 2018년 기사‘왜’를 남기는 것은 취재부족이 원인”



어떤 시인은 그랬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좋은 장면만 기억이 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영화 1987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당시 데모는 일상사였다. 대구의 경우 경북대가 있는 복현동 일대는 유별나게 심했고 때로는 대구역을 지나 중앙로까지 학생들이 진출했다. 그러나 신문에는 잘하면 1단 기사로 취급됐다. 아니, 일상사이어서인지 보도되지 않는 편이었다. 작은 기사. 그나마 1단이라도 보도되는 것이 당시로써는 다행이었다.

대신 ‘왜’가 생략된 기사였다. 대학생들이 수업을 팽개치고 교문을 박차고 시가지까지 진출해 나왔는데 ‘왜’가 없는 기사였다. 일상사여서였을까. 아니면 지면이 없어서였을까. 넥타이 부대까지 합세했는데, 기억에는 그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고 썼다. ‘보도지침’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라도 보도된 것이 당시 신문으로서는 대단한 용기라고 할 것이다.

“군부독재 물러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이런 구호들이 대학의 데모 이유였으니 ‘왜’라고 그대로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슬 퍼런 시절에도 기자들은 용감했다. 영화 1987을 본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빨갱이가 있었는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숨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그런 가운데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기사화될 수 있었던 것은 모름지기 기자들의 정의감과 용감성 때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중앙일보는 2단짜리 기사를 쓰면서 박종철의 신분을 소상히 밝혔다. 21세, 서울대 언어학과 3년, 부산 집 주소와 출신 초 중 고교이름. 아버지 이름, 나이, 직업, 근무처, 월 소득, 누나이름, 나이까지 모두 실명으로 썼다. 운동권에서 활동했음을 짐작한 가족들의 멘트와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로 언제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과 1차 사인 및 의문점까지 밝혀 검찰이 부검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중앙일보의 특종 보도에 이어 동아일보에서는 부검의의 소견까지 곁들여 박군 얼굴 사진과 함께 경찰 물고문에 의한 사망사건임을 밝혔다.

박종철군 사건에서는 수많은 기자가 나서서 확인했다. 대학을 확인해서 이름과 학과를 알아냈고 부산 집으로 찾아가서 가족관계나 주변 정황들을 직접 취재했다. 그런 발품을 팔고 확인한 기사였으니 이름 석 자를 밝히는 데 자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공안 사건에 대한 보도통제를 넘어 취재하고 보도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거기 비하면 지금 언론 보도는 그런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공안 사건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 보도 가운데 제대로 이름과 장소와 원인 등 고유명사를 생략하는 기사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기사를 대하는 국민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갖게 하는 기사,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기사들을 접하면서 이건 무슨 소설이야? 이건 도대체 취재한 거야?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이 죽었으면 누가 죽었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의문점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할 거 아닌가. 대형 교통사고가 나거나 화재가 발생했다면 어디에서 났고, 사고 차는 어디 소속인지, 다친 사람은 누구인지 알아야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상대가 있고 제3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1987년과 2018년의 미디어 환경이 다르기는 하다. 인터넷 시대에 실명으로 보도함으로 해서 발생하는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의 선의의 피해를 생각하면 실명 보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제대로 취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개인 정보보호와 인권을 핑계로 직무를 유기하고는 현실과 야합한 비겁한 자기합리화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987의 언론 환경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이경우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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