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 정민경

발행일 2018-05-20 19:53:3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 5ㆍ18민중항쟁 27주년기념 백일장 시 부문 대상작

이 시는 2007년 백일장 당시 18세 소녀의 작품이다. ‘그날’의 일을 요즘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싶은데, 항쟁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을 어린 학생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그날’의 현장을 놀라운 솜씨로 재현해놓았다. ‘그날’은 한 아저씨의 자전거에 올라탄 학생이 진압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학생을 진압군에게 내주고, 평생을 후회와 슬픔으로 살아야 했던 ‘나’에 대한 고해성사다. 산문 형식의 이 시에는 5ㆍ18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하였다. 학살당한 어린 시민군의 슬픈 얼굴,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시민의 비애,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진압군의 총구, 제 나라 국민에게 등을 돌린 비겁한 언론사들, 여기에 살아남은 자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까지 5월의 아픔과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ㆍ18 최초의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제화공 김경철씨다. 묻는 말에 대답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구타를 당해 사망에 이르렀다. 서해성의 ‘오월 일기예보’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농아신분증을 꺼내 보이면서 손짓 발짓으로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걸 희롱하는 걸로 알아들은 공수부대원은 군홧발로 얼굴을 짓이기고 몽둥이를 입에 쑤셔 넣고 말을 하라고 했다. 구호 한마디 외칠 수 없었던 벙어리는 맞아죽었다…” 그날을 겪지 않고도 그날을 생생히 재현한 정양도 지금은 29세로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 일을 한다고 들었다. 세월 참 많이 흘렀다. 이제 하루빨리 진실의 역사 위에서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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