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 함민복

발행일 2018-05-21 20:07:1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시인이 마지못하고 피치 못해 수락한 후배의 결혼식 주례에서 신랑 신부에게 해주었던 말을 한 편의 시로 다듬었다. 노총각 시인에게 주례를 부탁할 땐 뭔가 특별한 시적 수사를 은근히 기대했을 터인데, 그 기대에 부응코자 며칠 골똘히 짜낸 것이 이 ‘긴 밥상’ 이야기다. 당시엔 강화도 바닷가 사글셋방을 빌려 혼자 사는 처지라 큰상이 있을 리 없고, 있다 한들 그걸 펼 일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 때의 제삿날이라도 문득 떠올렸다면 이해가 된다. 긴 밥상의 한쪽을 들어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겠다. 흔들리지 않게 높이와 속도를 조절해가며 걸음걸이를 서로 맞춰가야 상위의 음식이 엎질러지지 않음을. 문턱을 넘고 좁은 문을 통과할 땐 바로 보고 가는 사람이 등 뒤로 걷는 사람에게 건네는 ‘조심’이란 짧은 한 마디, 그리고 앞사람의 눈빛만 보고 방향을 가늠하면서 상이 놓일 자리까지 탈 없이 옮겨와 상을 안착시킨다. 그런 상을 많이 들어본 부부는 척하면 삼천리고 안 봐도 비디오, 자연히 서로 빠삭하고 닮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감각이 무디어져 그 조화가 깨어지기도 한다.

부부란 엄밀히 말하면 계약관계이다. 부부 관계를 법률적으로는 ‘서로 동거하고 부양하며 협조하는 관계’라고 규정하였다. 다르게는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상호 원조관계를 뜻한다. 부부의 기종과 연식 그리고 취향에 따라 어느 것이 더 중하고 덜 할 수는 있겠으나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탈이 나도 곧장 위험해질 수 있는 관계가 부부다. 나이가 들수록 상대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정서적 교감이고 대화라고들 한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옅어져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문정희의 시 ‘부부’에서처럼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깃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의 연을 맺기 가장 좋은 계절이면서 신부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어제는 지인의 둘째아들 혼사였는데 영국왕실의 눈부신 결혼식도 있었다.

설교를 맡은 사제는 루서 킹 목사의 사랑과 구원에 관한 말을 인용했다.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믿으십시오.” 부부 관계의 요체가 사랑임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칼린 지브란은 또 “서로 사랑은 하되 사랑으로 얽어매지는 마라”고 했다. 연설이 끝난 뒤 흑인 합창단이 ‘Stand by me’를 불렀다. 그렇지, 다른 것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당신만 곁에 있어준다면” 일단 내 곁에 있어주어야 상을 마주 들든, 같이 모기를 잡든, 잉여분의 연고를 나눠 바르든 할 것 아닌가.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