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빠진 놈

발행일 2018-11-20 19:52: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김종헌아동문학가



얼마 전에 나 쓸개 제거했어요. 단풍 길에 오르자마자 운전을 하던 황 박사가 뜬금없이 한마디 한다. 뭔 쓸개 빠진 소리를…. 가로수 단풍이 곱게 물든 늦가을 어느 날 우리 둘은 그야말로 쓸개 빠진 소리로 길을 나섰다. 황 박사는 오래전부터 역류성 위염으로 고생한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한밤중에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응급실로 가기도 했고, 진통제를 먹으며 통증을 달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은 아픈 사람이 더 잘 안다고, 그는 의사의 진료를 받으면서 역류성 위염이 아닌 다른 병 같다고 우겼단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는 통증으로 이야기하지만 의사는 수치로 말한다”면서 역류성 위염을 고집했단다. 그렇게 아프니 안 아프니 실랑이를 하는 동안 5년의 세월이 지났고, 며칠 전 그는 쓸개를 떼어냈단다. 가슴 통증이 심한 것은 담낭에 문제가 있는 것이 병원이었단다. 한참 동안 벌겋게 흥분을 토해 놓은 황 박사는 ‘쓸개 빠진 놈’이란 말을 만들어낸 조상의 지혜에 감탄한단다. 쓸개를 떼고 나니 아픈데도 없고 소화도 잘되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난다고. 쓸개 빠진 놈처럼 실없는 소리를 해댄다.

수능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길거리 여기저기서 낯선 현수막이 걸렸다. 모 구청장 이름도 있었고, 우리 동네 시의원 이름도 보였다. 뜬금없이 수능을 잘 치란다. 그동안 수험생들이 고생했단다. 이것도 쓸개 빠진 짓 아닐까. 정치인이 지역구의 수험생을 위하는 마음이야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민감한 시기에 버젓이 불법으로 현수막을 거는 행위를 그 누가 진정으로 받아들일까. 수능이 얼마나 긴장되고 신경 쓰이는 일이냐 하는 것은 당일 아침 관공서 출근시간을 늦추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군부대의 협조로 전투기도 뜨지 않는다. 수많은 수험생과 학부형이 살얼음판을 걷듯 보내는 하루다. 그 떨리는 아침, 아들딸의 어깨를 슬쩍 감싸며 합격엿을 건네는 엄마의 눈에는 이슬방울이 어른댄다. 팔공산 갓바위는 발 디딜 틈 없이 기도하는 아줌마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졸인 마음으로 애타는 기도를 이어간다. 수능을 앞두고 갓바위부처님은 법당을 가득 메우는 애타는 기도소리가 불경이 아닌데도 귀담아들으신다. 두 눈을 감은 채로 조는 듯 앉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귀를 여신다. 덩달아 탑 아래 뜀뛰던 낙엽도 조용조용 염불을 욀 정도이다.

그런데 그들을 뒷바라지 한 부모의 떨리는 숨소리와 타는 속을 앞에 두고 몇몇 정치인들은 영혼 없는 문구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천 쪼가리에 적힌 글자는 수능을 응원하는 문구이지만, 거는 사람의 마음은 자기 이름 석 자 알릴 요량이란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더 파렴치한 것은 옥외광고물법을 위반하면서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리 없는 립서비스(lip service)이다. 저 넓은 유권자를 향해 흔드는 영원한 정치욕의 헝겊쪼가리일 뿐이다. 현수막 지정 게시대가 아닌 사거리 한가운데서 지자체 담당부서의 허가 도장이 없는 상태로 어느 정치인의 비양심이 펄럭거렸다. 시민들이 장사 좀 해 보려고 상품 세일 현수막을 붙이면 재수 없게는 서너 시간 만에 금방 강제철거 되기 일쑤다. 하지만 이번에 현수막을 건 정치인은 재수가 무지 좋았나 보다. 이삼일 동안이나 붙어 있었다. 올해 수능은 난이도 조정이 실패하여 불수능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수능 불신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일부 정치인의 이런 행태는 불수능, 수능불신만큼 고질적이다.

쓸개 빠진 황 박사는 실실 웃으면서 담당 의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터넷 검색창에 ‘가슴 통증’이라고 한 번만 툭 치면 심장, 역류성 식도염, 담낭 등의 관련어가 뜬다면서 그것을 놓친 의사를 원망했다. 일찍 알았다면 고생을 덜 했을 것이라고. 또 병은 수치가 아니라 통증이라면서, 상주 옥동서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 담당의사 이야기를 해댔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내내 분노가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진짜 그래서일까. 쓸개가 빠져서. 아직 난 쓸개가 붙어 있어 사소한 일에도 분노가 일어나는 걸까. 쓸개 빠진 황 박사는 정치인이 불법으로 내건 그 현수막을 수험생 격려 차원이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까.김종헌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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