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

[미주통신] 잠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창고 속 숨어있을지도 모를 ‘진품명품’소중한 것 가려내는 판단력 키운다면삶이 더욱 의미 있고 풍성해질 텐데

2019.01.10

이현숙
재미수필가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PBS라는 교육 방송국에서 매주 금요일에 방송되는 앤틱 로드쇼(Antiques Road Show)다.
한국의 ‘진품 명품 쇼’와 같은 맥락이다.
도시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가지고 나온 옛날 물건들을 전문가들이 감정해서 진품인지를 가리고, 예측되는 가격을 알려 주는 프로그램이다.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다.
자신의 물건은 아니라도 전문가들의 입을 주목하며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듣는다.
감탄사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의 탄식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긴장감에 저절로 동참하게 된다.

특별히 기억나는 물건이 있다.
백인 여성이 5살 정도 아이의 키만큼 높은 반원형의 탁자를 들고 나왔다.
지나가던 길에 어느 집 앞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야드 세일을 구경했단다.
좀 투박해 보이는 모습이 왠지 정이 가는 탁자여서 야드 세일치고는 좀 비싼 가격인 25달러에 사 왔다.
현관 옆에 두고 가방이나 열쇠를 두기에 편했지만, 모양이 세련되지 못해 남편과 딸아이에게 군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서랍에 무언가가 걸렸는지 열 수가 없었다.
작은 틈으로 손을 넣고 뒤적이는데, 손끝에 무언가가 만져지기에 탁자를 뒤집어 놓고 보니 서랍 안쪽에 누렇게 변한 종이가 붙어 있고, 인두로 지진 것 같은 도장이 찍혀 있더란다.

뉴욕의 고가구 전문 감정가로 유명한 쌍둥이 중 하나인 캐노는 그 여인에게 악수를 청하며 명품을 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탁자는 180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수제품으로 쇠못을 쓰지 않고 정교하게 나무만으로 연결한 것이다.
안타깝게 다리에 새겨진 조개껍데기 모양의 조각이 손상되어 감정가격이 8천 달러이지만, 만 달러는 넘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여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남편이 이 소식을 들으면 미안해할 것이라며 그동안 받은 구박을 한 눈 찡긋하는 것으로 갚아 주었다.
1910년도에 만들어진 카티에르 담배케이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30년 전,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하는 여인에게 어떤 남루한 손님이 돈이 없다며 내민 물건이다.
불쌍해 보여 세 번의 저녁 식사를 주었는데, 현 시세로 7천500~1만5천 달러의 값어치가 나간다고 했다.
그 남자는 아주 비싼 식사를 한 셈이다.

프로그램을 마치기 전 몇 분 동안 나오는 짤막한 뒷이야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좋은 물건인 줄 알고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대치 이하로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나온다.
전설적인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의 사인이 담긴 공을 집안의 가보로 남기려 했는데 가짜로 판명받았다.
오래된 일본 도자기인 줄 알고 유리 상자에 넣어 곱게 보관했는데 흔한 화병이다.
실망했지만 유명 프로그램에 나온 것만도 좋은 추억이라며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미국인은 허접한 물건들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보물을 찾아냈을 때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고 부른다.
우리 집 차고에는 오래되어 색이 누렇게 변한 상자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시삼촌, 그리고 타 주에 사는 시누이의 물건이다.
지저분해 정리하겠다니 남편이 그 안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들이 있기에 당신 혼자서는 안 된다며 못하게 말린다.
가족들의 숨결이 담긴 물건들이니 하나씩 열며 과거로 돌아가 추억을 즐기자고 했다.

덜렁대는 나에게 맡겨놓으면 대충 버릴 것을 알고 멋지게 포장해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 타인에게는 일전의 가치도 없지만, 본인에게는 영원히 간직하고픈 진품이고 명품일 수 있지 않을까. 오래된 물건 안에는 태어난 시대의 역사와 흐름을 담고 있다.
세월이 스치고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이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닐까. 손때 묻은 물건엔 정도 담긴다.
물건뿐 아니다.
의식 속에 얼마나 많은 쓸모없는 생각들이 섞여 혼선을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가치 없는 일과 생각에 얽매어 소중한 것을 놓쳐 버리고 후회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물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분별의 눈이 부족해 좋은 인연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낸 후 문득문득 그리워하기도 한다.
주위를 돌아보자. 어쩌면 가까운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을 가려내는 판단력을 키운다면 삶을 의미 있고 풍성하게 할 텐데 쉽지 않다.

우리 집 차고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들이 상자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풀풀 먼지를 털며 남편과 함께 추억의 창고로 들어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그들을 깨울 날이 기다려진다.
혹시 숨죽이고 있을 진짜 돈이 되는 물건을 기대하며, 오늘도 진품 명품 쇼를 통해 분별하는 눈을 키운다.
누가 알랴. 나도 그 프로그램에 나가 무언가를 안고 줄을 서서 전문가의 감정을 기다리고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현숙
재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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