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현혹

“이 무겁고 처량한 시대하필 장미는 이런 때에 와서바라보는 감정조차 미안하게 한다”

2016.06.02


신재호
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지난 5월 경북대 교정에 장미가 만개했다.

영화로 유명해진 전남 곡성 장미축제에서 볼 수 있다는 1,004종은 아니지만, 종류도 많고 교정 곳곳에서 보일 만큼 수량도 많다.

경북대에 총장이 있던 시절 교정에 장미를 심고 가꾸는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그때 심은 장미가 잘 자라서 지금은 교정을 지나가던 사람에게 보행의 목적을 잊고 문득 멈추게 하는 풍경이 되고 있다.

장미의 원산지는 동북아시아지만 이미 고대로부터 수많은 교잡종, 원예종으로 개발되어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으로 약 1만종 이상 존재하고 현재에도 해마다 200품종 이상이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꽃말은 장미의 색깔마다 다르다.
붉은 장미의 꽃말은 역시 열정, 분홍 장미는 행복한 사랑, 주황 장미는 첫사랑, 보라 장미는 영원한 사랑, 흑장미는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노란 장미는 완벽한 성취, 흰 장미는 순결이란다.

파란 장미는 원래 ‘얻을 수 없는 것’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발전한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기어이 파란 장미가 탄생했고 꽃말도 ‘기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장미는 송이 수에 따라 꽃말을 따로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세 송이는 ‘I Love You’, 22송이는 ‘우리 둘만의 사랑’, 35송이는 ‘사모합니다’, 44송이는 ‘죽도록 사랑해’, 99송이는 ‘구구절절한 사랑’, 100송이는 ‘100% 완전한 사랑’이란다.
아무래도 꽃송이 수에 따른 꽃말은 원예계에서 퍼트린 말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장미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장미를 의인화하여 “첩은 눈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로 쓰고 있다.

또 고려사에는 한림별곡의 가사를 소개하면서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 홍작약, 백작약, 정홍작약, 어류옥매, 황색 장미, 자색 장미, 지지, 동백이 사이사이 꽃 핀 광경은 어떠한가?”라는 대목이 있다.

현대에 우리가 보는 장미는 1867년 하이브리드라는 교잡종이 탄생하면서 시작이 되었으므로 아마도 우리 역사서 속에 묘사된 장미는 지금과는 다르게 꽃잎수가 많지 않은 야생종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야생 장미는 찔레나무, 해당화, 노랑해당화, 돌가시나무, 생열귀나무, 용가시나무, 붉은인가목 등으로 다양하니 말이다.

연구실 창으로 ‘장미원’이란 이름의 작은 정원이 보인다.
어제와 오늘은 마음먹고 장미원을 쳐다보니 장미꽃을 대하는 많은 사람의 표정이 보인다.
아직 소녀티가 폴폴 나는 참새떼 신입생들도, 사무실에서 억울하게 욕먹고 먹먹한 마음으로 뛰쳐나온 학과의 조교 선생도, 경북대로 새벽 운동 나온 산격3동 11통 4반 아주머니들도, 서두를 것 없이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는 은퇴한 명예교수님도 장미원의 장미에 잡혀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민망할 만큼 빤히 쳐다보고, 살펴보고, 가까이 가서 향기 맡고,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꽃을 찍는다.
5월의 이 아름다움을 배경화면으로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혹은 톡으로, 스토리로, 밴드로 널리 나누기 위해.
필자는 하루 중 해가 넘어가지 직전 태양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저녁녘을 가장 좋아한다.
찬 공기가 물러가고 모기는 아직 몰려오지 않은 요즘 저녁이면 석양을 받아 아직 그 빛깔이 선명하며 향기는 가라앉아 떠도는 장미원에 나가 서성인다.

누군가는 직업을 잃고, 누군가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자존심에 멍들고 또 누군가는 짐승처럼 사냥당해 발기발기 찢기고도 외면당하는 이 무겁고 처량한 시대에 장미 타령이나 하고 있기도 참 곤란한 지경이지만, 하필 장미는 오월에 이렇게 와서 바라보는 감정조차 미안하게 한다.

백 년 후에도 만약 사학자가 존재한다면, 그 멸종을 간신히 면한 사학자가 이 글을 우연히 발견한다면, 모든 가치가 난도질당하는 이 혼란의 시대에도 오월의 장미에 현혹된 한심한 교수 한 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미소라도 지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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