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식구 / 구광본

늦은 밤에 모여 앉았습니다/ 수박이 하나 놓여 있고요/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잎사귀,/ 잠못드는 우리 영혼입니다/ 발갛게 익은 속살을 베어 물 때마다/ 흰 이빨이 무거워지는 여름 밤/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 할까요/ 넓고 둥근 잎사귀들이 퍼져나가/ 다시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까지는요/ 오랜 헤어짐을 위하여/ 둥글게 모여 앉은 이 자들이/ 아버지, 바로 당신의 식구들입니다

- 시집 『강』 (민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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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 벌써 지나고 내일이면 처서인데도 여전히 무덥다. 불충스럽게도 지금은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지 않고 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칠월 열아흐레면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와야 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두 분 말고는 함께 제사 지낼 사람이 없기에 어지간하면 월차를 내어서라도 참석하고자 애썼다. 제사를 마친 뒤 꼭지부분을 칼로 도려낸 수박 한 덩이를 갈라먹거나 때로는 얼음을 섞은 수박화채를 만들어 식구들끼리 나눠 먹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박은 여름과일의 상징이다. 본디 수박이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함께 나눠먹어야 제 맛이고 또 혼자서는 다 먹을 수 없는 과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박은 기억과 추억의 과일이다. 여름밤 큰 수박 한 통 평상 가운데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는 것만으로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잎사귀’인 ‘잠못드는 영혼’들은 더운 줄 모르고 삶을 위안 받는다. 그러면서 ‘발갛게 익은 속살을 베어 물 때마다 흰 이빨이 무거워지는 여름 밤’ ‘넓고 둥근 잎사귀들이 퍼져나가’는 꿈을 꾼다. 지금은 그때 둘러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지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게 없으나 까만 수박씨를 발라낼 때 마다 밤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들이 촘촘히 박히면서 그리움이 움트고 추억이 새겨졌을 것이다. 저녁 어스름을 밟으며 대문을 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그 크고 둥근 과일.

새끼줄에 묶은 얼음이 녹을세라 잰걸음으로 집에 오면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긁은 수박을 양푼에 담고 막 설탕을 붓고 계셨다. 살평상에 둘러 앉아 얼음 띄운 화채 한 그릇씩을 배당받았을 때만큼은 공연한 트집을 잡아 어머니의 밥상을 때려 엎었던 아버지에 대한 추문을 잊을 수 있었다. 한때 질 나쁜 욕망의 부산물이라 여겼던 내 자신이 아버지의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애써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릇을 비우고 배속까지 시원해지면서 매미울음조차도 한밤의 세레나데로 들렸다. 아름다운 여름밤이었다. 그리고 ‘오랜 헤어짐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재촉했던 것에 대해서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둥근 것은 다 좋은 것인가 보다. 둥근 수박, 둥근 밥상, 둥근 달, 둥근 세상, 둥근 바퀴, 둥근 메달, 둥근 물방울, 둥근 잎사귀. 둥글게 모여 앉아 둥근 마음으로 지상의 모든 둥근 것들의 둥근 등을 들여다보는 일은 용서이고 화해이며, 결속이고 꿈이기도 하리라. 할아버지 기일에 지상에 없는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당신의 식구들이라야 몇 되지도 않는데 올해는 동그랗게 한번 모여 앉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처럼 비닐 끈에 묶은 수박 한 덩이 사들고 오지 못했고, 이젠 수박화채를 만들어줄 어머니도 안 계십니다. 식구들이 둥글게 앉아 수박을 깨물고 까만 씨를 뱉어내던 추억은 기어이 먼 그리움으로만 남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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