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발행일 2017-06-05 20:08: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제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중략)// 역사는 산 자의 전쟁터면서 죽은 자의 감옥이다/ 연극은 끝나도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관객들이 박수치고 고함지르며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퇴장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

- 계간 『리토피아』 2014년 겨울호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지만 드라마에서도 보았듯 그것은 이방원의 집권야욕에서 비롯한 갈등관계였지 이념의 싸움은 아니다. 거슬러가서 정몽주와 정도전 사이의 갈등을 이념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방법론이 다를 뿐 둘 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개혁파로 친원정책을 고수한 수구보수 세력과 맞선 인물들이다. 영천에서 태어난 영일정씨 정몽주와 영주 태생인 봉화정씨 정도전은 동년배로 고려말 성균관에서 목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한 벗의 관계였다.

삼봉과 포은은 사사로운 권력에 대한 욕심 없이 새로운 세상을 통해 백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방원과 정도전이 나눈 대화에 흥미로운 것이 있다.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당신이 품으면 정치고 내가 하면 사심인가”라면서 “이긴 자의 사심이 대의가 된다”고 했다. 그의 말은 불변의 진리처럼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선조 즉위 후 사림파가 권력의 주도권을 잡은 뒤로 사림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노론은 동인에서 분열된 남인을 괴멸시키고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노론 일당독재는 정조 사후 정권을 독차지하는 망국의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1905년 외교권을 넘긴 을사오적 전원이 노론이고, 노론의 마지막 당수 이완용은 결국 당론으로 나라까지 팔았다. 그래서 친일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말도 나왔다. 조선의 당쟁은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에서부터 출발하였고, 그 시작은 퇴계학파인 김효원과 율곡의 계보인 심의겸이었다.

이조정랑은 정5품에 불과했으나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인사수석과 민정수석을 겸한 꽃보직이었다. 정3품 이상 당상관이라도 길에서 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할 정도라 한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으로 부른 것은 동대문 쪽에 그의 집이 있어서고, 심의겸 역시 서대문 방향에 집이 있어서였다. 그들이 학문적으로 떠받들던 이황과 이이는 지금도 나란히 지폐 인물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노론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가세하면서 부패의 극으로 치달았고 결국 나라를 잃었다. 해방 이후에도 노론벽파 출신들이 그렇듯 자신의 영달을 앞세운 기회주의 사대주의자들이 득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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