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따따부따]평창올림픽, 평양올림픽

발행일 2018-02-01 20:11:1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언론의 정현 향한 2주 만의 온도차현송월에 일희일비 하던 것과 대비남북단일팀 성공으로 논란 잠재우길”



인천공항에 도착한 영웅 정현은 “이렇게 많은 환영 인파가 공항에 나오셔서 깜짝 놀랐다”며 출국 때와는 달라진 위상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4강 위업은 정치권의 적폐청산 공방과 잇따른 화재 사고로 소침해진 국민들의 등짝에 격려의 스매싱이 됐다. 비록 준결승에서 우승자 페더러에게 기권패 했지만 세계 랭킹을 58위에서 29위로 수직 상승케 한 그의 선전은 전 국민의 박수를 받을 만했다.

22살 청년 정현이 전 세계랭킹 1위였던 노바크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올라서자 그제야 국내 언론들이 정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끝난 뒤 조코비치는 자신의 몸 상태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그는 마땅히 이길 만했다”며 자신의 부상 때문은 아니라고 정현을 추어올렸다.

정현은 사실 공항 출국장을 나설 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미 세계적인 차세대 테니스스타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한국 언론의 눈높이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2014년 18살의 나이로 US 오픈테니스 대회에서 예선 2라운드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거뒀을 때도, 2015년 프랑스 오픈테니스 롤랑가로스 대회에서 예선전에 출전했을 때도 일부 스포츠 신문들이 단신으로 보도하는 정도였다.

정현이 호주 멜버른에서 조코비치와 3시간여의 혈투를 벌이는 동안 국내에서는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현송월 단장 일행의 남한 공연장 사전점검단이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벌인 현장 점검이 있었다. 간다, 안 간다 변덕을 부리던 북 점검단의 2박3일 일정은 언론이 만든 황제의 행차였다.

중앙일간지는 물론 지방지와 지상파 방송들조차 중요 뉴스로 다루었고 특히 종합편성채널들은 물 만난 고기였다. 방송국의 전 역량을 집중해서 현송월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안방으로 전달해 주려는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국민들은 앉아서 평창 동계올림픽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현의 경기가 지상파의 중계 기회를 얻지 못한 데 비하면 얼마나 커다란 투자인가.

현송월 일행, 특히 현송월의 말 한마디를 담으려 언론사마다 난리였다. 핸드백은 얼마짜리 무슨 제품이라는 둥 의상, 화장, 표정까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눈물 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떤 기자는 “현송월이 웃으면 따라 웃고 표정이 불편해 보이면 비위를 맞췄다. 윗사람 심기를 눈치 보는 측은한 삼촌처럼 보였다”며 ‘두 손을 모으고 현 단장의 심기를 살피는 우리 측 인사들의 모습’이라 친절하게 스케치하고서 설명을 붙였다. 지나친 경호 때문에 근접 취재가 불가능했다며 항의하는 모습도 여러 차례 목격됐다.

드디어 정치권까지 가세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여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했는데,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게 평창올림픽이냐, 평양올림픽이냐 하고 포문을 열었다. 올림픽의 남북 단일팀을 반대한다는 서한을 IOC에 보내는 올림픽 위원도 있다. 현송월 일행의 황제 경호도 문제가 됐다. 밀양 화재 참사에 ‘현송월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절정은 4일로 예정됐던 남북의 금강산 합동 문화공연을 북측이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다. 북측은 공연 일주일 전에 “북의 진정어린 조치를 모독하는 여론을 확산시킨다”며 우리 측 언론보도 태도를 문제 삼았다. 여러 장면이 한꺼번에 머리를 스쳤다.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당시 한국 기자들이 중국 측 경호원들에게 폭행당한 사건도 오버랩됐다.

정현이 멜버른 대회에서 경기 후 기자회견 장면과 수십 명의 카메라 기자들이 포토존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정현이 인천 공항을 나갔을 때와 2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느꼈던 대우의 차이는 그냥 그를 테니스 선수로 대하지 않는 언론들의 속살을 보여준 것이다. 제발 정현을 그냥 테니스 선수로 내버려 두기를 권한다. 무엇보다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 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북 예술단의 공연이 예정대로 열리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평창올림픽을 누가 평양올림픽으로 만드는가’ 하는 논란도 잠재워지기를.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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