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발행일 2015-07-10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신재호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신재호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5분23초 - 신 교수의 삶이 리부팅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좀 어떤가?” 신 교수의 네트워크 디바이스로 인사를 건네 온 건 친구 엄 교수였다.

엄교수: 자고 일어나니 억만장자가 된 기분은 어때? 온 세상의 푸쉬가 다 자네의 사고 소식을 밀어내고 있어. 네트워크에서 사라졌다가 돌아온 최초의 인간이 된 것을 축하해.

신교수:억만장자까지는 아니지만 일생 가져보지 못했던 크레딧이긴 해. 정전 사고 이후에 내 판단모듈이 리부팅 되자마자 처음으로 처리한 일이 내 사고 뉴스의 판매였어.

엄교수:그나저나 왜 보조배터리는 강제로 제거했나? 자네가 그렇게 일탈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신교수:일탈이라고? 2050년 이후 50년 이상 무용지물이던 혹을 없애는 것이 잘못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어. 판단모듈이 계속 경고를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 실행한 일이었어.

엄교수:그게 무슨 말인가? 디바이스의 보조를 받기는 하지만 생각, 판단, 실행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야.

신교수:글쎄? 그럴까? 가령 자네는 수업모듈 없이 학생들에게 맞춤형 교육자료를 보낼 수 있나? 혹은 지금 이후의 일정을 관리모듈 없이 알 수 있나? 나는 어제 모든 디바이스와 네트워크 링크의 전력이 끊어진 순간, 단 하나만 떠올랐어. 공포! 그것뿐이었어. 그 순간의 최적 행동 옵션이 정말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어.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해 온 것은 내 두뇌가 아니라 내 디바이스, 아니, 내 디바이스에 링크된 쉬리였으니까

엄교수:보조지능시스템의 이름은 쉬리가 아니라 시리야. 100여 년 전에 유행한 클라우드형 대화 소프트웨어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신교수:그래 맞아. 시리. 어쨌든 어제 나는 확실히 깨달았어. 내 생각의 주체는 내 판단모듈이었던거야. 내 영혼은 시리의 내 기억모듈에 저장된 3.3 엑사바이트의 정보이고, 내 개성은 타인의 기억모듈에 흩어져있는 나에 관한 정보의 총합이겠지. 나는 의문이 들어. 과연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모든 디바이스와 링크를 끈다면 과연 22세기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엄교수:자네의 그 5분23초처럼 말인가? 힘든 일이야. 당장 우리 대화도 끊어지지 않겠나?

신교수:네트워크 없이는 자네와 내가 실제 공간에서 음성으로 대화를 해야겠지. 물론, 언어모듈에 의한 해설이 없는 음성언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겠지만.

엄교수:수련이라. 단순한 음성언어로만 대화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만약에 자네가 나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라고 한다면 언어모듈의 도움 없이 그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하는 어떤 형식의 식사인지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신교수:추측으로 해낼 수 있어. 불과 100년 전까지도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의사를 서로 전달해 왔어.

엄교수:그래서 실패했지 않은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고, 오해하고, 심지어 고의적 왜곡도 가능하지 않았나?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던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의 결과가 오늘날이잖나? 누가 봐도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원자력 발전을 21세기에도 꾸준히 늘린 덕분에 불과 한 세기 만에 지구의 97%가 활동 디바이스 없이는 산책도 할 수 없는 땅으로 버려지지 않았나?

신교수:자네 비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불완전한 의사소통의 방법으로도 집단 지성을 온전히 흡수한 시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구하지 않았나? 하지만 전 인류가 시리에 접속한 지 불과 50년 만에, 이제 우리는 시리 없이는 단 하나의 판단도 하지 못하게 되었어.

엄교수:자네는 시리 없이도 올바른 판단을 할 방법이라도 찾았단 말인가?

신교수:잘 들어보게. 우리는 늘 시리와 연결되어 생활하고 있지. 시리가 인도해주고 바로 잡아주는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간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나? 우리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기 매우 어려울 거야. 그럴 때는 가만히 앉아 모든 링크를 끊고 그동안 시리에 의해 제시되고 걸어온 삶의 길을 되짚어 봐야 해. 모든 링크를 끊고 ‘스스로의 생각’에 잠겼을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거야. 만약 시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생각’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그 생각을 오래도록 품을 수 있게 돼. 그래! 고전문학에서 ‘마음’이라고 표현되는 바로 그 경험을 하게 되고 비로소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거지. 인간은 네트워크 없이도 본래부터 스스로 생각과 판단을 하고, 그 근거로 행동할 수 있는 시리와 같은 존재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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