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지진경보 소동

발행일 2017-03-09 20:07:0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엘에이로 이사한 이후 약간의 지진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 작년 10월 초, 내리 며칠을 계속 진도를 측정하는 리히터계가 3, 4를 빈번히 왔다갔다했다. 진앙지는 엘에이에서 동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이라 흔들림이 느껴지긴 했어도 사람들을 긴장시킬 정도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마음이 졸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다녔다. 그 정도 지진은 예사로 있었던 것이라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나의 불안반응이 더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얼마 후 신문과 방송에서 일제히 남가주 일대에 진도 7 이상의 격진이 예상된다는 뉴스를 쏟아 냈다. 엘에이 남쪽 샌디에이고 부근의 솔튼 시티에 지진 빈도가 높아졌고 남가주 일대에 진도 7 이상의 격진이 예상된다는 소식이었다. 연이어 지진 경보령이 떨어졌다. 비상식량과 비상 물품을 준비하고 대피요령을 숙지하라는 뉴스가 신문 가판대를 채웠다. 아, 이런! 온몸의 세포가 켜켜이 일어서는 기분이었다.엘에이 카운티의 남쪽 끝과 오렌지카운티의 북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진도 5.2의 라 하브라 지진 때도 장식장과 책꽂이의 물품들이 모두 쏟아지며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라 하브라 시로부터 시 경계를 네 개나 넘어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책꽂이 위에 올려놓았던 조그만 알람시계가 공중을 날아 자고 있던 아이의 침대 머리맡으로 떨어졌다. 각도가 조금만 옆으로 갔어도 아이가 큰 상처를 입었을 상황이었다. 방에서 식구들이 놀라 뛰쳐나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물을 좀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를 몰고 근처 마켓에 들렀다. 초저녁인데도 셔터가 모두 내려져 있었다. 몇 군데를 헤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주유소로 들어갔다. 약탈을 우려한 듯 주유소 매점도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다행히 물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그만 창이 열려 있어 물 서너 병을 살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피부가 오싹해지며 재난상황인 것이 실감 났다.

그런데 7도라니! 막내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있으니 걱정이 만 배로 밀려왔다. 아이가 있는 곳이 진앙지에서 더 가깝고, 무엇보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화를 당할까 싶어 마음이 졸였다. 집에서 좀 멀리 있는 이 녀석에게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던지, “엄마 말 다 외웠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날, 부랴부랴 지진 대비 물품을 준비하러 다녔다. 진도 7은 단층운동이 지표까지 전해져 지반이 기울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부르는 말도 강진이 아니라 격진이란다. 작년에 본 지진영화 <샌 안드레아스>의 장면들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비상용품 구입은 스포츠용품점에 가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누구에게선가 들은 기억이 나서 집 근처 ‘빅5’에 차를 세우고 매장에 들어섰다.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끔 운동용품을 사러 가던 집이었는데 그날은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고르는 물건은 비슷했다. 나도 걸음을 빨리하며 매장 내 통로를 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손전등을 집었다. 그리고 건전지, 등산용 소형 라디오, 호루라기, 운동화, 헐렁하게 입을 트레이닝 복, 칼, 침낭 등을 골라서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뭘 더 사야 하는지, 이 정도면 재난대비라 할 만한 건지, 머리가 사뭇 복잡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서로의 쇼핑 바구니를 흘깃거렸다. 그때 내 뒤에 섰던 중년의 백인 남자가 내가 들고 있던 침낭을 보더니 말을 건다.

“우린 지금 캠핑 준비를 하는 거죠?”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의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도 긴장이 풀리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자기는 텐트도 샀다고 유쾌하게 떠벌린다. 텐트는 3, 4인 용으로 펼치고 접기에 쉬워서 비상용으로 좋다고 했다. 내가 속으로 ‘텐트를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몇 사람이 줄에서 빠져나가 소형텐트를 집어 온다. 나도 쇼핑 바구니를 줄에 남겨 두고 텐트를 집어 왔다. 낙천적이고 위트 넘치는 미국인 덕분에 집에서 출발할 때보다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영화처럼 땅이 쩍 갈라지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도 오갔다.

유머와 위트는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에게 최고의 덕목으로 꼽힌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슈워츠 교수가 생각난다. 어떤 순간에도 삶은 즐겨야 한다는 모리 교수의 담대함은 미국인들의 이런 기질에 바탕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대비책을 세웠으면 그다음엔 즐기는 게 상책일지 모른다. 그러다가 큰 재앙에서 살아남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큰 행운이 없을 테니 말이다. 미국살이는 그들의 여유를 배우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이성숙미국 크리스천헤럴드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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