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수상한 시대

발행일 2017-07-06 20:06:0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성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가족 형태까지 변형돼 고통문화의 틀에 구겨 넣어선 안돼”



미국에는 TV드라마에 다양한 가족형태를 모델로 한 시트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아들이 남성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고, 남성커플로 이루어진 아들 부부는 다시 아들을 입양한다. 그 아이는 엄마는 없지만 아빠가 둘인 가정에서 잘 자란다.(잘 자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드라마는 게이 가정의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여 준다. 애꾸눈 동네에 가면 두 눈 가진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했다. 지금 미국 사회에는 이 드라마의 왜곡된 설정을 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동성혼이 합법화한 현실에서 게이 가정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이다.

동성혼 합법화는 ‘두눈박이’들에겐 폭력이지만 이미 성을 도구로 받아들인 애꾸눈 동네에서 ‘양성 결합’의 아름다움과 그 순결성을 운운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것이 되고 말았다. LA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해안에 이르기 전에 게이 커뮤니티가 있다.

도로의 횡단보도는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고, 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지나가는 사내들로 물결을 이룬다.

건물 곳곳에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사전 정보 없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풍경에 넋을 잃을 정도다.

2년 전만 해도 게이 거리는 관광지였고 동성애자들은 최소한의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클럽이나 카페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나는 게이’라며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실 개인의 성 취향이 어떻든지 몰라도 그만이다. 문제는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동성애가 한 원인인 에이즈는 과거 지구를 휩쓸던 페스트의 위력에 못지않다. 한번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치유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성혼을 인정하는 법안까지 통과되고 보니 게이 식당, 게이 바, 무지개 클럽들이 활개를 치고 생겨나고 있다. 세상이 그들 편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의 파티인 퀴어가 무슨 대단한 것인 양 문화로, 축제로 대접받고 있다. 동성애나 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은 ‘반사회적’ 인물로 몰려가는 상황이다.

동성혼 합법화는 성 개념을 일시에 개방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얼마 전에 LA 한인타운의 한 사우나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중도여성(내 양심으로는 이들을 여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이 여자 사우나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여성으로 완성되지 않은 그(he)는 남성체형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아랫도리를 제외하면 누가 봐도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사우나 안에 있던 여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체격의 이 중도여성을 보고 남자로 오인하여 욕실을 뛰쳐나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사우나장은 한때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들의 기초적 자아를 형성하는 성 구별이 모호해지면서 여기저기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뼈로 이브를 만드신 이래,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해 왔다. 그런데 최근 무성이라는 신개념의 성이 또 하나 등장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의 사람이 탄생했다. 오리건 주 멀트노마 카운티 법원은 최근에 남성 혹은 여성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성’이라고 판시했다.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특징을 모두 가진 사람을 양성이라고 한다. 이제 인간의 성은 남성 여성 양성 무성 트렌스젠더로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미국 성소수자 인권 법률 사무소는 “법원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판결한 것”이라고 환영을 표했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의 두 모양이 있을 뿐이다. 왜 이들을 병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가?

성 소수자들이 세력을 키워가는 때라서인지, 정가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는 목소리가 높으나 그들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진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가 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일깨운 것은 세상 눈치에 길들지 않은 소년에 의해서였다. 소신 있게 바른 가치를 세우는 위정자가 그립다.

성전환자의 경우를 보자. 윤리적 혼선과 관계해체에서 오는 가족의 붕괴를 어찌할 것인가. 아들이 갑자기 딸로 둔갑(?)하여 나타나고 아버지가 어느 날 여장을 하고 나타나 “나는 이제부터 여자로 살겠다”고 하는 일을 상상해 보라.

가족 전체에게 끔찍한 고통이 된다. 이미 이런 일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상대성 존중을 내포하는 단어가 문화다. 성숙한 한 문화는 다른 문화에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병리적인 현상을 문화의 틀에 구겨 넣는 위정자들로 말미암아 미국이 앓고 있다.

최근에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인지 한 남성이 두 여자와 사는 형태의 가족 드라마가 미국 안방으로 들어왔다. 성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가족 형태까지 변형되고 있다. 인간 심연의 추악성이 문화로 탈바꿈하여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이성숙미국 크리스천헤럴드편집국장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