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발행일 2018-03-26 20:12:5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전직 대통령 행복하지않은 결말 부패·미투 등 나쁜 소식 겹쳐멋진 봄날 씁쓸한 기분만 가득 ”



재작년 볼리비아의 헌법 수도 수크레에서 만난 스페인어 강사 타티아나. 20살의 딸을 둔 그녀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볼리비아의 마초주의에 희생당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전형적인 멘티로소(거짓말쟁이) 마초였다. 그녀에게 하늘의 달도 별도 따주겠다며 동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인이 타티아나를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총각이라고 자신을 속인 것도 모자라 정체가 드러난 그날부터 폭력이 시작됐다.  그 뒤로 야반도주하듯 남편을 피해 딸과 함께 도망친 것만 수차례. 그때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와 폭력과 갈취가 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술과 음악만 좋아하고 가정은 등한시하던 마초였다. 그녀는 볼리비아 남자라면 신물이 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눈이 나빠도 안경이 너무 비싸 살 수가 없다며 형편이 되면 볼리비아를 벗어나서 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녀에게 조국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얘기를 들을수록 그녀가 너무 측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그녀가 생각난 건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미투’운동의 피해자처럼 그녀 역시 젠더폭력의 피해자인데다 마침 ‘행복’과 관련된 유엔 자문기구 SDSN 리포트가 때맞춰 발표됐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렇게 떠나고 싶어했던 볼리비아의 순위와, 별 어려움 없이 돋보기안경 정도는 쉽게 살 수 있는 우리나라와의 차이도 궁금했다.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 사회의 너그러움 등을 기준으로 작성된 이 순위에서 볼리비아는 156개 조사대상국 중 62위였다. 100위권 밖으로 확실하게(?) 밀려 있을 거란 생각을 했는데 의외였다. 한국과의 비교는 더 의외였다. 우리나라는 볼리비아보다 ‘겨우’ 5계단 높은 57위에 그쳤다.

뿐만 아니었다. 높은 범죄율에 미세먼지 피해가 극심한 멕시코와의 격차는 더 충격적이었다. 미 국무부는 올해 초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며 자국민에게 멕시코 5개 주 여행금지령을 내린 바 있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 등과 동급이다.

멕시코는 미세먼지로 인해 2016년 세계 최초로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차량 2부제 운행을 도입할 만큼 환경오염 역시 심각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국가 행복지수 순위는 24위였다. 수치로만 놓고 보면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장벽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로 그’ 멕시코가 한국보다 최소 2배는 더 행복하다는 의미다.

상위권인 북유럽국가와 우리나라의 격차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비교 우위로 상대적 우월감을 느낄 것으로 예상한 중남미국가의 행복지수가 우리와 비슷하거나 높다는 건 놀라웠다. 국민소득은 몇 배나 낮은 반면 범죄율은 몇 배나 높은 엘살바도르나 니카라과 역시 행복지수가 40, 41위로 한국보다 높았다.

물론 행복지수가 높다고 해서 그 나라 모든 국민이 행복하거나 반대라고 해서 모두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사람이 타티아나를 동정할만한 위치는 아니란 건 확인해 줬다. 행복지수로만 보면 타티아나가 오히려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행복한가 반문해 봤다. 국내총생산,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에서의 만족도는 괜찮은 것 같다. 그렇지만 매일매일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될 나쁜 소식들을 너무 많이 듣고 보면서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 사회의 너그러움으로부터는 분명히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최근엔 더하다. 끊이지 않는 미투의 물결도 충격적인데 1년 사이 영어의 몸이 된 전직 대통령이 두 명이나 된다는 건 정말이지 숨이 막힌다.

선택의 자유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들’의 행복하지 못한 마무리를 지켜봐야 하는 건 잔인한 책임이다. 총탄에 맞아 숨지거나, 두 명이 나란히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 서 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30년 형을 받고 현재 수감 중인 그들. 그리고 그들 중 또 한 명이 지난주 구속됐다. 그들에 대한 씁쓸한 기억과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가 이렇게나 멋진 봄날을 전혀 행복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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