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으로 보는 정치 수준

발행일 2018-06-27 19:59:0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낙선·당선 현수막 문구 모두 비슷애매모호한 표현에 유권자 조롱도 믿음 주고 꿈·비전 제시한 말 없어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낙화’ 첫째 연이다. ‘이별’을 성숙을 위한 ‘결별’로 승화시킨 시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조지훈의 ‘낙화’ 맨 앞 두 행이다. 시적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대자연의 섭리로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꽃봉오리, 활짝 핀 꽃, 낙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6ㆍ13 지방선거가 끝나고 한참 지났다. 아직도 큰 교차로마다 당선, 낙선 사례 현수막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그 현수막들은 우리 정치 수준을 알게 해주는 단면이다. “뜨거운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가 가장 흔하다. 당선자, 낙선자가 같이 쓰고 있어 얼핏 보면 당선인사인지 낙선인사인지 알기 어렵다.

교차로에 가득 걸려 있는 대부분 현수막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며 무엇을 생각하게 하거나, 남다른 기대를 하게 하지는 못한다. 이번 지방선거 낙선 현수막 중 압권은 경기도의원에 출마했던 후보자의 것이다. “이재명 같은 자를 경기도지사로 당선시키신 여러분, 최성권 낙선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후보자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유권자를 조롱하는 막말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모범적인 낙선 인사는 2008년 18대 총선 대구 수성을에 출마했던 유시민 후보의 현수막이다. “당선하신 주호영 의원에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한민국과 대구와 수성구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리라 기대합니다. 패인은 오직 한 가지, 제 자신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유시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한다. “저는 행복한 바보입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문구도 뼈있는 말이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실수를 했을 때, 승자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패자는 너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격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낙선 인사보다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당선사례 현수막이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같은 문구는 아무 특징이 없다. 밋밋하다. 저런 내용을 굳이 내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현수막도 눈에 띈다. “일 잘하는 000!” 일을 잘할지 못할지는 두고 봐야 안다. 그 평가는 유권자가 한다. 그런데 당선자 자신이 자신을 ‘일 잘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오히려 미덥지 않다. ‘더 몸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일하겠다는 취지의 문구도 많다.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의 심복이자 심부름꾼’이다. 자신을 ‘더 낮추고 겸손’ 하겠다는 말은 아직도 당선자 자신이 구시대의 권위의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유권자는 자신을 낮추어야 할 때는 낮추고,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 때에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당차고 패기 넘치는 당선자를 보고 싶어 한다. 길든 짧든 잘 뽑았다는 생각과 함께 기대감을 주면서,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현수막을 걸 수는 없을까. ‘승자의 가슴 속에는 꿈이 가득하고, 패자의 가슴 속에는 욕심이 넘친다’고 하지 않는가. 선거에 이겨도 사리사욕과 욕심만 가득하고 비굴하면 패자이며, 져도 자신과 지역사회 유권자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스스로 당당하면 승자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도 후보자와 그 주변인들의 권력욕과 명예욕, 물욕과 이기심, 패거리 의식 등이 여과 없이 배출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거가 양식 있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갖게 하는 소모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꽃이다. 모든 생화는 피고 진다. 피어나는 꽃이나 절정에 이른 꽃은 화무십일홍을 기억해야 한다. 피지 못한 꽃, 지는 꽃, 떨어진 꽃도 상실과 허무감에 빠져 좌절하거나 분개하기보다는 부단히 성장하고 성숙하여 다음 봄을 예비해야 한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선거를 통해 당선자와 낙선자, 유권자 모두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선거는 끝났다. 이제 차분하게 정리하고 현수막을 걷자.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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