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2017.01.25]

까뮈 / 이기철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까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2017.01.24]

햄버거에 대한 명상 / 장정일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하... [2017.01.23]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2017.01.20]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 [2017.01.19]

내 친구, 선미 / 박성우

선미는 내 여자 친구다// 피아노도 치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는/ 선미는 내 여자 친구다// 머리 감고 거울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선미,/ 잠에서 깨어/ 뭉텅뭉텅 빠진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주워 버리는 아침이/ 가장 서글프다는 선미,/ 선미는 내 여자 친구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쓸 때마다/ 진땀이 뻘뻘 난다는 선미,/ 선미는 몸이 좀 불편한 내 여자 친구다// 편지 한통을 쓰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진다면... [2017.01.18]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2007).............................................................................................................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경... [2017.01.17]

빠른 KTX 안에서 -김사인 형께 / 김용락

19시 19분 동대구발 행신행 KTX를 타고/ 대전성모병원 특3실 김사인 시인 부친상 문상 가면서/ 그저 받은 그의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읽는데/ 첫 시부터 좋구나 소리 연방 나오더니/ ‘중과부적’에 와 이를 세 개나 빼야하는/ 딸아이의 성 내는 구절을 읽다가/ 참 좋은 시인! 이라는 신음이/ 마침 치과 치료중인 내 어금니 사이에서/ 상갓집 흐릿한 조등 불빛같이 기어코 흘러나오고 말았다// 내 20대 중반부터 시를 쓰면서/ 뻔질나게 서... [2017.01.16]

자본론 / 백무산

줄잡아 그의 재산이 5조원을 넘는단다/ 그 돈은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한다/ 한 인간이 한 세대에/ 50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착취했다/ 50만년!// 불과 1만년 전에 인간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5만년 전에 크로마뇽인은 돌과 동물의 뼈로/ 은신처를 짓기 시작했다/ 10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죽은 사람을 묻을 줄도 몰랐다/ 150만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유럽과 아시아에 첫발을 디뎠다/ 500만년 전에 침팬... [2017.01.13]

감나무와 옻나무 / 손남주

밭둑위에 감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문지기처럼 두어 그루 옻나무가/ 어둑하게 버티고 있는 산골마을,/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들려오는 먼 하늘로/ 감나무들은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치열한 낙동강 최후의 전선에서/ 어린 학도병들이 수없이 쓰러져갈 때도/ 이곳 산골마을 감나무의 감은 발갛게 익어갔다/ 풋감의 유혹에 소년은 날마다 감나무 등줄기를 오르내리고/ 옻나무는 퍼렇게 약 오른 손으로 그의 종아리를 휘어잡았다// 소문대로 올 것이 왔다... [2017.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