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 / 이기철

발행일 2017-01-24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까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 세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 시집『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44세 최연소의 나이로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1957년, 나는 한글의 자모도 깨치지 못했고, 그대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47세의 나이로 급하게 죽은 1960년 1월 4일,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 고2 여름방학 때 실존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우쭐함을 ‘득템’할 요량으로 그의 ‘이방인’과 ‘페스트’와 ‘시지프의 신화’를 빌려 읽었다. 그러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던’ 기억은 있으나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다거나,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으로 다가왔던 책은 아니었다. 그가 쓴 책들의 대부분이 전후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이 낳은 소산임을 감안하더라도 내게 그 우울은 버거웠다. ‘습관의 가소로운 면, 살아야 할 심각한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성격’이란 구절에서 삶에 대한 모욕, 자칫 삶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겠다는 경계심마저 발동했다. 그리고 실존과 부조리에 대한 사유를 조금 확장시켰을 뿐, 그의 이름은 간간히 술병의 라벨을 통해 환기되었거나, 그저 20세기 프랑스 지성의 한 사람 정도로 ‘사르트르’ ‘말로’ ‘지드’등과 함께 패키지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날 잠시 먹먹했던 틈새로 생뚱맞게 ‘이방인’의 맨 앞 문장이 덜컥 떠올랐다.

그런데 아주 가끔 삶의 당위를 발견할 수 없을 때,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내가 아는 것과의 큰 괴리를 느낄 때, 그의 ‘방아쇠’를 빌리고 싶었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지만 까뮈의 생은 사실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폐결핵으로 골골했던 청년 시절, 번번이 실패한 결혼, 불운한 사망. 프랑스계 이민자로 알제리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와도 같은 여행자로서의 삶이었다. 지금도 가끔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한 까뮈의 통찰을 되새긴다.

나는 만날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만지작거리며 잡담이나 늘어놓는 처지다. 글을 쓴다는 것은 까뮈의 스승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 ‘자신의 강박관념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일’일지 모르지만,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부조리한 삶일지라도 삶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내게도 ‘병’과 ‘환부’가 남아있다면 서둘지 않고 겸허히 마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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