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트렁크』 (세계사, 2000)
대가리 파고들어간 허연 두부 살이 희망의 거처였다니, 김언희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이 무슨 엽기적 발상이고 희망의 유린인가 싶겠지만 그의 시는 깎아놓은 밤톨같이 야무지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늘 이렇게 도발적이면서 사물을 전복시키고 착한 독자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사실 이 정도는 그의 평소 실력(?)에 비하면 새 발에 피라 몇 개 예를 들고 싶으나 엄청 불편해하는 독자들이 계실 것 같아 관둬야겠다.
김언희 시인은 어째서 곱지 않은 시선들을 의식하면서도 당당하게 혐오스러운 시를 고집할까? 아니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고 의식하지 않으며 고려할 대상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불편하게 반응하는 ‘타자의 정숙’에 똥침을 가하고 그걸 유쾌하게 생각한다. 그게 김언희 시가 의도하는 바며 목적으로 비친다. 오늘날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의미나 욕망이 아니라 신체의 적나라함과 도착적인 쾌락’이라고 한 ‘라깡’의 정신분석학과도 통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의 부정함으로 타자의 정숙함을 유린’하는 것이다. 그 정숙한 ‘희망’을 유린하는 도구로 ‘두부모’가 동원된 게 사뭇 흥미롭다. 그런데 추어탕 하면 남원이 원조일 거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미꾸라지 숙회’만큼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문헌에 따르면 숙회는 황해도 연백지방과 경남 진주 하동지역에서 예부터 각기 다른 요리법으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조리과정은 시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과연 날두부와 산 미꾸라지를 함께 솥에 넣었을 때 원안대로 미꾸라지가 두부 속을 파고드느냐가 문제다.
언젠가 TV의 한 프로에서 그걸 시연해 보고자 수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바 있다. 두부를 향해 파고들어야 할 미꾸라지들이 저 혼자 괴로워하다가 죽고 말더라는 것이다. 물의 가열 속도를 조절해 보기도 하고 두부를 최대한 부드럽게 만든 뒤 마릿수를 늘리고 자연산을 투입해 보기도 했지만 어쩌다 두부에 코를 박는 경우는 있어도 천천히 죽거나 빨리 죽는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뜨거운 물 속에서 다 죽어가더라는 것이다. 말짱 도루묵이었다. 특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우병우 전 수석이 밤샘 조사 후 어제 새벽 귀가했다. 시종일관 모든 혐의를 부인해오면서 끊는 물속에서도 살아남을 기세다. 이번에도 ‘법꾸라지’란 별명답게 끓는 물 속 두부에 박혀서도 살아남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그의 혐의를 밝혀내지 않고선 특검이 아무리 잘해도 59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온 우물을 다 흐리게 한 미꾸라지를 그냥 놔둬는 곤란하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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