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이성부

발행일 2017-03-19 20:20:3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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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2월28일, 그해 봄을 보지 못한 채 고인이 된 시인은 “잃어버린 말 잃어버린 웃음 잃어버린 날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끝내 더 큰 획득에 이르지 않았더냐!”며 또 다른 시를 통해 큰 기쁨을 예견한 뒤 “이제 또 봄이다. 아픔을 나의 것으로 찾아가는 사람만이 가슴 뛰는 우리들의 봄이다. 외로움을 얻어 돌아오는 길. 더 빛나는 우리들의 봄이다”라며 봄을 찬양했다. 이제 또 봄이 와서 온전히 봄을 찬양해도 될지 아직은 확실치 않으나 여느 해 봄과는 다른 기쁨의 봄을 믿고 싶다.

꿈은 노래되어야 하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리라 믿으며, 승리는 머지않았다는 신념으로 줄곧 살아왔다. 98년 전 빼앗긴 봄의 3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 흔들며 만세를 외쳤을 때도 그러했고, 해방 이후 봄이 위독한 지경에서 골골댈 때마다 민중의 노래로 봄을 흔들어 깨웠다. 봄이 짓밟힐 때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며 어깨동무 하고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 많은 기다림 끝에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먼데서 몰고 온 희망과 환희와 영광. 빙판 위 연아의 스케이트 칼날처럼 미끄러지듯 거침없이 봄이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저 찾아온 봄이 아니라 숱한 인내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 그리고 가없는 노력으로 쟁취한 봄이었다. 올봄도 아직은 더러 쿨럭이며 재채기를 하고 있지만 이처럼 실감 나는 봄은 없었다.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도 우리들 마음에 흡족하게 찾아온 봄이다.

한겨울 햇볕을 쬐지 못하면 우울증에 빠진다는 북유럽 사람들처럼 지난겨울 잠시 소심하게 가라앉고 우울했던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남녘의 벙글 대로 다 벌어진 매화와 같이 봄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없으리라. 퇴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였다고 한다. 물만 주면 매화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워 봄의 화신을 전한다. 서민의 지폐 천 원짜리엔 퇴계 이황의 존영과 함께 도산서원의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기품, 인내’이다. 우리는 고결한 마음으로 기품을 유지했으며 일부의 경거망동에도 인내했다. 이제 곧 밭 가는 쟁기꾼의 노래가 들판 가득 울려 퍼지리라. 복사꽃 살구꽃 핀 우리의 고향 마을마다 사랑의 눈짓들로 가득하리라. 정의와 진리가 강물처럼 흐르는 산하에 서슬 퍼런 대립과 투쟁의 깃발은 내려지고 봄볕같이 따뜻한 타협과 상생의 봄을 맞을 것이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사람 사는 동네로 그가 돌아왔다. 나긋나긋한 봄의 백성이 되어 오늘은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을 마중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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