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 김사인

발행일 2017-03-20 19:45:4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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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과 ‘노숙인’을 같은 의미망 안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노숙은 누구라도 궁박한 사정에 처하면 한데 잠을 경험할 수도 있는 노릇인 데 비하여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공간 없이 공원 역 거리 등에서 상시로 잠을 해결하는 사람을 말한다. 노숙인은 20년 전 IMF 경제위기 이후 부각된 용어이다. UN에서는 노숙인을 ‘집이 없는 사람과 옥외나 단기보호시설 또는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자는 사람’, ‘집이 있으나 UN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 ‘안정된 거주권과 직업과 교육, 건강관리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UN기준을 넓게 적용하면 ‘하꼬방’이나 찜질방, 텐트나 컨테이너에 상주하는 사람들, 산에서 나무를 주워와 대충 얽어놓고서 집이라고 우기는 ‘자연인’들도 노숙인 신세를 벗지는 못한다. 지난겨울 난방비가 겁이 나서 단 한 번도 방에 온기를 공급한 적이 없는 독거노인들도 실질적으로는 노숙인과 다를 바 없다. ‘노숙자’라고 불리던 용어가 인권존중 차원에서 2000년부터 법 개정을 통해 ‘노숙인’으로 바뀌었다는데 얼마나 인권이 존중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시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이 시는 물론 그런 노숙인의 처지와는 다르겠으나 연민으로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어쩌면 이사에 즈음해 느끼는 소회의 일단일지도 모르겠다. 고된 도시인의 풍찬노숙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시에서 ‘너’와 ‘몸’은 바로 나의 육체이며 정신이기도 하다. 노숙자라 해서 처음부터 바닥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다. IMF 이후 급작스럽게 닥친 실직과 사업실패로 가정이 해체되고 극빈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소득의 양극화와 빈곤화, 고용 불안과 실업의 증가가 빚어낸 사회 관계망 붕괴의 결과이다. 대개는 “나도 한때는 말이야…” 그러고 산다. 한때 몸을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몸을 비스듬히 뉘인 채 오가는 사람들의 냉소적 시선을 받아낸다. 사람들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들의 지친 몸을 누이던 종이박스나 헌 신문지처럼 여기거나 오히려 그보다 못한 불결한 존재로 대한다. 거리마다 풍요와 재화가 넘쳐나는 이 사회가 한 발자국 삐끗하는 실수로도 긴 나락과 허방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이라는 걸 그들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숙인은 별종이 아니라 과거 우리의 이웃이었고 지금도 우리의 동포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주저하다가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노숙인이 한해에 수백 명이다. 왜 뭐라도 하지 않느냐고 비난하기 전에 삶의 의욕을 잃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언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녹여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어떤가 몸이여’ 이제 그들 몸에도 봄이 찾아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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