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의 기도 / 도종환

발행일 2017-05-11 19:58: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 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중략)/ 썩은 물위에 몇 방울의 석간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풀들을 보았다/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풀잎들이 나 대신 기도를 하였다

- 계간 《문학의오늘》 2016년 겨울호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그토록 열망했던 촛불 민심을 담은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취임 첫날의 행보와 취임사를 통해 표출된 각오들을 접하면서 잘하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통령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도 있다. 기대해마지 않았던 모습이고 그 풍경은 은근히 감동과 믿음을 주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나라가 단숨에 변하진 않겠으나, 오늘의 초심만 고스란히 유지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거 어느 때보다 찬란하리라 확신한다.

그로인해 우리들의 기도는 희망적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였다. 그는 원래 솔직할 뿐 아니라 열려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몸짓과 말씀 하나하나는 노무현 정부시절 시행착오에서 체득한 아쉬움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실정들에서 절감했을 반면교사의 심정을 복심에 담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 시대가 원하는 개혁과 통합의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의지대로 난국을 타개하고 ‘재조산하’하길 기대한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다르지 않다면 시대정신도 일치하리라 믿는다. 이념과 지역, 세대와 계층 간의 갈등과 분열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하나 되는 통합을 하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람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정치를 누가 마다하랴. 실은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아야 옳다. 먹고살기 힘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빵 몇 조각을 더 주는 것은 삶에서 빛이기도 하고 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시장의 회복으로 자연스레 살아남도록 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하 세월에 주린 배는 어쩔 건가.

이제 ‘나대신’ 기도를 하는 ‘풀잎들’을 믿기로 하자. 오늘 아침 길에서 악수를 청하는 한 지지자가 명함을 대통령에게 건네는 광경을 보았는데 역겨운 그런 짓은 하지 말자. 문재인의 ‘운명’은 적폐청산과 통합을 동시에 이뤄내는 것이다. 얼핏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과제이지만 적폐청산이 치유이자 통합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가 든든한 대통령이 되도록 묵묵히 성원하면 그만이다. 참, 그동안 문재인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잘 수행한 도종환 시인의 20회 가톨릭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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