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있는 재킷을 입고 한참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새 코트 소매에 라벨을 붙인 채, 새 차 문짝에 파란 스펀지를 떼지 않고 다녀도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듯이 다른 이의 ‘취향’을 참견할 일은 아니다. 한번은 누군가에게 왜 핸드백의 지퍼를 채우지 않느냐고 했더니 부러 그렇게 한단다. 그러고 길에서 보니 여성들의 상당수가 지퍼를 그냥 열어두고 다녔다. 헤어롤을 머리에 붙이든 스타킹의 올이 나가든 심지어 바지 지퍼가 열려 있어도 함부로 입을 뗄 건 아니다.
속옷이 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지퍼를 열어둔 채 오만상 쏘다니고도 무사 귀가한 적이 두어 번 있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는 난감 정도가 남성에 비할 바 아닐 것이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선 한 젊은 여성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었다. 물론 속옷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꽤 당황스러웠다. 불필요한 오해 없이 그 사실을 알릴 궁리를 잠시 해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못 본 척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 하는 사이에’ 그녀는 출구를 향해 몸을 움직였고 나는 이내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공연한 말을 해놓고 바로 ‘이게 아닌데’라며 후회한 적도 있다. 김용택 시인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사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또 그러는 사이 꽃이 지고 봄이 간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사람들은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이모’가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궁금했겠지만 묻거나 따질 겨를 없이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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