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여 / 이은봉

발행일 2017-06-21 20:10:2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오고야말 날을 더욱/ 빨리 오게 하는, 그리하여/ 세상 앞장서 끝나게 하는/ 아메리카여 천의 얼굴이여/ (중략)/ 방글라데시에서도 니카라과에서도/ 눈물, 구두굽으로 짓이기는 슬픔을/ 혼자서 혼자서 다 껴안고도 낙진을/ 자유를 평화를 뜨거운 자본주의를/ 벅찬 한숨을 가래를 만만한 인디언을/ 뺨에 입술에 젖가슴에/ 카키빛 딸라뿐으로 콜라뿐으로/ 지구 위 모든 사랑을 숫처녀를 니그로를/ 어루만지는 주무르는 집어삼키는/ 더러운 춘화 같은 시궁창 같은/ 꿈을 통일을 한반도를/ 핵폭탄을 솟아오르는 내일을/ 마구 걷어차는 엎어치는/ 아메리카여 가엾은 미합중국이여/ 오오, 미칠 것 같은/ 돌덩이여 니기미 쑥떡이여.

- 시선집 『아메리카 똥바다』 (인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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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한미 한일 관계의 실상과 그 문학적 현주소를 다룬 89명 시인들의 시를 묶은 선집에 수록된 시다. 당시 30대인 이은봉 시인의 아메리카에 대한 적나라한 풍자와 비판 의식이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추측건대 아마 이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미국이란 나라의 의미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죄라 할 80년 광주항쟁에서, 지금 온갖 불행의 씨앗을 낳게 한 원인제공의 한 축이 바로 미국이고, 그들이 당시 보여준 ‘시궁창 같은’ 역할만으로도 우리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며,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무언가. 세계 속의 미국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지난 6월1일 트럼프는 미국의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중국과 인도 등에 비해 미국에 과다한 책임을 지웠다며 10년 내 27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 주장하면서 미국의 경제주권을 침해한다는 점을 탈퇴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이며, 지금도 중국 다음으로 온실가스를 심하게 내뿜고 있다. 결국 미국은 기후변화의 재앙을 막기 위해 20년 넘게 진행된 전 지구적인 협력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세계의 거센 지탄과 함께 단박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와 세계의 리더 자격을 잃어버렸다. 진작부터 미국은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없고, 팍스 아메리카를 꿈꿀 처지도 아니었다. 다만 역사적으로 지구 온난화에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국가란 점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미국이 자신의 책임을 무시하고 협정에서 빠지는 것은 노골적인 자국 이기주의의 다름 아니다. 다른 고려는 일체 않겠다는 태도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미래를 거부한 극소수 국가에 합류하게 됐다”고 탄식했다. 샌더스 민주당 의원도 “탈퇴 결정은 미국의 리더십 포기 선언이자 국제적인 수치”라고 분개했다.

트럼프라는 예측불허의 인물이 리드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전보다 더 염려스럽다. ‘Made in USA’라면 만능이었고 최고로 쳐주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의 미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미국의 평화가 곧 대한민국의 평화가 될 수는 없으며 미국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바를 덮어놓고 그대로 따를 경우 한반도가 더 불안해질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문정인 특보의 발언을 마냥 비난만 할 일인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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