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 / 김수영

발행일 2018-03-20 20:18:4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중략)/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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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소개하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럽기에 본문을 대폭 축약했다. 이 민망한 시를 쓴 사람이 ‘풀’의 시인 김수영이란 사실에 깜짝 놀라는 독자도 있으리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김수영은 도시적 삶의 공간에서 어룽대는 모든 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시는 1968년 1월에 발표되었고, 이 시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해 3월인가에 이어령과의 ‘불온시 논쟁’을 벌였으며, 같은 해 6월 술에 취해 길을 가다 버스에 받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올해가 김수영 50주기가 되는데, 최근 민음사에서는 김수영 사후 50주년 기념 ‘김수영 전집’을 재출간하였다.

김수영은 정치현실에 대한 문학의 실천적 책무를 강조하는 문학 경향을 선도한 한편으로는 생활인으로서 설움과 절망, 자유와 꿈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했다. 자칫 외설시비를 불러올 수 있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여성 비하의 혐의를 옴팡 뒤집어쓰고서 ‘부관참시’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적나라하고 불편한 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정부와의 정교한 정사와 아내와의 시큰둥한 관계를 비교하며 벌이는 눈물겨운 ‘크라잉 게임’인데, 무엇보다 ‘여편네’니 ‘그년’이니 하는 여성의 지위를 낮게 취급할 때 쓰는 인칭대명사의 비속성이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그리고 외도 후 아내와의 ‘의무 방어전’을 이토록 버젓이 까발려도 되냐는 점이다.

뒤이어 시인의 부인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호기심이 작동한다. 평소 시인의 모든 작품들은 부인에게 다 보여주었는데, 이 작품만은 사후에야 부인이 보았다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그의 부인 김현경(1927-)이 쓴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이란 책이 나왔다. “어느 겨울인가 아침 일찍 돌아온 수영에게 씻을 물을 가져다주려는데 새로 산 고급내복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 두고 왔냐며 다그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동대문 어느 여인숙에서 여자와 잠을 자고 왔는데 방이 하도 더러워서 나올 때 벽에 걸어둔 걸 까맣게 잊고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 내복을 사주겠노라며 아이를 어르듯 수영을 달랬다.”

김수영의 아내는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면서 그와의 일화들을 낱낱이 공개했다. 아닌 척 안 그런 척 쓰는 가면보다는 차라리 이런 솔직함이 친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현재적 관점의 ‘미투’ 쓰나미에 휩쓸려 들면 충분히 지탄의 대상이겠으나 ‘성’은 위선적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자 도발이다. 어떤 위장도 한계가 있으며 그 뒤끝은 쓸쓸한 연민만 남길 뿐이다.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는 시인의 자탄. 어려운 현실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로 보려는 그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따라서 김수영은 ‘우리 문학의 가장 벅찬 젊음’이란 수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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