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앞에서

발행일 2016-07-22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휴가철 다가올 때마다 꿈을 꾼다깊은 산 속 오두막 같은 곳에서 책 읽고 산책하는 단순한 생활을 ”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자리에 꽂힌 채로 내내 기다린 날들에 대해 시위라도 하는 듯 활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눈을 맞추려 한다. 오랜만이야, 미안해.

책을 펼쳐들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시간이 없었다든가 바빴다는 것은 핑계이다. 책에게 마음을 내 줄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 했던가? 아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철이나 무더운 여름날이 독서를 하기에는 더욱 좋다. 장맛비나 무더위나 길을 나서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럴 땐 집에서 책과 노는 것이다. 고문과도 같은 뜨거운 계절이 지나가고 먼 곳으로부터 서풍이 불어오면 그때 떠나는 거다. 하늘과 들판과 바람을 친구 삼아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거다. 그리고 실컷 쏘다니리라.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나름의 선별 과정을 거쳐 몇가지 테마로 분류가 되어 있다. 계절마다 발간되는 계간 문학지와 개인적으로 보내오는 작품집들과 새롭게 사들이는 책들을 다 꽂아두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기실 너무 복잡한 서가도 싫다. 버릴 것은 버리고 기부할 것은 기부하고 남길 것은 남긴다.

첫 번째 서가에는 주로 대학 시절 사 모았던 시집들과 내가 아직 청춘이었을 때 읽었던 소설책들이 꽂혀 있다. 시집을 꺼내 펼치면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이 손을 내밀고 이십대의 한순간과 조우한다. 운이 좋으면 오래된 메모를 만나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라든가 떠오르는 문장들을 자유롭게 적어둔 메모들이 책 곳곳에 꽂혀 있다.

두 번째는 읽었던 책 들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언제든 생각나면 다시 펼쳐서 읽으리라 다짐하고 꽂아둔 책들이다. 제목만으로도 의미가 가득한 책들. 수십 번도 더 뽑혔다가 다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책들도 있다. 휴가를 떠날 때 혹은 내 삶의 마지막 여행을 떠날 때 꼭 가져가고 싶은 책들이다. 새것도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책들이 내 영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오래된 활자가 좋다. 사람도 그렇다. 순간적으로 끌리는 사람보다 서로를 은미하게 채워주는 오래된 인연이 좋다. 사람에게 상처받았을 때,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만큼 지칠 때, 지독한 허무에 빠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가만히 이 책들을 쓰다듬는다. 마음 놓고 의지해도 절대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오래된 절친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읽다가 끝을 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손도 못 대었거나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세 번째 서가에 제일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숙제를 남겨 놓은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무겁다. 자신이 얼마나 독서에 게으른 사람인지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매일 밥은 먹으면서 읽는 일에는 이토록 소홀하다니.

그리고, 내 침대 머리맡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작은 책꽂이 하나와 몇 권의 책과 줄을 그을 수 있는 색연필이 놓여 있다. 누가 보면 늘 책을 읽는 사람인 줄 알겠지만 희망사항일 뿐, 일주일이 지나가도 손 한번 대지 못할 때가 많다.

독서 습관이 고약하게 들어서 책을 읽을 때만큼은 까탈스럽다. 시간도 넉넉해야 하고 할 일이 밀려 있지 않아야 하고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날이 돌아가는 시간의 바퀴 속에서 고즈넉한 시간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고 책들은 침대 머리맡에서 다시 서가로, 그리고 새로운 책들이 다시 침대로 오곤 한다.

몇 권의 책들을 뽑아 침대 곁으로 왔다. 이번 여름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다. 몇 년 전 읽다가 따분하여 덮어두었던 <장자>를 다시 펼쳐보니 문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받아준다. 이제는 장자를 읽어도 좋은 나이가 된 것일까. 그리고 루이제린저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를 뽑는다. 이 책은 최근에 다시 주문한 책이다. 루이제린저 전집을 구하고 싶지만 이제는 단행본으로 몇몇의 소설만 출간되고 있다. 옛날에 가졌던 전집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때 그 책이 그립다.

휴가철이 다가올 때마다 꿈을 꾼다.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는 깊은 산 속 오두막 같은 곳에서 책 몇 권 옆에 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자고 책 읽고 산책하는 단순한 생활. 그 소박한 꿈을 향해 이번 여름 한발을 내디뎌 볼 터이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듯 책과의 랑데부를 꿈꾼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