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편지

발행일 2017-02-08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텅 빈 들판이 왜 더 넉넉해 보일까요모두 내어주고 난 어머니의 가슴처럼비어 있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이맘때쯤이면 기나긴 겨울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한 번씩 몸살을 앓는 것을. 그래서 나선 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서도 시골길을 한참 더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 양쪽 길옆으로 지금은 쉬고 있는 텅 빈 논과 밭들이, 그 뒤로 산들이,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겨울을 나는 중입니다.

사시사철 같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나무와 산과 들판의 모습은 그림 속 배경처럼 든든합니다.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겨울 들판을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 나무들처럼 정직하게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시골장터에서 친구와 만났습니다. 우리는 장터를 한 바퀴 돕니다. 시끌벅적한 시골장터의 활기와 사람살이의 훈기가 이곳에는 있습니다. 박상 튀기는 아저씨의 ‘뻥이요’하는 소리와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불콰해진 얼굴로 한잔하신 어른들도 눈에 뜨입니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릴 적 동무인지도 모릅니다. 장날 국밥집에 마주앉아 막걸리 잔을 나누면 삶의 고단함도 시름도 잠시 잊어버리게 하는, 살짝 오른 취기로 소박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탈바가지 같은 표정들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느껴집니다.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분주하셨습니다. 뒷마당으로 가서 말려 두었던 시래기를 꺼내 오시고 물을 주어 기른 콩나물도 한 줌 뽑으시고 감주도 한 병 따로 담아 두셨습니다. 콩이야 깨야 고춧가루들도 봉지봉지 싸 놓으셨습니다. 함께 농사짓는 며느리가 보면 속상해할까 봐 며느리 몰래 슬쩍 내어 놓으십니다. 놀라는 제 입을 가리시며 손짓을 하십니다. 별것 아니니 암말 말고 가져가라고. 눈물겹게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챙기시고도 머를 좀 더 주꼬? 하실 때는 친정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뒤뜰에 나가니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으로 숨을 쉬는 저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듯합니다. 무수히 많은 대화를 몸으로 나누며 오랜 시간을 함께 견디는 저들, 그 속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고 익어갑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그런 것이겠지요? 함께 살아낸 시간이 지날수록 어우러져 깊어지는.

고욤나무를 아세요? 작고 앙증맞은 감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감나무 사촌쯤 되는 그 나무 말입니다. 겨울인데도 고욤이 조롱조롱 달려 있더군요. 참새들이 몰려가 고욤을 맛나게 먹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고욤을 따서 와인을 담그던 친구는 올해 그 일을 포기하고 참새들에게 나무를 통째로 내어 주었습니다. 한겨울에도 먹을 것을 남겨둔 새들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친구의 마음이 새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채워 주듯이 삶이 삭막하지 않은 것은 누군가가 내어주는 작은 마음 한 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그 마음이 그리워 떠나온 길이었습니다. 이유없이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아무에게나 바랄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참 이상도 하지요? 꽉 차 있던 가을의 들판보다 텅 빈 지금의 들판이 왜 더 넉넉해 보일까요? 모두 내어주고 빈 가슴만 남은 어머니처럼, 비어 있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논둑길을 살살 걸어보았습니다. 바사싹 바사싹 마른 땅을 밟는 소리가 따라옵니다. 흙길을 걷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땅을 밟는 이 울림이 땅속 어딘가에 전해지고 그 울림으로 무언가와 교감하고 있는 듯, 혼자 걸어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이 느낌을 말입니다. 지금쯤 땅속에서는 봄을 준비하느라 분주할까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느 부지런한 농부가 벌써 땅을 갈아두었습니다. 한 번 갈아엎어진 흙은 속에 있던 고운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놀란흙입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싹을 틔울 수 있게, 가슴을 열고 품어줄 씨앗을 기다리는 그 흙을 보며 바짝 마르게 굳어 있었던 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갈아봅니다. 굳어 있는 땅에는 아무것도 심을 수가 없으니까요. 어떤 씨앗이든 싹을 틔울 수 있게. 곡식은 곡식으로,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피워낼 수 있게.

산자락으로부터 어두움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지요? 불안감을 표현한 말이지만 저는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안온하고 평화롭습니다. 어둠 속에서 등불이 켜지듯 각자의 길로 흩어졌던 식구들이 하나둘씩 돌아와 따뜻하게 서로를 채워주는 시간이니까요. 밤이 지나가는 동안에 분주했던 하루일과도 복잡했던 마음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요.

돌아오는 길, 잠시 차를 세우고 들판을 바라봅니다. 머지않아 이곳 작은 마을에도 봄이 오겠지요? 잠시 내려 두었던 일상 속으로 돌아갑니다. 씨앗을 기다리는 놀란흙처럼 굳은 가슴을 열고 소중한 일상과 인연을 품겠습니다. 싹이 트고 열매가 익어갈 수 있도록.이명희수필가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