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통의 편지

발행일 2017-06-14 20:04:5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유월, 호국보훈의 달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보훈이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본의 아니게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게 되지만, 호국에 대한 의지는 과연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가져본다. 영령들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각종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기념인지 정체 모를 행사가 다반사이다.

어느 현충원에서 문자가 날아들었다. ‘현충일에 교통 혼잡이 예상되니 현충원 출입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다른 장소도 아닌 현충일에 현충원 출입을 하지 말라니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곳에 가족을 둔 사람들이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참배하지 못한다면 정치인들의 보여주기 식 행사는 혼잡한 상황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말인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현충일에 태극기를 단 집이 거의 없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 아파트 단지에서 달랑 한 가구만 태극기를 달아놓은 사진이 실려 있어 더 실감이 났다. 태극기 사랑이 애국인 시대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국기의 위상이 이렇게나 무의미해졌나 싶어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현충일의 의미와 우리의 의무는 기념식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인지.

독도문제는 호국의 달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하지만 힘이 약한 우리 정부로서는 일본의 행태에 분노만 할 뿐 이렇다 할 대응은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 중학생들이 있다. 역사 동아리를 하면서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아이들은 시마네현 56개의 중학교에 편지를 보냈다. 독도가 왜 대한민국 영토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을 담아 한국어와 영어로 작성했다고 한다.

남의 것을 탐내다가 아이들의 일침에 뜨끔해졌음인가. 시마네현은 관련 부처에 즉각 보고를 했고, 아사히신문은 편지의 내용과 상황을 보도했다. 실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한다. 정부가 못한 일을 지방의 어린 중학생들이 했으니 당차고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작은 나비의 날갯짓 정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거듭 되다 보면 그것이 쌓여 새로운 역사적 기록이 되지 않겠는가. 후일을 바라보고 공교육에서조차 역사왜곡을 하는 일본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모깃소리만큼 미약할지 모르지만, 목소리를 냈다는 것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손톱 밑에 든 작은 가시는 뽑지 않으면 두고두고 거슬리며 아픈 법이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비단 독도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올바로 알리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분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개개인의 노력을 하나로 뭉쳐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은 심정이다. 작은 관심들이 하나로 뭉치면 큰 힘이 되어 아무리 큰 정치적 강압이 있더라도 버텨낼 수 있으리라. 어두운 공간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뜨거운 것이 가슴을 밀고 올라오는 듯하다.

잘되면 내 덕이고 잘못되면 나라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정치인들의 무능 때문에 살기 어려워졌다는 원망의 목소리는 높다. 농사가 잘못되어도, 부도가 나도, 직장을 잃어도 모두 나라 탓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나라에 보탬이 되게 제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정책이 나오면 원성부터 높이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위태로운 나라를 지킨 힘은 국민에게서 나왔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도 의병이 큰 힘이 되었고, 수탈당한 문화유산을 되찾은 것도 개인인 경우가 많다. 작은 단체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애국은 교과서로만 강요할 일이 아니다. 어른들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깊이 가지고 있어야만 자연스럽게 교육이 될 것이다. 어린 청소년들이 보낸 56통의 편지가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갖고 의무적으로 한 줌 힘을 보태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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