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누운 산세 나그네를 반기고 서로다른 돌탑, 우리네 삶을 닮았구나

발행일 2014-08-28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8> 소가 엎드린 형상 복우산

소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복우산. 상주시와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은 천년고찰 대둔사를 품고 있다.

복우산은 소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중기 최현이 쓴 일선지에는 복우산과 대둔산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의 산이 등장한다.
복우산을 ‘소가 엎드린 형상으로 부(선산)의 서쪽 25리에 있다. 곧 연악의 남쪽줄기’라고 소개하고 대둔산은 ‘부의 북쪽 30리에 상주의 경계에 있다. 연악의 동쪽줄기다’고 적었다.
구미시가 발행한 산행가이드에 복우산이라 표기된 산을 일선지의 기록과 비교하면 위치상 상주경계인 부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특히 이 산에 대둔사라는 절이 있는 점으로 미뤄 대둔산에 가깝다.
현재 복우산이라 불리는 산이 사실은 예전에 대둔산이라 불렸던 것은 아닌지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아무튼 복우산 기슭에는 대둔사라는 오래된 절이 하나 있다.

◆임란때 승군 1만명 주둔했던 대둔사

대둔사 대웅전은 자연석 위에 주춧돌을 쌓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기둥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후 추녀 끝자리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더했다. 이 대웅전에는 건칠기법으로 만든 아미타불이 석가모니불을 대신하고 있다.

대둔사는 유명세나 규모면에서 볼 땐 작지만 불교사나 유적ㆍ유물 면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대둔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하고 도리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446년 창건한 절로 고려 때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불탄 것을 충렬왕의 아들인 왕소군이 승려가 돼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왕소군의 이름은 왕서로 충렬왕과 최의의 노비 반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의 사랑을 받아 대궐에 출입하며 왕소군이라 불리며 중랑장에 올랐지만 교만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충렬왕이 머리를 깎게 한 후 승려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대둔사는 부속암자인 청련암이 있던 자리로 원래의 대둔사는 현재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지점에 있었으며 그 터가 아직 남아있다.
특히 이 대둔사는 사명대사가 1606년 절을 증수하고 1만명의 승군을 주둔시킨 곳으로 당시 암자가 열 개나 되던 큰 절이었다.
현재 대둔사에는 승려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요사채와 수도승에 대한 신앙 형태를 나타내는 응진전,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명부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석축을 높게 쌓은 후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둔사 대웅전은 17세기 후반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자연석 위에 주춧돌을 쌓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기둥 위에 팔작지붕을 얹고 추녀 끝자리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더했다.
특히 대웅전 왼쪽은 통풍을 위해 나무창문을 설치하고 오른쪽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을 흙벽에 그려 넣어 위엄을 더했다.
그런데 통상 불교의 선종 계통의 절이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데 비해 대둔사 대웅전은 극락왕생과 내세의 행복을 주도하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셨다.
이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이 대둔사의 보물이다. 균형잡힌 몸체와 옷을 입은 방법, 모양 등에서 고려 후기인 14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대둔사 아미타여래좌상은 건칠기법으로 만들어진 희귀한 불상이다.
지난 2010년 보물 제1633호로 지정됐다.

복우산을 가기위해 들러야 하는 산촌리는 영양남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마을 인근에 조선후기 충신인 남사순정려각이 있다. 이 누각안에는 고종이 내린 정려편액이 있다.

한편, 복우산 출입로가 있는 산촌리는 영양 남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조선 후기 충신 남사순(南思舜)의 정려편액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전력부위용양위좌부장으로 남한산성에서 인조 임금을 성심껏 보위한 충신으로 고종임금이 통정대부병조참의를 추증하고 ‘충신남사순지문’이라는 정려를 내리고 단청으로 집을 지어 후세에 귀감으로 삼았다.

◆능선을 따라 등산로 개발 필요

여름 휴가가 막바지인 8월 중순.
일행을 구미시청 주차장에서 만났다.
구미시청 주차장은 휴일이면 시민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단체 등산객들의 집결지로 많이 이용된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대형버스로 가득하다.
삼삼오오 모여 오늘 일정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의 오늘 일정은 옥성면 산촌리 복우산(507.8m)이다.
복우산은 구미시민들에게조차도 생소한 산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상주시 경계에 있는데다 등산로가 개발돼 있질 않기 때문이다.
복우산을 가려면 상주 낙동방면 옛 도로를 따라 가다 옥성화훼단지를 지난 후 옥관리 방향으로(대둔사 이정표가 있슴) 좌회전하거나 25번도 국도를 이용해 낙동에서 내린 뒤 선산 쪽으로 3분여를 되돌아오다 옥관리 방향으로 우회전해야 한다.

복우산을 가기 위해 912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옥관리 마을 주민이 논 가장자리에 만들어 놓은 돌탑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산행 일정은 복우산 입구에 있는 대둔사를 들러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62호인 대웅전을 둘러보고 산촌까지 걸어간 후 복우산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대둔사 못 미처 정성스럽게 쌓은 돌탑이 눈길을 끈다.
이 마을 한 주민이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았다는 돌탑은 논 가장자리를 따라 그 수가 백여기에 이른다.
중간 중간 선 솟대는 만든 이의 정성과 손재주를 짐작케 한다.
복우산과 옥녀봉 사이로 난 912번 지방도는 산촌을 거쳐 상주 낙동면 양포리로 이어지는데 차량통행이 많지 않고 도로변 경치가 좋아 드라이브코스로 제격이다. 옥관리 입구에서 차량으로 5분여를 가다 오른쪽 개울을 건너 조금 더 언덕을 올라가면 천년고찰 대둔사를 만나게 된다.
차를 인근에 세우고 대둔사로 향했다.
외딴 곳에 있는 사찰임에도 오늘따라 신도들로 붐빈다.
천년고찰 대둔사는 복우산 자락 작은 봉우리 밑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사명대사 유정스님이 임진왜란 때 승군 1만명을 주둔시켰다는 절이다.
절 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신도들을 따라 절 구경에 빠져 들었다. 널찍한 마당 곳곳 잘 가꿔진 조경수와 빨간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배롱나무가 오래된 절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대웅전 앞을 지날 때 주지인 진오스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진오스님은 달리는 스님으로 꽤 알려진 스님이다.
웬일로 신도들이 이리 많으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백중(음력 7월15일)이란다.
백중은 백종, 중원이라고도 하는데 이 무렵에 과실과 채소가 많이 수확돼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췄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날은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술ㆍ음식ㆍ과일을 차려놓고 망혼제(亡魂祭)를 지내고 스님들이 석달동안의 하안거(夏安居)를 끝내는 날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불제자 목련이 그 어머니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백중에 다섯 가지 쌀과 백가지 과일을 공양했다는 고사에 따라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고 공양을 하는 풍속이 있다.
또 하인들까지 바쁜 농사일을 잠깐 멈추고 하루 쉬는 농촌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진오스님에게 복우산에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하산 때 들러 점심공양을 하고 가란다.
점심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약속할 수 없어 답을 얼버무린 채 합장을 하고 절을 나섰다.
여기서부터 복우산까지 걷기로 했다.
초행길이라 구미시에서 발행한 산행가이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복우산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산촌리까지 4.5㎞ 정도를 걸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산촌리까지 걷는 내내 일행의 걸음을 따라오는 숲은 간벌작업으로 시원한 모습이다.
1시간30여분을 걸어 산촌리 마을에 도착했다. 이 산촌리는 전편에 비봉산과 형제봉을 소개할 때 등장했던 숲길 따라 도보여행길의 종착지다.
신작로가 나기 전까지 산촌리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려면 옥녀봉과 형제봉을 넘어 25리나 떨어진 선산장까지 가야만 했다.
여러 고개를 넘어 25리를 왔다갔다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렸으리라.
자식들에게 신기고 먹일 검정 고무신과 돼지고기, 고등어를 사기 위해 추석 대목장을 나온 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막걸리 한 되를 기분 좋게 나눠 마시고 늦은 밤 달빛을 동무 삼아 휘청거리며 내려오던 고갯길이다.
그런데 복우산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눈에 띄지 않는다. 눈앞에 야트막하게 펼쳐진 산이 모두 고만고만한데 어느 산이 복우산인지 알 길이 없다.
산행가이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분간하기 어렵다.

◆골재채취로 신음하는 산

복우산 북서사면이 골재채취로 인해 속살을 드러낸 채 신음하고 있다. 골재채취는 복우산 정상 바로밑까지 진행되고 있다.

산촌리 마을회관 앞 깨를 쪄서 다발을 묶고 있는 노부부에게 복우산의 위치를 물었다.
산촌 마을 바로 건너편에 우뚝 솟은 산이 복우산이라고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휴일을 맞아 고향에 들른 중년의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 역시 바로 건너편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복우산이라고 한다.
이들이 가리켜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고갯마루와 마주했다.
노부부의 말대로라면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비포장이지만 차량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오른편으로 향했다.
그런데 등산로는 나오지 않고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중장비와 골재회사 사무실이 나온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신음하고 있는 산.
지도상으로 보아 이곳이 복우산임에 틀림없는데 산의 북서사면이 골재채취로 잘려나갔다.
휴일이어선지 골재작업은 중단됐지만 거대한 중장비들이 늘어선 모습은 공포감마저 들게 한다.
잘려나가지 않은 골재채취장 위를 따라 복우산 정상을 향한다. 아슬아슬한 경사면을 따라 복우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선 큰 바위가 마치 정상석처럼 느껴진다.
골재채취가 계속되면 이 복우산 정상도 사라질지 모른다.
처음 구미의 산을 기획하면서 대둔사라는 천년고찰을 품은 산이어서 많은 사연과 아름다운 등산로를 갖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기대를 갖고 찾은 복우산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신음하고 있어 가슴이 먹먹하다.
멀리 상주의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 아래쪽으로 대둔사가 있을텐데 정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산길에 대둔사 뒤편 능선을 따라 등산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쉬움이 가득한 일정이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사진=류성욱 기자·한태덕 사진작가
식생자문=제상훈 식물학 박사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