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14 ) 진흥왕의 전쟁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7세에 즉위해 36년간 왕좌에 있으면서 신라 최고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권 강화를 꿈꾸면서 화려한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43세의 젊은 나이에 권력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절을 지은 황룡사의 터에 보리밭이 조성돼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고 있다. 당간지주와 황룡사역사관이 멀리 보인다. 진흥왕은 나제동맹으로 100년을 넘게 이어져 왔던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성왕을 죽이며 한강을 차지하는 정복 군주로 떠올랐다. 그는 화랑과 이사부, 거칠부 등의 장군을 앞세워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많은 국력을 기울였다. 영토가 국력을 자랑하게 했다. 신라의 부흥기에도 말기 못지않게 국가 간의 전쟁을 펼치면서도 권력에 대한 암투 또한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왕권을 옹호하며 직접 전쟁에 나서 많은 공적을 올렸지만, 자신들의 권력 구도를 쌓아 올리는데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은 그를 어린 나이에 왕좌에 등극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그의 최후는 쓸쓸히 법당 안에서 맞이해야 했다. 진흥왕의 전쟁사와 함께 그를 지원했던 이사부와 거칠부, 내각의 힘이 절대적인 왕권을 흔들며 격랑 속으로 휘말렸던 역사를 돌아본다. ◆진흥왕의 전쟁진흥왕이 540년 즉위하고, 10여년 뒤 친정체제로 전환하면서 연호를 개국으로 변경하고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신라, 고구려와 백제 삼국의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의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전성기를 지낸 고구려는 내부의 권력투쟁과 북방 돌궐의 침입 등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백제와 나제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 용강동 마을 가운데 고분에서 출토된 바둑돌. 학자들은 신라시대 진흥왕대의 유물로 보고 있다. 진흥왕은 2년 뒤에 백제군을 급습해 한강 하류를 빼앗고 새로운 주를 설치했다. 100여 년이 넘도록 유지된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공격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의 나이는 당시 스무 살로 혈기왕성했다. 백제의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총사령관으로 태자 여창을 임명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편성해 신라 관산성으로 쳐들어갔다. 554년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간의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설명된다. 관산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었고, 승리를 보고받은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구천으로 향했다. 성왕이 친위군대 50명만 이끌고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흥왕은 성왕을 급습해 목을 베고, 그 여세를 몰아 관산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인과 2만 9천600명에 이르는 군사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진흥왕은 넓어진 신라의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그가 정복한 땅의 경계를 순회하면서 순수비를 세웠다.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에서 발견된 순수비는 진흥왕의 업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한반도 동남부에 있는 약소국 신라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함경도에 이르는 큰 나라로 성장시킨 것은 패기만만한 진흥왕의 힘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강대국 틈에서 눈치를 보던 신라는 진흥왕 이후로 삼국통일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사부와 거칠부진흥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법흥왕의 왕비였던 그의 외할머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법흥왕이 사망하면서 당시 왕실에서 실질적인 주인은 왕비였던 파도부인이었다. 아들이 없었던 왕비 파도부인은 딸 지소부인의 아들인 외손자 삼맥종의 자질을 높게 평가했다. 또 당시 법흥왕의 최측근으로 상대등과 2품의 고위직에 있던 이사부와 거칠부가 파도부인의 뜻을 받들어 진흥왕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다. 이사부와 거칠부도 내물왕의 4세, 5세손으로 가까운 왕손이자 정권의 실세로 나라의 일을 쥐락펴락하는 대신이자 무장이기도 했다. 황룡사역사관에 옛날 담징이 그려 날아가던 새들이 부딪혀 떨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벽화가 재연되어 있다.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태후 지소부인의 섭정으로 나라의 살림을 꾸려나갔지만, 실질적인 내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입김으로 흘러갔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진흥왕의 전쟁에 앞장서는 무장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사부: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으로 이름은 약종이었다. 그는 지증왕과 동문수학하면서 자라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지증왕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장군으로 전장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울릉도를 복속시킨 것도 이사부의 솜씨다. 이사부는 법흥왕 대에도 장군으로 대대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왜와 백제, 고구려, 가야국의 자잘한 침략을 막아내면서 금관가야를 점령해 실질적인 가야를 복속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어부지리로 신라 땅으로 만들었다. 562년에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가야를 완전히 신라에 합병시켰다. 단양적성비 등에 이사부는 왕 다음으로 가장 앞에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신라의 실세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이사부는 내정에도 밝아 나라의 정통성을 잇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해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거칠부: 거칠부는 내물왕 5세손으로 왕손이었으며 이름은 황종(荒宗)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신으로 나랏일을 했다. 그는 젊었을 때 승려로 고구려 땅을 누비며 내정을 정탐하는 일을 하면서 고구려의 유명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장군이 되어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서 싸움을 전개할 수 있었다. 거칠부가 백제, 고구려 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쌓으면서 내각에서의 지위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면서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승려 혜량법사를 추천해 바로 신라의 승통으로 임명하게 했다. 승통은 당시 신라 승려 최고의 관직으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운령비 등에 거칠부의 이름이 왕 아래, 맨 윗자리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전쟁에서는 그의 공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울진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신라비. 법흥왕 대에 울진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해 이를 처리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국보 제24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흔적: 울진 성유굴과 봉평리신라비△울진 봉평리 신라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리신라비가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다.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당시 울진지방에서 성을 에워싸고 불을 지르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여 정부가 대군을 동원해 진압하고, 사후 처리하는 과정까지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기록은 당시 율령반포에 대한 사실과 관료제도,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의식행사 등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 전시관은 국보 신라비는 물론 실내전시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의 중요한 석비 모형을 전시하고, 금석학의 계보와 시대별 비의 양식변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야외 비석거리와 야외비석공원을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조성하고, 비석이 발견된 위치에 그 비석의 모형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진흥왕이 세운 명활산성작성비를 비롯해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와 황초령순수비, 북한산순수비, 마운령순수비 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울진 성류굴 입구 암벽에 신라 시대에 새겨진 글. △성류굴의 진흥왕 명문: 최근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울진 성류굴 내부 제8 광장에서 신라시대 진흥왕이 560년 6월에 성류굴을 다녀간 기록이 확인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동굴 천정에서 바닥으로 연결된 종유석에 ‘경진년(560, 진흥왕 21년) 6월에 진흥왕이 다녀가면서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50명이 이를 보좌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 내부의 8광장의 종유석에 새겨진 명문.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내용의 글자가 최근에 발견돼 학계와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를 통해 560년 진흥왕이 울진 성류굴에 행차하여 다녀간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이동에는 선박이 활용되었고, 행차에는 50인이 보좌하였으며, 행차와 관련하여 동굴 내부를 잇는 잔교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울진 성류굴 내부의 8광장의 종유석에 신라시대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진 현장을 해설사가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 문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신라사를 연구하고, 울진 성류굴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게 할 중요한 자료로 국보적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명활산성작성비. 진흥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내용과 당시 여러 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명활산성작성비: 명활산성작성비는 보문단지 입구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에 의해 1988년 발견됐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실성왕 집권기인 405년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었고, 자비왕과 소지왕 때에는 국왕이 머물렀던 궁성으로 사용되었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작성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첫머리의 신미년이라는 간지로 보아 진흥왕 12년 551년으로 추정된다. 축성 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밝히고 축성에 참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는 591년의 남산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됐다.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경주남산신성비 제4비. 명활산성작성비와 함께 신라시대 문화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활산성작성비는 남산신성비와 공통되는 점이 많아 양자를 서로 보완하여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흥왕과 거칠부의 갈등진흥왕이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던 당시 거칠부는 신라 최고 귀족으로 내정과 국방에서도 실질적인 권력자로 자리 잡았다. 진흥왕과 거칠부가 갈등을 빚게 된 계기는 왕위를 이을 세자 책봉 문제에서 비롯됐다. 세자였던 진흥왕의 첫째 아들 동륜이 책봉된 지 6년 만에 죽은 이후, 다음 세자 책봉 문제를 두고 진흥왕과 거칠부의 의견이 대립했다. 울진 봉평리 신라 비 전시관에 대한민국 모형의 공원을 조성하고, 시대별 비석들이 발견된 장소에 비석의 모형을 설치해 두고 있다. 진흥왕 북한산비의 모형. 진흥왕은 세자 동륜의 아들 진평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중심이자 실세였던 거칠부는 동륜의 동생 금륜(진지)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진흥왕은 장손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과 신체가 장대하고, 지식이 깊으면서도 활달하며 강직한 기상을 가진 손자 진평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다. 진평이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둘째 아들 금륜에 대해서는 편향적인 성격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진흥왕의 뜻을 따르며 진평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세력들은, 왕비와 함께 금륜을 지지하는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조용하게 물러나 훗날을 도모하기로 했다. 진흥왕은 자신의 세력이 밀려나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면서 승복을 입고 절에서 은둔하다 4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 비 전시관의 비석 공원에 설치된 진흥왕 황초령순수비 모형. 거칠부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을 제25대 진지왕으로 옹립하고, 상대등에 올라 정권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러나 거칠부의 종횡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지왕은 거칠부가 국사를 모두 자임하고 최고 실권을 행사하자 나랏일은 뒤로 하고 횡음에 빠졌다. 이어 거칠부가 죽자 그들의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고, 진평왕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26대 왕으로 내세웠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특집)삼국유사 기행(10)- 실성왕

역사는 상상이다. 누구도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보지 않은 1천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제18대 왕인 실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시대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더욱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대릉원 한가운데 황남동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 하여 ‘황남대총’이라 이름이 붙은 왕릉. 학자들은 내물왕, 실성왕 또는 눌지왕릉이라고도 추정한다. 남쪽분은 남자, 북쪽분은 여자가 묻혀 있으며 금관과 출토된 유물 등으로 ‘실성왕릉’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다. 삼국유사는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 즉위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당시 주변 정세 등을 두고 온갖 정황을 역사적 사건과 가치 기준에 빗대어 해석하고 있다. 어차피 오래된 시간이 만든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덧대어 추정한 것에 불과해 사실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성왕의 죽음과 내물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이동 과정을 상상해 본다. 공중에서 촬영한 대릉원 전경. 실성왕릉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이 있다. ◆삼국유사 실성왕의희 9년 계축(413)에 평양주의(지금의 경기도 양주)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함을 미워하고 꺼려서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곧 창을 뒤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당시 기록 속의 왕들△내물왕: 내물왕은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 신라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세습체제를 갖추었다. 내물왕은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석씨의 피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다. 김씨로 왕권을 거머쥐었지만, 석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 대에는 백제와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야 했다. 당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왜와 가깝게 지내면서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내물왕 때에는 가뭄과 지진도 자주 일어나 자연재해를 많이 입었다. 농사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 농사를 포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백제의 힘을 등에 업은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내물왕 재위 9년에 이어, 38년에는 왜군들이 금성을 에워싸고 5일간이나 물러가지 않았다. 내물왕은 적들이 배를 타고 육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 기병을 앞세워 크게 무찔렀다. 재위 44년 399년에도 백제를 등에 업고 수도까지 침략해 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 국경지역으로 들어와 왜군과 가야군을 물리쳤다.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재위하다가 402년에 죽었다. 아들의 나이가 어려 고구려에 볼모로 10년간 잡혀있다 돌아온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대서지 이찬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내물왕과는 동서 간이다.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내물왕의 두 아들 복해와 미해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에는 내물왕이 보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많은 학자가 실성왕이 두 아들을 모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눌지왕: 눌지왕은 신라 19대 왕이다. 내물왕의 아들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417년에 즉위해 458년까지 4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한편,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몹시 원망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 했다. 실성왕은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라고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사람됨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실성왕이 그를 죽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눌지는 도성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이 부인의 아버지인 장인 실성왕을 살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형으로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신하들에게 동생들을 데려올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먼저 데려오고, 왜나라에 거짓 항복해 미해를 구하고 자신은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제상의 부인 이야기는 벌지지, 망부석, 은을암 등의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흔적△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교촌마을 북쪽에 있고, 1969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여 호석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밑지름이 22m이고, 높이 5.3m이다. 평지에 목관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다음 흙으로 덮어 봉분을 완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한 내물왕릉.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고분의 형태로 비추어 내물왕릉이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다. 그러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석곽묘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지정된 고분은 내물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현재 내물왕릉으로 지정된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대형 고분. 윗부분이 함몰되어 있으며 규모가 큰 점, 첨성대의 서남쪽 등에 위치한 점을 미루어 학자들은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지정된 내물왕릉에서 서남쪽 500m 지점의 대규모 쌍분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첨성대 서남쪽과 일치하고, 윗부분이 함몰되어 시대적으로 적석목곽분의 형식일 것으로 보여 학자들은 이 고분을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 가운데 호젓한 호수에 물그림자를 데칼코마니로 만들며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왕릉으로, 남북으로 봉분이 이어진 쌍분이다. 황남동 98호분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아래는 남북으로 120m, 동서 80m, 높이 22로 신라 최대의 고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황남대총은 쌍분으로 왕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묻힌 남분에서 출토된 유물 모습. 1973년 7월부터 3년여 시간에 걸쳐 발굴한 결과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큰 칼이 나오면서 남분이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무덤은 얕게 땅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에 이중 덧널을 설치하고, 따로 방을 만들어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금귀걸이 등의 유물. 무덤에서는 남분에서만 3만7천여 점을 비롯해 6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금관과 금동관, 금제관드리개, 금목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금제허리띠,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 금동신, 은제허리띠, 금은반지 등의 금은으로 만든 유물이 출토됐다. 또 금속용기와 칠기, 토기, 유리용기 등의 생활용구와 무기, 마구류까지 다양하게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실성왕이거나 눌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는 금관과 화려한 유물을 넣고 봉분을 더 크게 하지만, 왕인 남분에는 금동관을 넣는 등으로 미루어 눌지왕이 실성왕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눌지왕의 반격석씨들이 왕위 세습을 이어오던 당시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석씨가 왕위를 대물림하던 때에 흘해왕의 아들이 없어 내물왕은 김씨이지만 석씨의 배경에 힘입어 왕좌에 올랐다. 내물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고, 미추왕의 부인은 석씨 왕손이었다. 미추왕이 처가 석씨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듯 내물왕 또한 석씨의 권세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셈이다. 내물왕은 4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가뭄과 지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 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내물왕은 당시 김씨로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과 실성왕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우세한 힘을 확보해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내물왕과 비슷하게 미추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석씨 왕족과도 연대하고 있는 실성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왜나라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했다. 왜군들은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나쁜 짓을 일삼았다. 내물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의 심한 내정 간섭을 경험해야 했다. 내물왕 후대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제의해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신라는 대외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실성왕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었다. 실성은 고구려 후광을 업고 신라로 돌아와 내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물왕에 대한 보복 정치를 단행했다.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보해와 미해를 고구려, 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어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볼모로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구려 사신들을 초청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에게 눌지를 제거하라는 밀지와 함께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게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들이 눌지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실성왕의 밀지를 눌지에게 귀띔해 주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눌지가 거꾸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므로 눌지는 장인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년 만에 왕좌에서 사라졌다. 눌지왕은 또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하기 위한 구국단을 구성해 파견했다. 고구려에서는 설득전략이 먹혀들어 가 보해를 무사히 빼내어 왔다. 그러나 왜에서는 사정이 달라져 왕을 살해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러나 왜의 왕을 살해하려던 구국단은 성사 직전에 은잠술이 능한 왜의 비밀수호단에 잡혀 미해만 가까스로 도망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눌지왕은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후대에 접어들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수시로 침략해 오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무기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주곽의 유물 형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뿔로 만든 잔.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