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22>- 태종 춘추공(중)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일등공신 중의 일인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 삼국통일의 방법 등을 두고 무열왕의 평가는 두 가지로 엇갈리기도 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학자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른 것과 두만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넘겨준다는 밀약은 박수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당나라의 힘을 빌려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한민족의 뿌리를 하나로 결집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했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있다. 또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거대한 힘의 중국에 잡아먹혀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라며 다행스럽다는 해석도 있다. 이번 호에서는 왕위에 오른 김춘추가 백제의 내환을 기회 삼아 당의 힘을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고구려 정벌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전쟁에 직접 나선 이야기를 풀어본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2)현경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희사에 있는 크고 붉은 말이 밤낮으로 6시간 동안 절을 도는 공덕을 닦았다. 2월에는 여러 마리의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한 마리의 흰 여우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수 물가에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느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다. 밤에는 대궐 남쪽 길 위에서 귀신이 울었다. 신라 태종이 백제의 나라 안에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현경 6년 경신(660)에 인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당의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13만을 이끌고 가서 치게 했다.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전쟁에 직접 나서 정예병사 5만을 거느리고 덕물도 쪽으로 진군했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 흥수와 성충 등의 신하들이 서로 비방하며 대책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간신배의 말에 따라 전략을 세워 전쟁에 패했다. 당나라 소정방은 강 왼편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밀물을 타고 병선들이 꼬리를 물면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성 30리 밖까지 와서 머물렀다. 성안의 백제 군사들이 대항했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의자왕이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노라!” 하고는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지만 포로가 되었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황제를 뵈니 황제가 포로들을 책망만 하고는 용서해 주었다. 왕이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 벼슬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에게 장사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소정방과 신라군은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군영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그만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복수김춘추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의 나이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사위와 딸인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백제 의자왕이 집권 초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외부적으로 신라를 침략해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던 것이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삼일간이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오”라고 울부짖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김춘추의 비운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이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다. 특히 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김유신의 가야세력과 연합도 정략적인 결혼 등으로 두텁게 이루어졌다.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김유신과 협력해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IMG06}]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덕여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더욱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든든한 배경을 마련한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했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했다. 당나라의 예복을 입는 중조의관제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651년), 집사부 개편 등이 그것이다. 다분히 중국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아주어야겠다. 자신의 왕정시대를 대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다. 김춘추는 654년 51세가 되는 해에 김유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춘추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위계승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확보, 율령정치 강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면서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을 태자에 책봉했다. 무열왕 춘추는 660년 일등공신 김유신을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이어 백제에 대한 복수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 태종 때 다짐받았던 군사지원 약속을 고종 즉위에 따라 무열왕은 아들 인문을 보내 다시 촉구했다. 김인문은 아버지 무열왕의 계략을 받아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가 고종의 황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틈을 노려 군사지원 약속을 얻어냈다. 신라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김인문을 앞장군으로 삼아 13만 명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자, 무열왕은 복수의 칼을 들고 직접 김유신 장군과 태자 법민 등 장군들을 대동해 5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압박했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의 비원이 18년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무열왕 김춘추는 꿇어앉은 백제의 의자왕과 딸을 베었던 윤충을 죽일 듯 쏘아보면서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었다. “네놈들이 우리 신라의 충신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들의 피를 함부로 땅바닥에 뿌렸겠다.” 의자왕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지만, 윤충은 빳빳이 목을 쳐들고는 크게 웃어대며 응수했다. “그래 네놈의 여식과 사위의 목은 내가 아주 단칼에 베었다. 집단보다 가볍게 베어지는 칼맛이 아주 괜찮더구만. 음하하하….” [{IMG06}] 무열왕은 소정방이 있는 곳이라 의자왕은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큰 칼을 휘둘러 윤충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 신라는 충신들의 피를 대신해 선조들이 확보했던 고구려의 땅까지 회복해 삼국을 통일하고 원혼들을 위로하겠다”며 하늘 높이 팔을 흔들었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이어 의자왕은 태자와 왕자, 대신과 장병,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으며 망국의 주범이 되었고, 700년 역사의 백제는 무너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당의 측천무후 마음을 움직인 김춘추 부자 삼국통일의 한축을 세우다

신라 천 년의 역사 가운데 획기적인 전환점이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마련했다. 김유신 장군과 손잡고 전장을 누빈 것이 삼국통일을 달성한 기초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데는 정보가 중요하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의 정보를 확보하는 데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가장 앞자리에 둔다. 신라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이룩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군사를 움직이는데 김춘추와 김인문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 고종이 인재를 아끼며 중용하는 마음을 간파했다. 또한 태종의 후궁이자 고종의 왕후 자리를 꿰차고 정치에 직접 관여했던 측천무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당나라의 도움을 받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이용해 큰아들 법민은 신라에 남겨두고 지혜로운 인문을 당나라에 볼모로 맡겨두듯 하면서 정보를 얻어내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삼국유사는 태종 김춘추조를 길게 늘여 썼다. 이 때문에 김춘추에 대한 이야기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또 삼국유사의 내용은 간편하게 요약해 기록하기로 한다. ◆삼국유사: 김춘추〈1〉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다.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김유신의 막내 여동생 문명왕후 문희다.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오줌이 서울에 가득찼다. 다음 날 아침 그 꿈을 동생이 비단치마를 주고 샀다. 열흘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유신이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떨어뜨리고는 “우리 집에 들어가 꿰맵시다”라 하니 춘추가 이에 따랐다. 유신의 동생 문희가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어주면서 둘이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춘추공이 문희와 혼례를 올려 문희는 후일 왕비가 되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되는 용삭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비석이 있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런 지략과 전력을 다해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워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차, 각간 지경, 각간 개원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다. 서자는 개지문 급간, 거득영공, 마득아간이라 했는데 딸까지 합하여 모두 다섯명이다. 춘추공이 군사를 요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아름답게 여겨 신성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어 춘추공을 당에 머물게 하여 시위로 삼으려 했으나 간청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는 바로 무왕의 맏아들로 굳세고 용맹하며 담력이 있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었으므로 당시에 해동의 증자라고 불리었다. 그는 왕위에 즉위하자 술과 계집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계략김춘추는 외모가 여성스럽게 넉넉하면서도 남성미가 넘쳤다. 부드럽게 생겼지만 무예가 출중하여 전쟁에서는 은연중 상대방 장수들이 그를 무시하다 낭패를 당했다. 특히 김춘추의 장점은 문장이 뛰어나고 언변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남다른 집념이 강해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했다. 춘추공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춘추는 기둥을 잡고 사흘 밤낮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백제에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이를 계기로 춘추공은 신라의 대신을 자처하여 고구려와 왜나라에까지 직접 백제를 공격할 군사를 얻으러 갔다. 그러나 오히려 책망만 듣고 실패하고 돌아왔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잡아 가두고 억류했다. 이때 김유신이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를 구해 내면서 둘의 관계는 한층 더 끈끈하게 발전했다. 춘추공의 집념은 그를 당나라로 향하게 했다. 당 태종 때였다. 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의 화살을 눈에 맞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후궁 측천무후가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측천무후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정치적인 야욕으로 남성들을 요리조리 마음껏 휘둘렀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황실 내부 사정을 간파하고, 당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태종에게 정치적인 계약을 하는 한편, 황금을 들고 측천무후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신라의 훤칠한 아름다운 장수의 외모와 현란한 말솜씨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다음부터 춘추공의 협약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망설이던 태종이 30만 대군의 병력지원을 약속하며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물리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함께 돕겠다고 언약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렇게 순조롭게만 않았다. 당 태종이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그의 아홉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두고 혈투를 벌였다. 태종 이세민의 큰아들 이승건이 태자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가 먼저 죽고 넷째 이태가 왕위를 잇기로 했다. 태종의 후궁 측천무후가 아홉 번째 아들 이치에게 붙었다. 소극적인 이치에게 왕씨 부인이 있었지만, 태종의 병실을 드나드는 그를 측천무후가 침실로 불러들여 한통속이 되어버렸다. 결국 측천무후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이치를 꼬드겼다. 소극적이던 이치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 넷째 형을 누르고 황좌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왕씨를 폐위토록 하고, 그의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측천무후의 세상이 도래했다. 중국 200여 명의 황제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으로 황제에 등극하는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 틈에 신라의 전쟁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춘추공은 성년이 된 둘째 아들 김인문을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했다. 인문은 춘추공과 문희의 장점을 그대로 빼닮아 훤칠한 외모에 무술 실력을 갖춘 뛰어난 지략가로 성장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아버지 춘추공의 생각을 잘 알았다. 당 고종이 즉위하고 측천무후의 정치적 욕심을 간파하고 있던 춘추는 인문에게 측천무후를 공략할 방법을 미리 귀뜸해 보냈다. 춘추공을 빼다 박은 젊은 신라의 장수 김인문을 마주한 측천무후는 신라의 선물보다 인문의 외모에 더욱 빠져들었다. 인문의 외모가 측천무후의 눈에 들면서 인문은 당나라에서 뼈를 묻어야 할 운명으로 진작 낙점되었다. 측천무후의 꼭두각시가 된 당의 고종 이치는 김인문에게 태종 때처럼 30만 대군의 지원과 백제, 고구려 공격을 약속했다. 김인문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군사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측천무후의 부름으로 전쟁 중에 당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배경에는 김춘추의 정치적 계략과 김유신 장군 등의 뛰어난 전술전략 외에도 측천무후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춘추공을 지원하는 세력은 다방면에 있었다. 그를 직접 왕좌에 앉게 한 김유신 장군은 가장 큰 언덕이었다. 또 그의 장성한 아들들도 그를 지원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그와 결혼한 김유신의 동생 문희도 춘추의 전쟁과 정치적 행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문희는 미색이 뛰어난 것은 물론 지혜로웠다. 하늘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유신과 함께 자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세상 이치는 물론 전쟁의 전술에도 밝았다. 김춘추가 전쟁에 앞서 부인 문희와 상의하는 일이 잦았던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사위에 휘두른 질투의 칼날 제 왕좌를 뒤엎다

역사는 상상이다. 누구도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보지 않은 1천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제18대 왕인 실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시대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더욱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삼국유사는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 즉위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당시 주변 정세 등을 두고 온갖 정황을 역사적 사건과 가치 기준에 빗대어 해석하고 있다. 어차피 오래된 시간이 만든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덧대어 추정한 것에 불과해 사실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성왕의 죽음과 내물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이동 과정을 상상해 본다. ◆삼국유사 실성왕의희 9년 계축(413)에 평양주의(지금의 경기도 양주)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함을 미워하고 꺼려서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곧 창을 뒤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당시 기록 속의 왕들△내물왕: 내물왕은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 신라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세습체제를 갖추었다. 내물왕은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석씨의 피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다. 김씨로 왕권을 거머쥐었지만, 석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 대에는 백제와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야 했다. 당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왜와 가깝게 지내면서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내물왕 때에는 가뭄과 지진도 자주 일어나 자연재해를 많이 입었다. 농사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 농사를 포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백제의 힘을 등에 업은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내물왕 재위 9년에 이어, 38년에는 왜군들이 금성을 에워싸고 5일간이나 물러가지 않았다. 내물왕은 적들이 배를 타고 육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 기병을 앞세워 크게 무찔렀다. 재위 44년 399년에도 백제를 등에 업고 수도까지 침략해 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 국경지역으로 들어와 왜군과 가야군을 물리쳤다.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재위하다가 402년에 죽었다. 아들의 나이가 어려 고구려에 볼모로 10년간 잡혀있다 돌아온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대서지 이찬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내물왕과는 동서 간이다.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내물왕의 두 아들 복해와 미해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에는 내물왕이 보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많은 학자가 실성왕이 두 아들을 모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눌지왕: 눌지왕은 신라 19대 왕이다. 내물왕의 아들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417년에 즉위해 458년까지 4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한편,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몹시 원망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 했다. 실성왕은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라고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사람됨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실성왕이 그를 죽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눌지는 도성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이 부인의 아버지인 장인 실성왕을 살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형으로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신하들에게 동생들을 데려올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먼저 데려오고, 왜나라에 거짓 항복해 미해를 구하고 자신은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제상의 부인 이야기는 벌지지, 망부석, 은을암 등의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흔적△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교촌마을 북쪽에 있고, 1969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여 호석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밑지름이 22m이고, 높이 5.3m이다. 평지에 목관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다음 흙으로 덮어 봉분을 완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석곽묘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지정된 고분은 내물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현재 지정된 내물왕릉에서 서남쪽 500m 지점의 대규모 쌍분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첨성대 서남쪽과 일치하고, 윗부분이 함몰되어 시대적으로 적석목곽분의 형식일 것으로 보여 학자들은 이 고분을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 가운데 호젓한 호수에 물그림자를 데칼코마니로 만들며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왕릉으로, 남북으로 봉분이 이어진 쌍분이다. 황남동 98호분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아래는 남북으로 120m, 동서 80m, 높이 22로 신라 최대의 고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1973년 7월부터 3년여 시간에 걸쳐 발굴한 결과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큰 칼이 나오면서 남분이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무덤은 얕게 땅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에 이중 덧널을 설치하고, 따로 방을 만들어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무덤에서는 남분에서만 3만7천여 점을 비롯해 6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금관과 금동관, 금제관드리개, 금목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금제허리띠,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 금동신, 은제허리띠, 금은반지 등의 금은으로 만든 유물이 출토됐다. 또 금속용기와 칠기, 토기, 유리용기 등의 생활용구와 무기, 마구류까지 다양하게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실성왕이거나 눌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는 금관과 화려한 유물을 넣고 봉분을 더 크게 하지만, 왕인 남분에는 금동관을 넣는 등으로 미루어 눌지왕이 실성왕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눌지왕의 반격석씨들이 왕위 세습을 이어오던 당시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석씨가 왕위를 대물림하던 때에 흘해왕의 아들이 없어 내물왕은 김씨이지만 석씨의 배경에 힘입어 왕좌에 올랐다. 내물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고, 미추왕의 부인은 석씨 왕손이었다. 미추왕이 처가 석씨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듯 내물왕 또한 석씨의 권세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셈이다. 내물왕은 4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가뭄과 지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 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내물왕은 당시 김씨로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과 실성왕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우세한 힘을 확보해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내물왕과 비슷하게 미추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석씨 왕족과도 연대하고 있는 실성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왜나라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했다. 왜군들은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나쁜 짓을 일삼았다. 내물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의 심한 내정 간섭을 경험해야 했다. 내물왕 후대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제의해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신라는 대외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실성왕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었다. 실성은 고구려 후광을 업고 신라로 돌아와 내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물왕에 대한 보복 정치를 단행했다.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보해와 미해를 고구려, 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어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볼모로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구려 사신들을 초청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에게 눌지를 제거하라는 밀지와 함께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게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들이 눌지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실성왕의 밀지를 눌지에게 귀띔해 주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눌지가 거꾸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므로 눌지는 장인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년 만에 왕좌에서 사라졌다. 눌지왕은 또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하기 위한 구국단을 구성해 파견했다. 고구려에서는 설득전략이 먹혀들어 가 보해를 무사히 빼내어 왔다. 그러나 왜에서는 사정이 달라져 왕을 살해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러나 왜의 왕을 살해하려던 구국단은 성사 직전에 은잠술이 능한 왜의 비밀수호단에 잡혀 미해만 가까스로 도망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눌지왕은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후대에 접어들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수시로 침략해 오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죽음으로 왕족 구해낸 충신 그의 부인 슬픔으로 굳어버려

내물왕은 신라 17대 왕으로 본격적인 김씨 왕조 세습의 시작이다. 삼국유사는 내물왕과 눌지왕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당시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의 일화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김(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내물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 복호)를 구해온 데 이어, 왜에 잡혀 있는 내물왕의 또 다른 동생 미해(삼국사기 미사흔)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돌아온 이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내친걸음으로 바로 왜국으로 떠났다. 이 때문에 김(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고, 벌지지, 치술신모와 은을암 등의 흔적과 설화를 남기게 되었다.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충신 김(박)제상과 그의 부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설화를 고증하는 흔적이 있는 경주와 울산의 현장으로 가본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상세하게 더듬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내물왕 김제상신라 제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 되는 경인(390)에 왜왕이 사신을 조정에 보내와서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한 분의 왕자를 보내시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로 하여금 왜국을 예방하게 했다. 미해는 당시 10살이어서 말과 행동이 아직 미숙해 내신인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보냈더니, 왜왕이 붙들어 두고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는 기미(419)에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대왕의 아우님 되시는 보해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기를 원하여 각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절히 청하도록 하였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이 일로 인하여 화친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 그의 아우 보해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로 가게 하면서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임명하여 보냈더니, 장수왕도 또한 그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9년 되는 을축(425)에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내었다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짐이 고구려가 화친하자고 하여 사랑하는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역시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관리들이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이라 추천했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신은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이다”라 했다. 왕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당부했다. 제상이 변복하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의 처소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모의했다. 제상이 먼저 5월15일에 고성 포구로 돌아와 배를 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약속한 날이 닥쳐오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칠이나 조회에 참석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을 쳐 고성해변에 닿았다. 고구려왕이 사람들을 시켜 그들을 추격해 고성까지 와서야 따라잡았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들이 다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자 미해를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말하기를 “한 몸뚱이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 하나에 한쪽 눈만 있는 것과 같소이다. 비록 동생 하나는 찾았으나 또 한 동생이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라 했다. 그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떠나 곧바로 율포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으나 그의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애절하고 간절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단지 손만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서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데 저의 부친과 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했습니다”라 하니 왜왕이 이 말을 믿고 집을 주어 그를 편안하게 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게 되자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라 하니 미해가 “그러면 함께 갑시다”라 했다. 제상이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들이 알아차리고 뒤를 쫓아올까 염려가 돼 오니 신은 남아서 뒤쫓는 것을 막도록 하겠습니다”라 했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는 부모·형제와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나 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 하니 제상이 “신은 왕자님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만 위로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오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 하면서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제상이 나와서 “어제 사냥을 하시느라 말을 타고 쏘다니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한다”라며 말렸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미해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고 하자 그들은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말 탄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심문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라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뿐인데 어찌 구태여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왜왕이 화를 내며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한다면 응당 온갖 형벌을 가하겠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녹봉을 상으로 주겠다”라 했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봉은 받지 않겠다”라 했다. 왜왕이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를 걷게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 하니 대답하기를 “계림의 신하다”고 했다. 다시 그를 뜨겁게 단 철판 위에 서게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 물었다. 제상이 역시 “계림의 신하이다”라 하자 왜왕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가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렸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모든 관리로 하여금 굴헐역에서 맞이하도록 했다. 왕이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나라 안에 죄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여 크게 풀어주었으며 제상의 처를 국대부인으로 책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처음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 문의 남쪽 모래밭 위까지 와서는 거기에 누워 오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로 인해 모래밭을 장사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다. 한참 뒤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치술신모가 되었는데 지금도(고려시대) 이곳에는 사당이 있다. ◆흔적내물왕의 흔적은 경주 동부사적지에 능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능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사적지로 지정하고 능을 관리하고 있다. 눌지왕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울산광역시는 울산 도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 일대 박(김)제상의 유적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충렬공 박제상기념관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울산은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유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치술령 신모설화: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미해)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숨을 거두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변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 보게 하였던바 새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망부석: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망부석은 박제상의 부인과 딸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은을암: 은을암은 망부석의 남쪽 4㎞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바위다. 은을암은 동해가 바라보이는 큰 바위에 성인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이 어둡게 입을 열고 있다.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굴에서는 사시사철 샘이 흘러내리고 있다. 은을암에는 지금도 사당을 지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충렬공 박제상기념관: 울산시가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설화를 영상물과 그림, 조각 등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 옆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한 치산서원을 복원해 두고 있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 등 3동의 사당이 있다. -벌지지: 경주 남산과 낭산을 잇는 넓은 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있고, 제방에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어 일어서지 않았다는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동쪽에 보물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