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과학대 육군학생군사학교와 가족회사 협약 체결

대구과학대학교(총장 박준) 국방기술행정과가 육군학생군사학교(학교장 이종화)와 28일 레인보우 가족회사 협약을 체결했다.육군학생군사학교 회의실에서 이뤄진 협약식에는 대구과학대 유근환 학과장과 육군학생군사학교 이종화 학교장(소장) 등 기관 실무자들이 참석했다.이번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은 △산학 협동을 통한 유기적 협력 관계 구축 △산업체 위탁과제 및 신기술 연구개발 △학술세미나 및 교재 공동 개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상호협력 등을 합의했다.대구과학대 국방기술행정과 유근환 학과장은 “이번 협약이 우수 장교 및 부사관 양성을 위한 학술적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학생들 뿐 아니라 육군학생군사학교 장교후보생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대구과학대 국방기술행정과는 졸업생 95%이상을 육군3사관학교 사관생도와 육군 및 해병대 군장학생 부사관으로 배출시키며, 우수 부사관 양성 학과의 명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한편 대구과학대가 운영하는 레인보우 가족회사 제도는 기존 가족회사 관리제도의 업그레이드형이다.윤정혜 기자 yun@idaegu.com

용포가 아닌 갑옷이 익숙 평안함을 버리고 끝 향한 전쟁터로

문무왕은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왕으로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과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터이니 동해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은 눈물겹다. 문무왕은 나라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철저하게 방어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했다. 스스로 무술을 익혀 전쟁터에서는 가장 앞에 나서서 적을 무찔렀다. 661년 왕위에 오르자 남산신성을 보수하고, 월성에서도 잘 보이는 게눈바위 부근에 큰 창고를 지었다. 백성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배가 든든한 마음이 들도록 무기와 쌀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의 유지를 받들어 고구려로 말을 몰아 668년 기어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용포를 벗어두고 갑옷을 입고 전쟁의 선봉에 섰다. 왕으로써 자신의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왕은 끝내 당나라 군사들까지 완전히 몰아내면서 진정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문무왕은 오늘날 위정자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길어 간단하게 요약해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의 전쟁사를 스토리텔링해 기술한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2)왕이 처음 왕위에 올라 남산에 큰 창고를 설치했다. 길이가 50보이고 너비가 15보이다. 이곳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이며 천은사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이 좌창이다.591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850보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평왕 때 처음 쌓았다가 이때 와서 다시 수리한 것이다. 또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서 3년 만에 끝내고 안복의 냇가에 칠성을 쌓았다.또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고 이미 관리책임자를 정하였다. 이때 의상법사가 이를 듣고 글을 올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의 땅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오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게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교화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재해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라 하자 왕이 그때서야 이 일을 중지하였다. 또 고구려를 친 후 그 나라의 왕손을 데려와 진골의 직위를 주었다.왕이 하루는 배다른 아우인 거득공을 불러 “네가 재상이 되어 모든 관리들을 두루 다스리어 온 나라를 태평하게 하라”고 했다. 거득공은 “그렇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이 겪는 부역의 괴로움과 안일함, 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관리들의 청렴과 부패 여부를 보고 난 후에 그 직책을 맡았으면 합니다”고 하니 왕이 이를 승낙했다.거득공이 비파를 들고 거사의 차림을 하고는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천), 북원경(지금의 충주)을 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에 도착하여 두루 고을을 돌아다녔다. 무진주 관리인 안길이 그를 비범한 사람으로 보고 집으로 모셔 정성껏 대접했다. 후일 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거득공을 찾았다. 거득공은 안길을 후하게 대접하고, 임금께 전자의 일을 설명했다. 이에 왕은 성부산 아래에 있는 땅을 무진주에서 상수리 하는 자의 소목전으로 주어 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산 아래 밭 30묘가 있어 종자를 석 섬이나 뿌렸는데 풍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무진주 또한 그렇지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대비책문무왕은 어릴 때 외삼촌인 김유신으로부터 실전무술과 신비의 검술을 전수받았다. 김유신을 가까이 두려는 김춘추의 술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평소 그의 실력을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전쟁터 선봉에서 길을 열 때는 신검을 휘둘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적군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아군들의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술전략들도 법민은 고스란히 몸으로 체득해 배웠다.단지 문무왕은 자신의 무술을 철저하게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다. 왕은 스스로 무술을 익히는데 무서우리만치 집요했다. 때문에 서른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실력은 김유신의 솜씨에 거의 육박했다. 문무왕은 그러한 자신의 실력을 절대 혼자 익히고 버리지 않았다. 전쟁터를 누비며 자질이 뛰어난 화랑들을 하나씩 몰래 자신의 휘하로 포섭해 아무도 모르는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동주, 서작, 남현, 북무는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자신의 호위무사이자 절대심복으로 삼았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적군 깊숙이 침투해 적장과 유력 인사들을 살상해 적군의 예봉을 꺾고, 힘을 빼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또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이 시전될 때 동서남북을 지키면서 침투하는 적의 첩자들을 척살하기도 했다.삼국통일을 이룩하고도 문무왕은 백성들에게는 무기를 묻고, 전쟁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평화스럽게 위장을 했지만 당군과 왜병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 비밀병기가 바로 비밀결사대였다.문무왕의 비밀결사대 주력부대는 남산에 은거했다. 월성과 동궁에서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게눈바위에 비밀 망루를 설치하고 궁성, 동궁의 결사대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문무왕은 남산 게눈바위 인근에 넓은 창고를 지어 곡식과 무기를 비치하고, 비밀결사대가 은밀히 은거하며 훈련장소로 활용하도록 했다.문무왕은 동궁과 월지를 지어 군사들의 훈련소로 활용했다. 평소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대신들의 회의와 연회 등을 위해 문이 열렸다.그러나 특히 월지는 당나라 군사와 왜병들이 침략할 때 반드시 거치는 바다 임해전의 모형대로 설계하고, 비밀결사대와 수군, 장수들의 전략적 훈련장소로 활용했다. 동궁과 월지의 군사적 활용도는 외부는 물론 궁중에까지 철저하게 비밀리에 운영됐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가 가장 활성화되었을 때는 300여명에 까지 이르렀지만 100명 규모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 100여명의 정예병들은 모두가 살수로 키워졌다. 아주 실전적인 무술을 익히고 음악과 시문 등의 문무를 겸한 인재로 양성해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예리한 눈을 가진 무인들도 이들을 무인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했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는 그의 아들 신문왕으로 이어졌다. 김흠돌의 난을 소리 소문 없이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비밀결사대의 뛰어난 정보력과 감히 일반 병사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걸출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결사대는 궁중을 호위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전을 지키는 숨은 비밀병기로 운영되어 왕의 측근들조차 감쪽같이 몰랐다. 이들은 왕의 사설 군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통일신라 초기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두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도 비밀결사대의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신검이라 불리는 절대적인 검술의 무학을 문무왕이 고스란히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무왕의 전쟁 종식을 향한 집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전문] 청와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청와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를 종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22일 오후 6시20분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열어 "정부는 '한일간 군사비밀정보의 보호에 관한 협정'을 종료하기로 결정했으며, 협정의 근거에 따라 연장 통보시한 내에 외교경로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이를 통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지소미아는 한국과 일본이 2016년 11월 군사정보 직접 공유를 위해 체결한 협정으로 군사정보의 전달, 보관, 파기, 복제, 공개 등에 관한 절차를 규정하는 21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다음은 청와대 발표 전문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입니다.한일 간 '군사비밀정보의 보호에 관한 협정', 즉 지소미아(GSOMIA) 연장여부에 관한 정부의 결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정부는 한일 간 '군사비밀정보의 보호에 관한 협정(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협정의 근거에 따라 연장 통보시한 내에 외교 경로를 통하여 일본 정부에 이를 통보할 예정입니다.정부는 일본 정부가 지난 8월 2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한일간 신뢰훼손으로 안보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수출무역관리령 별표 제3의 국가군(일명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함으로써 양국 간 안보협력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안보상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이상입니다.online@idaegu.com

백승주 의원, 군사합의 시행 두달만에 북, 'NLL 부정' 방송 재개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구미갑)은 북한이 지난해 11월 9·19 남북 군사 합의 시행 이후 중단했던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부당 통신’을 올해 들어 재개한 것에 대해 “NLL을 부정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자극하지 말자는 9·19 군사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백 의원에 따르면 북한은 올 1월 들어 우리 해경·어선 등에 ‘서해상에 NLL은 존재하지 않고 경비계선만 존재한다’는 부당 통신을 최소 세 차례 이상 했다. 북한은 작년 한 해 동안 20여 차례의 부당 통신을 했다가 군사 합의 실행일인 11월1일부터 중단했었다.백 의원은 “북한이 9.19 남북군사합의를 근거로 대한민국 국방주권을 유린하고 대남 심리전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지만 국방부는 선박 불법 나포와 우리 군의 대표적 군사력 증강사업인 차세대 전투기 F-35 도입을 ‘반민족적 범죄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개탄스러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