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좋은 관계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좋은 관계검은 먹구름을 따라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하늘은 원래의 색을 되찾은 듯 산뜻하게 맑고 밝은 푸른빛이다. 마음은 흰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발길은 절로 텃밭으로 향한다. 텃밭의 아이들은 비에 젖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못내 궁금하여 신발도 제대로 끼우지 않은 데도 발길은 벌써 그쪽으로 향한다.얻어다 심은 목화는 벌써 한 뼘이나 자랐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뜨거운 여름날을 어찌 그 어린 것들이 견뎌 냈을까. 주말이 되어도 바쁜 일이 생기면 들르지 못하는 시골이라 얻어다 심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사가 내내 걱정되었다. 목화 꽃을 제일 좋아한다는 한 아이 엄마가 가져다준 목화 모종, 그녀는 티끌 하나 없는 연한 아이보리색 옷을 입고서 목화 모종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웃고 서 있었다. 고마워서 가져왔다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로 순수해 보여서 거절하지 못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웃어 주었다. 목화가 잘 자라나면 어디선가 그녀의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포근하게 잘 자라나겠지 하는 마음으로.한국어가 서툰 아이의 엄마는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자신이 일을 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아이가 성조숙증으로 치료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목화솜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네게 다가와 속삭였다. 무슨 검사든지 필요하면 모두해서 아이에게 큰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목화 모종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멀리 타국에서 우리나라로 시집온 아이어머니, 그녀가 의지하고 기댈 곳이라고는 자신이 만나는 우리들이 전부이지 않겠는가.아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성숙이 되기 시작하여 이런저런 검사를 여러 가지 하게 되었다. 골 연령 검사, 혈액검사. 성선자극호르몬 분비검사 등을 말이다. 그 검사 결과 성호르몬의 수치가 너무 높아 급기야 머릿속에 어떤 이상이 있는 지도 검사해 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아이의 어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혹시라도 모를 뇌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마음 놓고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치료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면서 MRI(자기공명영상) 촬영에 동의서를 작성해 내민다. 어떤 일이라도 늘 긍정적으로 여기며 항상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일상에 아무런 먹구름이 끼지 않기를 바라며 작성한 동의서를 훑어보았다. 설명을 잘 알아듣고서 일일이 자필로 작성한 그녀의 글자를 보다가 한 곳에 눈길이 자동으로 멈추는 것이 아닌가.‘관계’라는 항목이었다. 작성한 사람이 검사받을 아이와 어떤 사이인지를 밝히는 곳이다. 아버지라면 통상 ‘부(父)’를 적고, 어머니라면 ‘모(母)’라고 쓴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는 ‘아빠‘, 또는 ‘엄마‘라고 적고 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더러는 DADDY, MOMMY 하고 적는 칸이다. 그곳에 목화 같은 그녀가 적은 글자는 얌전하게 앉은 모습의 ’좋은‘이었다. 자기 아들과 그녀 사이가 나쁘지 않고 좋다는 뜻이리라. 그 글자가 나를 웃음 짓게 하기 보다는 묘하게 가슴 깊은 곳을 찌르르 울렸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오래 살고 부지런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문화에 적응해 가더라도 정말이지 쏙쏙 들이 완벽하게 따라잡기는 힘 드는가보다 싶어서.언젠가 길을 묻기에 외국인에게 지도를 다운 받아서 찾아서 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하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맵다? 카라이(からい)? ‘맵(지도,map)을 다운(download)’ 받아서 가라고 한 것을 자기는 ‘음식의 맛이 맵다.’라고 알아들었나 보았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고 술술 쉬운 것만 있겠는가? 삶이란 여러 가지 살아가면서 스스로 느끼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크게 자랄 수 있지 않겠는가, 부딪히고 깨지면서 길이가 자라고 품이 넓어지고 또 마음이 깊어가는 것 아니랴.미국에 있는 트위터 본사에는 거꾸로 붙은 글귀가 있다. ‘내일은 더 멋진 실수를 하자(Let’s make better mistakes tomorrow). 이는 바로 색다른 도전을 하자는 말이 아니겠는가.나를 기댈 곳이라고 생각하여 들고 왔다는 그녀의 목화 모종이 자라서 다행이다. 올해엔 어느 때보다 더 튼실하고 풍성한 목화송이를 맺어서 그녀 가족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어려운 이들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을 듬뿍 가져다주기를 희망한다. 누구든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만나는 뜻밖의 일들이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자산이 될 것이니.

연극 그녀가 산다 세번째 장기공연 다음달부터 시작

연극 ‘그녀가 산다’의 한 장면극단 창작플레이는 대표작 연극 ‘그녀가 산다’ 세번째 장기공연을 다음달 5일부터 9월1일까지 아트벙커에서 진행한다. 연극 ‘그녀가 산다’는 2017년 연말 뜨거운 입소문을 타며 관객몰이를 해왔던 코믹반전 스릴러다.이번 공연은 지난 공연 때의 아쉬운 점을 수정, 보완해 관객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이 연극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닮은 주인공 '단심'의 이야기와 웃음 폭탄이 터지는 색다른 코드의 코믹스릴러, 종잡을 수 없는 반전의 매력 등이 관람 포인트다.월급은 박봉, 밀리는 월세, 결혼 압박…. 이 시대의 청년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단심은 외롭다. 그런 어느 날 단심을 구제해 줄 남친의 등장. 하지만, 단심이의 꽃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누군가 단심의 방에 같이 살고 있는듯한 느낌, 집 월세가 밀렸다며 타박하는 주인 아줌마, 귀신을 볼수 있다며 집에서 굿을 하며 귀신잡기를 시도하는 주인 아줌마의 언니, 그리고 단심의 절친 정숙이, 연결고리라곤 하나도 없는 단심 주변의 인물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집의 누군가는 누구일까?작/연출은 이지영이 맡았고 배우는 이창건, 김하나, 박인경, 조영근, 오택완, 오민학, 이지민, 이승복, 권성윤, 최시내 등이 출연하다.정병수 창작플레이 대표는 “연극 ‘그녀가 산다’는 코믹과 반전, 스릴러가 매력으로 2017년부터 매년 장기공연을 진행 하고 있는 창작플레이의 대표적 컨텐츠이다”며 “올해도 관객분들께서 많이 찾아주시어 대구를 대표하는 연극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전석 3만 원. 문의: 053-421-2223.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효린 학폭 논란 사태 일파만파… 가요갤러리 "그녀 노래 수용하고 소비하지 않겠다"

걸그룹 씨스타 출신 가수 효린이 학폭(학교폭력) 논란으로 연이어 치열한 진실공방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가요 갤러리'에서 지난 26일 효린에 대한 공식 성명문을 발표했다.사진=가요갤러리 가요 갤러리 측은 "2010년 그룹 씨스타의 멤버로 데뷔해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효린은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눈물과 한을 굴절시킨, 사람들에게 희망, 도전, 노력, 성공을 전달한 가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녀에게 품었던 모든 감정을 빼앗겨 버렸습니다"라고 말했다.이어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라는 소속사의 입장은 한 줌의 희망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우리의 마음에 더욱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동안 많은 명곡을 만들어 냈던, 그녀의 호소력 깊은 목소리를 앞으로는 들을 자신이 없습니다. 가요 갤러리 일동은 더 이상 그녀의 노래를 수용하고 소비하지 않을 것임을 단호히 선언하는 바입니다"라며 입장을 남겼다.online@idaegu.com

‘스튜디오 드래곤’, 어비스·구해줘2·그녀의 사생활 등 화제작 모두 섭렵

사진=스튜디오 드래곤 홈페이지 CJ그룹 계열사인 '스튜디오드래곤'은 케이블, 지상파, 모바일 드라마와 베트남, 중국, 북미 등 글로벌 방영 드라마의 기획 및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는 드라마 기획 및 제작 전문 스튜디오로 지난해에는 미스터선샤인, 손 the guest,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등 흥행작을 제작했다.올해에도 자백, 그녀의 사생활, 어비스, 구해줘2 등 화제작은 모두 섭렵한 스튜디오 드래곤의 주가가 전일대비 -7.37% 변동된 74,200원에 거래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스튜디오 드래곤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주요 대기업 계열사 중 가장 높은 연봉 인상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흥행작이 계속 이어지면서 성과 인센티브가 반영돼 2017년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이 9400만원이었으나 2018년에는 이보다 33% 오른 1억 2500만 원을 기록했다.online@idaegu.com

소지섭의 그녀 ‘조은정’ 누구? 17세의 나이차이 불구하고…

사진=조은정 인스타그램 오늘(17일) 배우 소지섭의 열애 사실이 알려지며 '조은정'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화제다.이날 뉴스1과 디스패치에 따르면 게임 아나운서 출신 조은정이 소지섭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보도했다.조은정은 1994년생으로 소지섭과 17세 차이다.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 한국무용과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으며 2014년 게임 전문 채널 OGN을 통해 아나운서로 데뷔해 '롤챔스 여신'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두 사람은 SBS '본격연예 한밤'에서 처음 만난 후 지인모임에서 재회하며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소지섭의 소속사 피프티원케이(51k)는 "두 사람이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게 맞다"고 밝혔다.online@idaegu.com

미주통신

마가렛 미첼을 만나다 이현숙재미수필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이 쓴 소설로 미국의 남북 전쟁과 전·후의 재건 시대를 그려낸 대작이다. 스칼렛과 래트, 멜라니와 애슐리가 표현하는 각기 다른 사랑을 전쟁과 연결해 절묘하게 풀어냈다.책에는 남부 특유의 전통에 반발하는 한 여성이 독립된 존재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절망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 메시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필자는 중학생시절 이 책을 감명있게 읽었다.최근 미국의 동부지역인 조지아 주 존스보로의 ‘타라로 가는 길(Road to Tara) 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에는 가장 먼저 마가렛 미첼의 초상화가 눈길을 끌었다. 강렬한 눈빛과 단정한 자태가 작품 속의 두 여주인공, 스칼렛과 멜라니를 합친 분위기이다. 그녀의 젊은 시절 미모는 몽환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책상 위에는 명작을 탄생시킨 타자기도 전시돼 있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한다. 만지고 싶지만, 손을 댈 수가 없다.그녀의 남편은 다리를 다친 아내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다가 나중에 타자기를 내밀었다. 따분한 과학 서적을 빼고는 더 읽을 책이 없으니 차라리 당신이 책을 쓰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미첼 여사는 어릴 적부터 메모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전했다. 평소 문학뿐 아니라 당시 인물의 전기 등 많은 양의 책을 읽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들은 옛 남부의 역사와 남북전쟁을 기초해 소설을 쓰기로 했다.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1천 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완성된다. 책 속에는 당시 시대와 인물들, 옷에서부터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남부 사람들의 전통이 배경이 됐다.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당시 무명 작가의 소설이라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자 맥밀런 출판사 편집장에게 한 번만 읽어 달라며 세 번의 전보를 연이어 보낸 집념의 여인이다. 마차를 끌고 남군과 북군 사이를 헤치며 타라로 돌아가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스칼렛이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한다.진열된 세계 각국의 번역본 중에 한국어로 된 것이 자석처럼 눈을 잡아끌었다. 나라에 따라 표지의 디자인과 스칼렛의 모습이 다르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193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빅터 플레밍이 감독하고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스칼렛 오하라는 예쁜 편은 아니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에 비해 영화 속의 비비안 리는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아름답다.야만스러울 만큼 붉은 땅이라고 했던 타라의 집 모형이 있다. 각국의 영화 포스터가 진열돼 있고, 출연진들의 사진과 인형들이 실제 크기부터 미니어처까지 박물관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개미허리를 돋보이게 할 때 입었던 판탈렛과 커튼을 뜯어 만든 녹색 벨벳 드레스를 비롯해 많은 의상이 전시됐다. 인종차별을 한다며 미첼 여사를 구설에 오르게 한 흑인 노예 매미(번역본에서는 할멈이나 유모로 나옴)에 관한 스토리가 한 코너를 장식했다.미첼 여사는 자신의 재산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2차 대전에 적십자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그녀가 낸 돈으로 군함 두 척을 만들었다. 진수식 때 찍은 사진을 보니 남자들 사이에 파묻힌 작은 여인, 그러나 활짝 편 어깨가 그들을 당당히 누르고 있다. 무명으로 흑인 의대생들에게 장학금도 지원했다. 초상화에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면 적십자 핀이 꽂혀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 없는 메시지를 아직도 전하고 있다.그녀는 박물관 인근 오클랜드 묘지에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다.아쉬움을 남기며 박물관을 나왔다. 눈에 담은 것이 많아서 잠시 그 앞에 놓인 작은 벤치에 앉았다. 꽃가지를 흔드는 봄바람에 마음을 식히는데 바로 옆에 기차역이 보인다. 여기에서 기차를 타면 타라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그녀의 표현대로 붉은 들과 싹트는 푸른 목화 그리고 상쾌한 황혼을 만날 수 있을까.‘모든 것은 내일 타라에서 생각하기로 하자.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뜰 테니까(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마가렛 미첼. 시련이 밀려와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강인한 여성을 만났다. 내일, 소중한 내일을 이곳에서 얻어 간다.

다문화세상

임미애꿈이 영그는 사과나무 며칠 전 알고 지내던 필리핀 새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와 인연이 된 건 지역 봉사단체에서 회원들과 다문화 가정간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행사에서였다.그녀는 서툰 한국말로 “언니. 나 필리핀 가요. 남편이 가을 일 끝나면 보내준다고 했는데 봄 일로 바빠지기 전에 엄마한테 가요.”결혼 9년 차 새댁인 그녀는 사과농사를 짓는 남편 따라 봄이면 꽃따기, 적과, 잎소재, 사과작업, 겨울이면 전지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가지 줍는 일까지 어느 하루 바쁜 일상을 보내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나무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일이 많지 않아 그럭저럭할 만했는데 나무가 다 크고 나니 해마다 일은 늘어났고, 저온창고에 넣어 둔 사과를 다 팔아도 이렇다 하게 용돈도 한번 챙겨보지 못했다. 그러던 재작년 그녀는 남편에게 서운한 맘을 얘기했다.“밭 귀퉁이에 있는 저 나무에서 달리는 사과는 나 줘요.”“왜?”“나도 농사 끝나면 나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요.”며칠 동안 일을 따라 다니며 졸라댄 덕에 남편은 한 귀퉁이에 있던 사과나무 여섯 그루를 색시 몫으로 주었고 어른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섯 그루는 이 집 며느리 몫이라고.그때부터 그녀는 밭에 가는 게 신이 났다. 일 끝나고 집에 오기 전에는 한 번 더 둘러보고, 꽃이 혹시 다른 나무보다 덜 나오지는 않을까 신경을 썼고, 적과도 더 정성스럽게 했다.일을 하면서 남편에게 사과나무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무엇이 나무 생장에 더 좋은지 꼼꼼히 챙겼다. 봄 가뭄이 심해지면 남편보다 더 걱정했고 수확을 앞두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행여 사과가 떨어질까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그제서야 시어른들은 며느리가 진짜 식구처럼 여겨졌다. 사는데 별로 재미가 없어하던 그전과는 다르게 며느리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돌았다. 아침 일찍 먼저 모자를 챙겨 쓰고 나가는게 기특하기만 했다. 사과나무 여섯 그루의 힘은 참으로 어마어마했다.그렇게 지은 작년 농사가 가뭄 탓에 알이 좀 작기는 해도 수확량은 제법 되었다. 가격도 그전 해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라 큰 돈은 아니어도 며느리 몫을 챙겨 주었다. 며느리는 자기 나무에서 딴 사과가 몇 상자였는지 흠집 사과는 양이 얼마였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이제 그 돈과 남편이 끊어준 비행기 티켓을 들고 필리핀 친정 부모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선물도 챙겼다고 한다.맏딸인 자기가 딸 노릇, 언니 노릇 제대로 못 했는데 이번에 집에 가면 제대로 효도하고 오겠다며 들떠 있었다. 언제 돌아올 계획이냐 물었더니 “사과 꽃 피기 전에는 올 거예요”라고 대답했다.아마 작년 가을에 사과 다 따고 나무에 거름을 충분히 넣었기 때문에 올해 사과는 작년보다 더 좋을 거라고 자랑까지 곁들였다.필리핀 친정집에 앉아 있는 그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자기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그녀는 열심히 얘기할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도 자기 힘으로 마련한 것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작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학교생활을 얼마나 잘하는지, 어쩌면 자기가 돌아가야 집안 농사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그런 그녀가 고맙고 대견스러워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을지 모른다. 나 역시 그녀가 고맙고 대견하다. 그녀는 이제 당당한 농부다.27년 전 농촌에 대해 아는 것 하나도 없이 남편따라 농사지으러 내려왔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시어머님과 대화를 할 수 없어 “예? 예?”를 입에 달고 살았고, 들판에 널린 봄나물을 보고도 반찬거리는 냉장고 안에서만 나온다고 믿어 밥상에 밥 한 그릇과 김치밖에 올릴 줄 몰랐던 내 모습이나 그녀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필자가 사는 인근 면에서는 생활개선회 면회장이 결혼이주여성이 당선되어 지난 주에 이·취임식을 했다. 다들 새 회장을 두고 한마디씩 했다. “참 부지런해, 인사도 잘하고, 얼마나 억척같은지 또순이가 따로 없다니까….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중략)/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중략)/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ㅡ 계간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번역가, 언론인, 배우였던 ‘탄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김별아의 소설에도 조명된 바 있으나 이 시는 그녀의 기막힌 삶의 내막을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불행한 생은 어머니가 평양기생 출신 소실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행의 발단은 도쿄 변두리 숲에서 산책하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하면서부터이다. 그 충격에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한 것으로 왜곡 보도했다.김동인은 소설에서 ‘더러운 여자’ ‘남편 많은 처녀’라고 조롱하는 등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양 그녀를 묘사했다. 당시 남성 문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그녀는 삶을 추스르고 재기할 기회를 잃고 내동댕이 쳐져 풍화되어 잊혀졌다. 여비가 없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고 피폐해졌다. 비참한 말로를 걷다가 1951년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어두운 생을 마감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쯤은 ‘진혼’이 되어 그 ‘조선’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 것은 아닐까.

권순진의 맛읽게 읽는 시-그 안마 방/ 정병근

그 안마 방/정병근 지하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둠이 깊은 우물처럼 출렁이고 거기 한 늙은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중략) 어둠 속에서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아 죄 많은 한 몸을 주무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렸던 한 몸이 한 몸을 만난 거지요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났고 숱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돌아온 것입니다 때늦은 약속을 지키러 말입니다 천년만의 해후! 아,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녀가 영비천 하나를 따서 쓱 내밉니다 천연두 앓은 곰보처럼 얼굴을 숙입니다 나도 그녀의 얼굴을 외면합니다 종소리 나는 문을 열고 우물 속을 나옵니다 다시 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략) - 시집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사, 2014)...................................................................안마가 우리 시대에 불온한 성적 코드로 자리매김 된 지 오래다. 현행법으로 안마는 안마사 자격증을 가진 시각장애인에게만 주어진다. 이는 맹인의 독점적인 직업으로 보호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마련된 법적 근거이다. ‘안마방’으로 일컫는 ‘안마시술소’는 원래 안마를 해주는 곳이지만, 지금은 변칙 영업이 주를 이루어 진짜 맹인안마사에 의해 순수한 안마만 받는 곳은 안마시술소라 그러지 않고 안마원이라고 한다. 사실 1980년 이후 성매매 산업이 확장되고 신종 장르들이 속속 생겨난 것은 전두환 정부 때 3S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예전에는 진짜 맹인안마사의 출장도 왕왕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고인이 되신 구상 시인께서 1970년대 대구에 오면 가끔 맹인안마사를 불러 안마를 받곤 했는데, 1980년대 이후 그런 호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고 했다. 출장안마가 성매매 수단으로 악용되다가 2004년 성매매특별법 발효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안마방은 남성들의 성 구매 주요 경로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부터 장안동에 대거 들어선 안마방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가 될 만큼 윤락 관광의 구심점 노릇을 톡톡히 했다.가령 중국이나 동남아 여행에서 대개 경험하는 간단한 발마사지조차도 뭔가 은근한 기대를 갖는다든지 야릇한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오래 전 어머니와 이모님이 중국여행에서 난생처음 발마사지를 받고 당시 67세인 이모는 뭐가 켕겼는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니, 황 서방(이모부)한테는 발마사지 받았다는 얘기 하지 마” “어쩌다 말이 툭 튀어나왔어도 남자가 해줬다는 소린 마” 그랬다는 것이다. 그만큼 안마는 부위가 어디든 무언가 색다른 서비스를 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남성들이 안마방을 찾는 이유가 그것이다.기분 좋게 안마를 받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오랜 세월 기다렸던 한 몸이 한 몸을 만나’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났고 숱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돌아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쩌면 그 숙련된 ‘전문가’에게 자칫 사랑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치 전생의 약속만 같아’ 오래 그녀를 기억하듯이 ‘아,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도 딱 한 번 우연히 안마방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한 번도 가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한 번만 가기는 힘들었을 그곳을 다시 찾지는 않았다. 으슥한 곳에 주차만 해도 삐딱하게 보는 세상이다. 공인이든 아니든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장소엔 접근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까닥하다간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삶, 그의 꿈(78)패션디자이너 김선자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라는 브랜드를 열고 패션디자이너로서 36년간 활동했다. 뉴욕과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100여 차례 컬렉션을 열면서 대구 패션의 발전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그의 패션은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대적 감각을 선도했다. 특히 드레스는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세련미를 고루 갖춰, 뉴욕 현지 언론으로부터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2008년 6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김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옷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열정만으로 시작한 디자이너의 길김선자는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아버지 김형식과 어머니 김순이 사이에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작정 옷이 좋아 부모 몰래 양재 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을 정도다.여고시절 경북대 교정을 찾은 김선자(왼쪽 2번째).소재가 풍부하지 않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낡은 포플린 셔츠의 컬러를 떼어내고 변형시켜 새로운 옷을 만들거나, 구제품 시장에서 옷을 구해다가 밤새 디자인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패션에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미스 김테일러’ 매장을 첫 선보인 1971년. 의상실에서 서 있는 이가 김선자.대구시 중구 동문동에 있던 패션 샵에서 일할 무렵 그는 남편 임창곤을 만나 결혼한다. 결혼 후 1년 만인 1971년 중구 동문동 시청 부근에 ‘미스 김테일러’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오픈했다.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내심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 사근사근하거나 남에게 이런저런 옷을 권할 만큼 사교적이지도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리자마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우아한 여성미를 단순화하고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옷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품질 소량생산 전략도 적중했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고집이 고객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히지 않았다.◆승승장구하다패션쇼 후 모델들과 함께 한 김선자.미스김테일러는 조금씩 번창해 갔다. 1973년 한·미 국제부인회 초청 쇼를 시작으로 1974년 신세계백화점 가을 겨울 컬렉션에 참여했고 1983년에는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개인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대구에서 패션쇼를 할 만한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경주의 호텔에서 쇼를 가졌다. 대구에서 그녀의 패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자동차가 행렬을 이뤄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호응이 좋아 1985년 앙코르 쇼를 가지기도 했다.그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패션의 흐름을 읽는 직관력이 있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은 타고난 감각과 운’이 작용한듯하다. 김선자는 기존의 중년층 고객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품위 있는 스타일의 옷을 제작했고, 여기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트렌디한 젊은 감각의 옷을 만들어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하게 했다.세일을 남발하지 않고 오랫동안 고객과 쌓은 신뢰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점 윈도에 한 번도 세일한다고 내건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 최고라는 자존심으로 일을 했다.자신의 패션쇼를 보러온 엄맹란과 이덕화와 함께.1987년 파리국제페스티벌 출품을 계기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 중국 청도패션쇼, 미국 애틀랜타 패션쇼 등 국제 행사에 참여했다. 90년대 중반에는 1년에 6회 이상의 패션쇼를 미국과 대구, 서울에서 열며 전성기를 맞는다.◆신사옥을 짓다1973년 동아백화점 앞 동문동으로 가게를 옮긴 그녀는 1983년 동인호텔 뒤편 중구 공평동에 신사옥을 짓는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패션 샵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기성복과 맞춤복을 함께하는 복합매장으로 꾸며 고객들을 모았다.그녀의 샵은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여성들로 항상 넘쳐났다. 김선자 패션을 입어야 대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대구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과 사교 방법으로 자신의 매장을 고급스러우며 우아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가게를 오픈했다. 당시 청담동에 가게를 열자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구가 본점이고 서울은 분점일 뿐이다’고 강조했다.롯데월드 매장에 입점할 때 입점 조건으로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반대했다. 대구에서 30년 정도 대구시민을 위해 패션을 했는데 서울매장에 입점하기 위해 본점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입점을 했지만, 그녀는 늘 당당했고 시골 사람을 쉽게 보는 서울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옷을 만들었다.다음 해인 1994년 대봉동으로 사옥을 옮긴다. 그녀는 이곳을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경남 센트로 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부지로 편입돼 2007년 길 건너편으로 다시 사옥을 옮기게 된다.◆대한민국 톱 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국제로타리 초청행사 패션쇼에서 인도출신의 라제드라 배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1995년 그녀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회원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회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1996년 스파서울컬렉션에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구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지방에 있다고 해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결과는 성공이었다. 또 그해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그녀의 옷을 입고 출연하자 ‘황신혜가 입은 옷’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KBS‘열린 음악회’ 사회자 황수경씨가 그녀의 드레스를 자주 입어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황수경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그녀의 서울패션쇼에 빠짐없이 나타나 축하해주었다. 탤런트 김수미, 강부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수미가 어려울 때 김선자씨를 찾아와 같이 위로를 나누며 자매처럼 우정을 이어갔다.김선자는 섬유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협회 회원, 세계패션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던 박윤수, 진태옥, 한혜자 , 설윤형, 박항치 등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한혜자씨는 여행을 할 때면 룸메이트를 할 만큼 친밀했다.이 당시 그녀와 함께 대구 패션을 이끈 박동준씨는 “서로가 경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가 대구 패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구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들 둘은 동지였으며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있어 대구 패션은 꽃을 피웠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대학강단에 서다1997년 김선자는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를 두고 말도 많았고 뒷이야기도 무성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었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7년간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도시의 미래를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히기도 했다.1등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을 가진 그녀는 강의를 통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한사람이라도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패션행사로 인해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애썼다. 뉴욕에서 패션쇼가 있었던 2001년 9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탄 덕에 테러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모처럼 가족이 함께 했다. 오른쪽부터 큰 아들 내외. 둘째아들. 김선자 부부. 딸 내외.김선자는 디자이너로 성공했고 2남 1녀 아이들을 잘 키웠다. 큰아들은 삼성의 임원이 됐고 사진을 전공한 둘째 아들은 정교수가 됐다. 그녀는 자기 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디자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다.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할 때는 봄이면 모든 일을 접고 직접 가서 옷이나 침구를 손수 갈아줄 정도였다. 딸은 미술대학을 나와 파리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국내서 패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같은 길을 가기를 내심 원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모두가 부러워한 성공을 이뤘던 그녀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7년 2월 패션 세계그룹 한국협회 회장을 맡아 대구 디자이너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으나, 병마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와 행운을 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 그녀는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고맙심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내 아내 김선자남편 임창곤(82.전 한국패션센터 이사장)씨는 아내 김선자를 ‘패션만 알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해내는 아주 독특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제자가 그린 김선자 캐리컬처.해야 할 일이면 혼자서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 이러한 고집과 집념이 대구 패션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자기 일에는 아주 철저하고 고집스러웠지만 집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의 모난 기질도 잘 참아주었으며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자녀들의 의견을 따랐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며 생활했다.그녀는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패션은 아내가 알아서 하고, 나머지 비즈니스는 남편이 맡는 식이다. 요리할 때도 간섭이 싫어 부엌문을 닫고 혼자서 요리책을 펴놓고 음식을 만들 정도였다.일벌레인 그녀는 TV 볼 시간이 없어 배우 김수미씨가 대구가게에 왔을 때도 그녀의 얼굴을 몰라 ‘김수미씨 계십니꺼’ 라며 찾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김순재 언론인김선자 연보1947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출생1971년 ‘미스 김 테일러’ 패션 브랜드 설립1973년 한미 부인회 초청패션쇼. 신세계 대구 오프닝 기념 쇼1983년 중구 공평동 동인호텔 뒤편 사옥 오픈1985년 김선자 개인 컬렉션(신작 발표회)1988년 파리, 뉴욕 프레타포르테 출품1990년 섬유와 예술의 만남 전1993년 강남구 청담동 서울매장 오픈1994년 중구 대봉동 사옥 오픈1994년 중국 청도 패션쇼. 애틀랜타 패션쇼1996년 S.F.A.A 서울 컬렉션 참가1997년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2005년까지)2000년 밀레니엄 여성 경제인 패션 대전 유명디자이너 20인 선정2001년 뉴욕컬렉션 참가2003년 제13회 한국섬유 대상 패션디자인 부문 수상2007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회장 취임2007년 중구 대봉동 신사옥 오픈2008년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특임교수2008년 10월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달을 보며 빵을 굽다

달을 보며 빵을 굽다쓰카모토 쿠미/더숲/212쪽/1만4천 원일본의 작은 도시 단바에 달의 주기에 따라 20일은 빵을 굽고 나머지 10일은 여행을 떠나는 ‘여행하는 제빵사’가 있다. 점포도, 직원도 없는 빵집을 운영하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빵을 만들고 여행을 떠난다. 저자가 그 주인공이다.저자는 세 가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함께 빵을 만드는 생산자들과의 인연, 자신이 일하고 살아가는 단바에 대한 애정, 그리고 빵을 만드는 의미.“빵을 먹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훨씬 좋다”는 그녀는 20일간 빵을 만들고, 10일의 여행 기간에는 빵에 쓰는 모든 식재료의 생산자들을 직접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재료와 빵의 궁합, 그 계절에 가장 맛있는 식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질 좋은 빵을 궁리한다. 또한 생산자의 지속적인 수입을 함께 고민함으로써 자신과 그들이 오래도록 빵 만드는 일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저자가 운영하는 빵집 히요리 브롯은 약 5천 건 이상의 예약이 쇄도해 무려 5년을 기다려야 빵을 받아볼 수 있는 빵집이 됐다.저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답게, 작지만 매일의 행복을 만들어나가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더 많은 수입보다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만든 맛있는 빵만큼이나 커다란 울림을 전해준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