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46) 경명왕

경명왕은 신라 하대 다시 시작된 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이었다.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54대 왕좌에 올라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신라를 이끌었다.경명왕대에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또 궁예의 침략에도 상당히 많은 고을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면서부터 경명왕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정책을 추진했다.결국 경명왕대에 신라는 경상도 지역 정도의 영토를 가진 열세의 나라로 전락했다. 내부 반란에 이어 지속되는 외세 침략을 감당하기에 신라의 국력은 이미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도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기는 등으로 향락에 빠져 신라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왕실 스스로 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형세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경명왕이 죽기 1년 전에는 경산부 등의 신라 장군에게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정들이 역사 기록으로 전하기도 한다.◆삼국유사: 경명왕제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은 무인년(918)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7년은 경진년(920)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간이나 했다.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뜰로 나와 달리다가 벽으로 다시 들어갔다.◆경명왕경명왕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헌강왕의 둘째 딸 의성왕후다. 경명왕은 동생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는데 위응이 나중에 55대 경애왕으로 즉위했다.경명왕은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국력이 극심하게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경명왕 2년에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의 압박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경명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하며 후백제를 물리치는데 군사적 도움을 받으면서 고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이러한 경명왕의 국정 운영 방향에 따라 변경의 장군들은 고려에 앞다투어 항복해 신라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심지어 경명왕은 경산부 양문 장군 등에게 고려에 항복하도록 명령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경명왕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매사냥을 즐겼다. 삼국유사 등에는 경명왕 때에 사천왕사에 있던 벽화 속의 개가 짖고, 흙으로 빚은 신상의 활줄이 끊어지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열흘 동안이나 거꾸로 서는 등의 천재지변과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반면 경명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시도하려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했다.역사서에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밀양 박씨 족보에 의하면 경명왕이 석씨와 결혼해 밀성대군, 고양대군, 속함대군, 죽성대군, 사벌대군, 완산대군, 강남대군, 월성대군 등 여덟 아들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명왕의 실정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화랑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며 나라 살림살이의 주체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그러나 즉위 2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어수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신라는 진성여왕 당시 위홍의 정치에 이어 김예겸의 손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왕권은 사실상 실추되고 권위를 잃었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신덕왕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왕위 선양도 모두 예겸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입김으로 진행되었다.경명왕은 이렇게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실권 회복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전쟁 등으로 나라는 저항의 힘을 잃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경명왕의 측근세력 위주 인사정책으로 왕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세력들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 후백제나 고려에 투항해 신라의 국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추어졌다.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투어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했지만 성사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후삼국의 형태에서 신라 왕실은 군사력을 키워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나라의 영토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명왕은 즉위 초기 1~2년을 지나면서 귀족들과 대신들의 힘을 규합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경명왕은 오히려 매사냥에 나서는 취미활동을 즐기는 등으로 나랏일을 돌보는데 태만했다.경명왕시대의 신라는 고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경명왕의 정책 중에도 가장 큰 실정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자연재해도 잇따라 일어났다. 당시 중국과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기온저하, 가뭄 등으로 기후가 변화하면서 자연재해로 독자적인 생산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실을 비롯한 왕경지역에서는 지방의 물자 유입이 필요했지만 지방세력들의 투항으로 이마저 어려웠다.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경명왕은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압박해오자 고려 왕건에게 아찬 김률을 사신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이 “신라에는 장육존상과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옥대 등의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옥대는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김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돌아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황룡사의 노승만이 이를 알고 전해주었다.경명왕은 옥대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보물의 힘이라는 것이라 믿고, 비밀리에 보물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결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종교적인 힘을 구하려다 견훤의 칼에 나라를 잃게 됐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5) 효공왕

신라 제52대 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왕궁 밖에서 자랐다. 진성여왕이 이를 전해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명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효공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7세까지 15년간 재위하는 동안 군주로서 제대로 기능을 펼쳐보지 못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후반기에는 여자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아 신하가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약해졌다.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일으키고, 침략해와 신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었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즉위했다. 신덕왕은 박씨였지만 헌강왕의 딸과 결혼해, 경덕왕가의 사위라는 신분에 힘입어 국인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대에 이르러 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한 기록이 전한다. 5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승영과 위응을 낳아 54대와 55대 경명, 경애왕으로 오르게 함으로써 신라하대의 박씨왕가 세습을 재현했다. ◆삼국유사: 효공왕제52대 효공왕 때인 광화 15년은 임신년(912)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에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또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 하면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간이나 서로 싸웠다. ◆효공왕과 신덕왕-효공왕은 895년 진성여왕 9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897년 진성여왕 11년에 신라 제52대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경문왕 이후부터 왕권을 둘러싸고 두텁게 포진하고 있던 화랑세력들에 맞선 예겸 등의 세력들이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이찬 예겸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여 더욱 세력을 굳혔다. 왕실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알게 모르게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어린 효공왕은 실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당시 견훤은 완산주에 터전을 잡고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신라 땅을 꾸준히 침략해 영토를 확보했다. 궁예도 이 시기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라 나라이름을 짓고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궁예 또한 남하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의 입지는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차제에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신하들이 궐기해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신라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 후손으로 박씨에 이름은 경휘다. 912년 효공왕에 이어 즉위해 917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아들들이 경명왕, 경애왕으로 대를 잇게 해 신라말기 박씨 왕가를 이루었다. 신덕왕은 엄연히 박씨 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예겸의 눈에 들어 예겸이 의자(義子)로 삼아 사위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잇도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맏사위이자 화랑이었던 효종에 비해 왕위를 차지하기에는 입지가 한참 밀렸다. 그러나 의부였던 예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하는 덕을 누렸다. 신덕왕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지진과 때아닌 서리, 해일 등의 자연재난이 다양하게 많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도 잦아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다. ◆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경주시 성건동 남천의 끝부분에 있었던 절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도화상이 과거칠불 중의 제5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 지명했던 곳이다. 선덕여왕 때에 두두리 라는 도깨비 무리가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한 곳으로 전한다. 영묘사는 사천왕사를 지었던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금당의 장육존상을 비롯해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양지의 솜씨였다. 영묘사 장육삼존불은 경덕왕이 개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이 절로 옮겨 안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지금 흥륜사터로 알려지며 사적 15호로 지정된 경주시 사정동 일대에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고,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최근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영묘사가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신덕왕 때에 영묘사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소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삼국시대의 도래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효공왕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간택하게 하며 실질적인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던 사람은 김예겸이다. 김예겸은 인물이 훤칠하게 잘생겼고, 키도 6장의 장신이었다.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지도자로 군림했다. 예겸은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예겸은 헌강왕이 사냥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 진성여왕에게 천거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900년을 전후해 견훤과 궁예가 서쪽과 북쪽에서 나라를 세워 후백제, 후고구려라 칭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를 압박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효공왕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세력들은 하나 둘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투항하며 살길을 찾아 떠났다.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효종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효종보다 명분으로 한겹 접어야 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나라를 구할 사람은 화랑도뿐이다”며 효종을 부추겨 전쟁의 선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4) 진성여왕과 거타지

신라 51대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11년에 오빠 헌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6개월 만에 죽었다.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동생, 숙부인 위홍과 부부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부적절한 관계였으리라는 설도 있다. 위홍이 죽은 이후 진성여왕은 젊은이 2~3명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음란하게 놀아나면서 그들에게 국정을 맡겨 정치가 혼탁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으로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경문왕으로부터 50년간 박씨 왕가가 다시 시작된 53대 신덕왕 이전 효공왕까지 경문왕가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경문왕이 화랑과 불교 등으로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헌강왕대에 잠시 번영을 이루었으나 결국 분열과 반란으로 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 버렸다.신라 천 년 사직을 기울게 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는 진성여왕. 삼국유사가 왕거인과 거타지 두 설화를 기록하고 있는 진성여왕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진성여왕과 거타지-왕거인: 제51대 진성여왕이 조정에 나간 지 몇 년 되었을 때였다. 유모 부호부인과 그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사람이 신하로서 총애를 받고 권세를 마구 휘둘러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왕과 못된 신하들이 이를 보고는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지었겠느냐”고 의심했다. 그리고 왕거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하늘이 감옥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다.왕거인의 시는 “연나라 단이 피 흘려 우니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이 슬픔을 머금으니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네/ 이제 내가 길을 잃음이 예와 같으나/ 하늘은 어쩐 일로 좋은 소식 주지 않는가”라고 해석된다.다라니는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가”로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사람의 소판을 말하는데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총애받는 신하를 말하고, 부이는 부호부인을 말한다.-거타지: 진성여왕 때 아찬 양원은 왕의 막내아들이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백제의 해적이 뱃길을 막고 있다고 들었다. 활 쏘는 병사 50만을 뽑아 따르게 하였는데 배가 곡도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었다. 열흘 가까이 머무르게 되자 공이 근심스러워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섬 안에 신의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된다고 합니다”고 했다.연못 위에 제수를 갖추었더니 연못의 물이 한길 높이나 치솟아 올랐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공에게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두시오. 순풍을 만나 가실겁니다”고 했다.공이 군사 가운데 거타지라는 신하를 남겨두고 떠났다. 순풍이 홀연히 일어나니 배가 나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거타지는 홀로 섬에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 “나는 서해의 신이오. 매일 사미승 하나가 해 뜨는 시각에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암송하며 이 연못을 세 바퀴 도는데,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오. 그러면 사미승이 우리 자손을 잡아 간장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하나뿐이오. 내일 아침 반드시 또 올 터이니 그대가 쏴 주시기 바라오.”거타지는 숨어 엎드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해가 떠오르자 사미승이 과연 오는데 이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고 하였다. 그때 거타지가 정확히 활을 쏘자 사미승은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하며 “그대의 은혜를 받아 내가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내 딸로 아내를 삼기 바라오”라고 했다.노인은 자기 딸을 꽃가지 하나로 변하게 만들어 품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두 마리 용에게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들이 탄 배까지 가도록 하였다. 게다가 그 배를 호위하며 당나라 국경에 이르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 배가 두 마리 용의 지킴을 받으며 오는 것을 보았다.보고받은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사신들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들일 것이야”하고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혀 잔치를 베풀어주고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상을 주어 보냈다. 귀국한 다음 거타지는 꽃나무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성여왕의 사랑진성여왕은 오빠인 정강왕의 유언으로 신라 세 번째 여왕에 즉위했다. 22세가 되던 해였다. 여왕은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의 도움으로 무사히 왕권을 이양받았다. 아버지 경문왕이 주력세력으로 육성했던 화랑 조직도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으로 경문왕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정권의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권력자로 모든 나라의 살림살이에 깊숙이 관여했다. 헌강왕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상대등의 지위로 모든 국정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왕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아내가 있었지만 조카였던 진성여왕과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진성여왕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위홍의 아내, 숙모가 직접 키웠다. 워낙 가까이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여서 위홍이 이성적으로 조카를 만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알아차린 위홍의 아내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같은 부인으로 지냈다.진성여왕과 위홍은 3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진성여왕 3년에 위홍이 죽자 나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왕은 직접 나라를 운영해보지 않았다. 위홍의 빈자리에 화랑 홍기와 영조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겼다.홍기와 영조는 젊은데다 직접적인 국정 운영 경험이 없어 인사는 물론 군사, 재정 등 모든 분야에 개인적인 연고와 정실 위주로 처리했다. 진성여왕이 직접 나라를 경영해 본 경험이 없었고, 주변의 젊은 층들로 구성된 대신들조차 경험이 일천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실정이 이어지면서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위홍의 반대세력이었던 예겸은 아들 경휘를 앞세워 내정 깊숙이 관여하면서 여왕의 퇴진을 추진했다. 예겸은 6두품 중심의 귀족들과 연대해 신라말 정치구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국정운영을 위한 지침서 ‘시무 10여조’를 지어 바치기도 하면서 중심세력의 관심을 끌었다.진성여왕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오빠 헌강왕의 아들 ‘요’ 에게 왕위를 인계해주고, 신라 천년 왕조 최초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는 기록을 남겼다. 여왕은 김요의 척추 두 마디가 돌출된 특이한 경문왕가의 신체적 특징을 확인하고 태자로 삼았다가 그를 왕위에 올렸다.진성여왕 때에도 당나라와는 활발하게 교역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와 고려가 국가적인 형태를 갖추고 견제하는 바람에 신라는 영토적으로도 위축된 상황이었다. 뱃길도 완도 등의 가까운 길은 백제에 막혀 백령도를 이용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를 부지런히 오가며 나라를 위한 일에 공헌했다.진성여왕은 직접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황룡사에서의 법회 등을 통해 나라의 안녕을 위한 일을 도모했다. 또 효녀 지은이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곡식을 하사하는 등으로 백성을 돌보는 선정을 베푼다는 여론 형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도 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3) 처용랑과 망해사

헌강왕은 신라 하대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해마다 풍년이 들고, 거리에는 노랫소리 그치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이는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세력과 고승들을 동원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결실이 나타났던 덕이라는 평이다.헌강왕 당시에는 많은 신이 현신했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을 만난 것과 남산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따라 춤춘 일, 금강령에서 북악의 산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경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국운이 다함을 신들이 나타나 경고를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상서로운 일로 잘못 해석하고 더욱 나태해 결국 나라가 망했다. 신들의 춤을 따라 추었던 헌강왕 시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제49대 헌강왕 때였다.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연주와 노랫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주었다.이때 대왕이 개운포로 놀이를 나갔다. 왕이 가마를 돌려 돌아오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들려는 참이었다. 홀연히 운무가 가득하여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이는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만 풀리겠습니다”고 했다.이에 신하에게 명령해 용을 위해 가까운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운무가 걷히며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불린다. 동해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가마 앞에 나타나 덕을 칭송하면서 춤추고 곡을 연주했다.그 아들 하나는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했는데, 처용이라 불렀다. 왕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고자 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이 이 여자에게 푹 빠져 사람으로 변장하고 밤에 그 집에 들어와 남몰래 함께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이르러 침상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대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세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려 했다.왕은 돌아온 다음, 영축산의 동쪽 기슭이 좋다 하여 절을 짓고 망해사라 불렀다. 신방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또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이다.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는데 곁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만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서서 춤추니, 왕이 손수 따라 춤을 추며 형상으로 보여주었다.신의 이름을 상심이라고도 하므로 지금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면서 임금이 춘 상심 또는 임금이 춘 산신이라 한다. 신이 나타나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 본 따 기술자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여주었으므로 상심이라고도 하였다. 또는 상염무라 하는데 이는 곧 그 모양을 보고 지은 것이다.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옥도검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지백급간이라 불렀다.어법집에 “그때 산신이 춤을 추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노래한 것은 나라 안에 지혜롭게 다스리는 자들이 미리 알고 도망을 가 도읍이 무너질 것’을 이르는 바였다”고 한다.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탐락에 극심하게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다시 쓰는 삼국유사: 헌강왕의 정치헌강왕은 15세에 즉위해 철이 없었다. 단지 성격이 호쾌하고 활달해 화랑들과 무예를 즐기며 사냥과 놀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는데 게을리했다.황성숲에서 사냥을 즐겼다.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의 미모에 빠져 그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여인이 그곳에 기거하게 했다. 이 여인이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53대 신덕왕의 왕비가 되어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을 낳았다. 신덕왕이 박씨 성을 가졌으나 김씨 왕가의 사위로, 결국 김씨 왕의 세습이 이어진 셈이다.또 헌강왕이 배를 타고 개운포로 나들이를 갔다가 해적의 난을 만났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도 상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헌강왕은 인도 상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어 개운포에 인도 상인들을 위한 전용 상가를 개설하게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헌강왕은 또 틈만 나면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함께 즐기기를 좋아했다. 왕궁과 가까운 남산으로 나들이도 잦았다.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용포가 젖도록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하곤 했다.헌강왕이 20세를 맞아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고 흥이 지나치자 남산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이때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헌강왕을 숨어서 따르던 화랑들의 힘에 제압됐다.헌강왕은 유흥에 빠져 있었지만 주변에 실력이 뛰어난 화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경문왕의 뜻에 따라 그들을 중용해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었다. 이어 경문왕 때부터 장려해왔던 국학을 발전시켜 6두품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해 신흥세력의 지지 또한 두텁게 받아 강한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아버지 경문왕이 불교를 장려하며 고승들을 각 고을로 배치해 백성을 두루 교화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화랑과 6두품 신흥세력들을 고루 등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중앙집권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헌강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평성대한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복된 군주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10여 년에 이르는 문란한 정치로 훌륭한 기반도 급격하게 기울어 나라의 패망을 막을 수 없었다.나약했던 동생이 50대 정강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여동생 김만이 51대 진성여왕으로 등극해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결혼했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화랑 두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듯 스스로 물러났다. 이러한 신라의 왕권이 실추되는 시기를 틈타 후백제와 고려가 세력을 키웠다. 신라는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2) 경문왕

신라 48대 경문왕은 화랑 출신으로 헌앙왕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 행운아라고도 할 수 있다. 경문왕대에 이르러 원성왕부터 피비린내를 풍겼던 왕권을 둘러싼 전쟁은 잦아들었다.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왕좌는 경문왕부터 다시 50여 년간 그의 직계들이 차지했다. 물론 헌안왕과 경문왕도 원성왕의 직계 후손이다.경문왕은 861년부터 875년까지 14년간 왕좌에 있었지만 남아 있는 업적이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그의 왕릉조차 비정되지 않아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그러나 최근들어 경문왕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불법을 확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전개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경문왕은 왕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고, 숭복사를 중창했다.경문왕은 또 동화사에 민애왕의 추숭 복업을 위한 석탑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당시 동화사 주지 심지를 끌어들여 진표의 미륵신앙과는 또 다른 미륵신앙을 수용하려 했다. 왕은 동화사 심지대사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한편 지방의 선종과 선승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도 적극 펼쳤다. 왕은 선승 낭혜무염을 국사로 임명하고, 그를 상주로 내려 보내 불만세력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화랑이 왕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기 위한 노력은 그가 화랑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수련했던 심신의 단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분제도 철폐를 비롯 화랑들의 중앙무대 진출, 불교정책을 통한 왕권강화와 안정을 도모했던 경문왕의 길을 돌아본다.◆삼국유사: 경문왕-화랑 응렴 왕이 되다: 왕의 이름은 응렴인데 열여덟 살에 국선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 헌안대왕이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며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고 물었다.응렴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고 했다.왕은 그 말을 듣고 그의 어진 성품을 알아보고 “내게 딸이 둘 있거니와 그들이 수발을 들도록 하겠노라”고 말했다.응렴은 자리를 벗어나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 나와 부모에게 아뢰었다. 부모는 놀라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큰 공주는 얼굴이 매우 못생겼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를 맞아들이면 좋겠다.”응렴의 무리 가운데 범교라는 스님이 “낭께서 동생을 맞으신다면 저는 반드시 낭의 앞에서 죽을 것이로되, 언니를 맞으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명심하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응렴은 범교 스님의 뜻에 따라 큰딸과 결혼했다.한 달 보름쯤 지난 다음 왕이 큰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짐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소. 장례를 치른 다음 마땅히 큰딸의 남편 응렴이 잇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왕이 돌아가시자 응렴은 왕의 뜻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이때 범교가 왕에게 나아와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여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고 말했다.왕은 그 말을 치하하여 대덕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뱀의 왕: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말아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당나귀의 귀: 경문왕은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화랑들의 노래: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숙종랑 등이 금란에 가서 놀다가 적이 군주를 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뜻을 담아 노래 가사 세 편을 지었다. 심필 사지를 시켜, 가사가 적힌 원고를 대구화상이 있는 곳에 보내 세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처음은 현금포곡, 둘째는 대도곡, 셋째는 문군곡이다. 왕에게 들어가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노래는 자세하지 않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의 맹세김응렴의 길은 낭염화상을 만나면서 크게 달라졌다. 응렴은 낭도들과 수련을 위해 아름다운 산천을 주유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라를 위한 일이든 자신을 위한 일이든 지혜를 바탕으로 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자신의 지혜와 무예에 대한 실력은 만족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응렴은 이러한 정신적 부담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훈련과 진리탐구에 매달렸다. 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들고, 밥을 먹으면서도 주먹을 내지르는 훈련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과 지혜가 나날이 눈에 뜨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응렴 스스로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답답해하며 훈련의 강도를 갈수록 높여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낭염화상이 어느 날 천 길 낭떠러지로 황하처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 아래로 응렴을 밀어 넣었다. 소용돌이가 심해 무술을 익힌 청년이라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겨우 헤엄쳐 나오면 낭염화상은 사정없이 다시 물줄기가 떨어지는 가운데로 밀어 넣어 버렸다.완전히 지쳐버린 응렴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낭염은 그를 건졌다. 낭염화상은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른 도승이었지만 화랑도들의 틈에 끼어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자 길을 찾고 있었다.기운을 회복한 응렴은 낭염화상 앞에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세속오계를 실천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정신적 훈련과 무예수업을 새로운 각도에서 속성으로 익혔다. 응렴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골격을 타고 태어났으며 지혜로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미 닦아온 기초가 튼튼해 낭염의 지도는 줄탁동시가 되어 나날이 성장하는 속도가 빨랐다. 괄목할만한 응렴의 실력은 가르치는 낭염화상조차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낭염의 엄격하고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가르침은 빼어난 응렴의 자질을 부추겨 어느덧 깨달음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목검을 잡고 상대를 노려볼 때는 짐승의 불빛 같은 안광을 쏘아냈으나 승복을 걸치면 그의 눈은 깊은 바다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했다.응렴은 헌안왕의 눈에 들어 48대 경문왕으로 즉위해 원성왕 이후 이어지던 왕권 다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화랑들의 교육을 정예화시키고, 인재를 키워 대거 등용했다. 이어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수련이 깊은 승려들을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평화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경문왕의 노력은 결국 아들 헌강왕이 즉위했을 때 빛을 발해 전국에 풍년이 들고, 백성의 마음에도 평화가 깃들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1) 장보고

장보고는 신라인이지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 더욱 유명한 인사로 기록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다.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당나라로 들어가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장군이 되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백성을 돌보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반란군으로 낙인이 찍혀 허망한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반란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보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내용은 없다. 간신배들의 혀 때문에 충신의 허망한 죽음이 생산된 것이다.해상왕 장보고의 충의와 강직한 신념으로 펼쳤던 업적,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던 그의 활달한 외교의 흔적을 찾아 오늘날 교훈으로 곱씹어본다.◆역사 속의 장보고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궁파(弓巴)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궁복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변환해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부터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완도에서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그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828년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해 허락을 얻었다. 청해진 대사로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의 전력은 왜구의 노략질과 당나라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쳐 제압하고, 멀리 인도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포용해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했다.845년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의 주된 줄거리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더 확인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신라 궁성에서는 장보고의 죽음에 이어 청해진을 없애고, 병사들과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의 아성은 이후로 무너져내렸다.◆완도 청해진 장보고유적지장보고는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시설, 다양한 생활시설과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신라하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항만시설과 유적들이 대거 발굴됐다.청해진은 완도에서도 썰물, 밀물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작은 섬이 되는 장도를 위주로 성을 쌓고, 접안시설 등의 수비와 공격이 용이한 요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목재 다리를 만들어 걸어서 장도를 둘러볼 수 있게 했다.신라시대 청해진유적지 장도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입구까지 330여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는 소나무 말뚝, 목책이 박혀 있다.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우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최근 당시 모양을 살려 복원한 우물이 장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청해진 입구에 외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내성문을 설치해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를 설치해 두고 있다.청해진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도 일대는 사적지 제3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청해진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바다의 삼면을 살필 수 있어 접근하는 선박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중국 위해 적산법화원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주변에 신라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이 있었다.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823년경에 창건했다.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한 것으로 장보고가 나중 무역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적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장소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연락을 하는 기관의 역할도 담당하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 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특히 이곳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옌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장보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글을 남겼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장보고의 전쟁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과 승마, 창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신라의 계급사회에서 뜻을 펼치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인이 되었다.그는 뛰어난 무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령군이 감축되면서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지키기로 했다.흥덕왕을 찾아가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백성이 외국으로 팔려가는 일을 막고, 해상으로 침투해오는 왜구와 당나라 해적들을 토벌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청원을 했다.흥덕왕이 이를 허락하여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남방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일본과 중국반도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서역까지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거상으로 성장했다.장보고는 또 중국 위해지역까지 진출해 신라인들이 편안하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 적산법화원을 세워 운영했다.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징이 왕권쟁탈전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의탁해오면서 운명의 여신은 불길한 기운을 함께 던져주었다.김명이 뜻을 함께했던 희강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해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우징은 장보고에게 “하늘을 두고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이때 장보고는 “흥덕왕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나는 바다를 지켜 신라의 백성을 돌보기로 했소.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면서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불의한 임금을 제거하도록 했다.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아버지가 장보고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보고는 이에 대한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세력을 우려한 왕의 측근들은 간사한 계략으로 장보고를 제거키로 하고 염장을 파견했다.장보고는 왕의 신하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소”라며 문성왕의 밀지를 받고 달려온 염장의 칼끝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결국 간사한 무리들의 혀로 인해 해상왕 장보고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계 해상왕의 명성과 함께 청해진의 철옹성도 함께 무너졌다. 신라가 주름잡았던 해상 무역권까지 힘을 잃고 백성의 안위까지 담보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얽히고설킨 족보 속 혈육간의 ‘피의 전쟁’ 끝나지 않은 ‘막장 드라마’ 배신 뒤엔 또 다른 칼 끝이

일연스님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 왕력편에서 신라 왕들을 시대별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기이 편에서는 왕조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흥덕왕 이후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헌덕왕과 흥덕왕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라하대 왕위를 두고 일어난 비사의 출발을 보였다. 흥덕왕에 이어 희강왕은 민애왕과 손을 잡고 삼촌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함께 뜻을 모았던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모두 원성왕의 직계 후손들이지만 워낙 얽히고설킨 싸움을 벌여 혈육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후손으로 부끄럽기까지 하다.삼국유사 기록에는 없지만 역사에서 삭제할 수 없는 흐름이라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다루어본다.◆희강왕희강왕의 성은 김, 이름은 제륭이고 시호는 희강(僖康)이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헌정이다. 비는 흥덕왕의 동생 김충공의 딸인 문목부인 김씨이다. 6촌 누이를 비로 맞이한 것이다. 자식으로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인 아찬 김계명이 있다.희강왕은 836년 12월에 당숙인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희강왕은 숙부인 상대등 김균정과 왕위 계승을 위해 전쟁을 벌였다. 시중이던 김명,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이 희강왕을 지지해 승리했다.아찬 김우징(제45대 신무왕)과 김예징, 김양 등은 김균정을 지지했다. 김우징은 적판궁에서 아버지 김균정을 왕으로 세우고 김양 등과 함께 왕위 쟁탈전에 나섰다.김명과 이강 등은 적판궁을 에워싸고 공격해 김균정을 죽이고 제륭을 희강왕으로 옹립했다.그러나 희강왕의 재위 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은 더욱 확대되었다.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은 가족들과 함께 황산진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청해진, 지금의 완도로 건너가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했다. 김균정의 매제인 아찬 김예징도 아찬 김양순과 함께 김우징의 세력에 합류했다. 한기로 도망친 김양도 산속에 숨어 세력을 모으며 복수를 꾀하다 청해진으로 와서 합류했다.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838년(희강왕 3) 정월에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죽였다.희강왕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강왕은 소산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희강왕릉은 사적 제22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희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명이 왕위에 올라 제44대 민애왕이 되었다. 그는 김충공의 아들로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부인과는 남매 관계로 희강왕과는 처남 매부가 된다.◆민애왕민애왕의 성은 김, 이름은 명(明), 시호는 민애(閔哀)이다.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이며, 부친은 제39대 소성왕과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의 동생인 대아찬 김충공이다. 어머니는 귀보부인 박씨이며, 비는 윤용왕후 김씨이다.제43대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부인, 제47대 헌안왕의 생모인 조명부인과는 남매 사이이다. 제40대 애장왕과는 사촌 사이이다.민애왕은 흥덕왕 때인 835년 자리에서 물러난 김우징(제45대 신무왕)을 대신해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836년 음력 12월에 흥덕왕이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왕으로 세웠다.민애왕은 아찬 이홍과 함께 적판궁을 에워싸고 김우징 일파를 공격해 김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러한 공으로 희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하지만 838년(희강왕 3) 음력 정월에 시중의 자리에 있던 이홍과 함께 다시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으로 하여금 목숨을 끊게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자 청해진(지금의 완도)의 장보고에게 피신해 있던 김우징과 김예징, 김양 등은 장보고를 설득해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鄭年)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반란을 일으켰다.민애왕은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을 보내 김양의 군대를 막도록 했으나 연이어 크게 패했다. 결국 민애왕은 측근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월유택으로 도주했으나 병사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이홍도 가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으나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보물 제741호)에는 민애왕의 행적을 나타낸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민애왕은 839년 음력 1월23일에 죽었고 당시 나이는 23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음력 1월22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민애왕이 죽은 뒤 김우징이 제45대 신무왕으로 왕위에 올랐고, 신하들은 예를 갖추어 민애왕의 장사를 지냈다. 민애왕의 장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데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의 고분이 민애왕의 왕릉으로 전해지며 사적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성왕 후손 처남 매부간의 전쟁신라 43대 희강왕과 44대 민애왕은 원성왕의 증손자로 각자 할아버지가 친형제인 6촌 간이다. 또 희강왕의 비는 민애왕의 여동생이어서 둘은 처남 매부 사이다. 이점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와 같다.처남과 매부가 손을 잡고 희강왕 제륭의 삼촌인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사이가 좋았다. 민애왕은 희강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을 인정받아 상대등의 벼슬에 올라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서의 실권을 잡았다.민애왕은 아버지 충공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늘 왕권에 대한 미련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기회는 꿈꾸는 자의 몫인 양 희강왕의 정치적 타락으로 쉽게 찾아왔다.민애왕 김명이 상대등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여동생이자 왕비였던 문목왕후가 그를 찾아왔다. 희강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 자기를 천대한다는 것이었다.김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아찬 이홍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모든 병사들을 움직이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김명에게 궁궐을 접수하는 일은 여반장이었다.희강왕은 제대로 보고조차 받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이는 자신의 침소를 보아야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반란의 우두머리가 처남 김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희강왕은 숨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민애왕도 왕좌에 올라 3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상왕 장보고의 군사를 등에 업고 쳐들어오는 김우징과 김양의 칼끝을 피하지 못하고 전쟁통에 시해됐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진실을 목숨으로 보여준 비극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단 신라천년 마지막왕 경순왕릉 답사

경주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 스토리텔링하며 새로운 문화콘텐츠 육성사업을 진행하는 삼국유사 기행단이 지난 23일 신라 천 년의 사직에 막을 내린 주인공 경순왕의 능을 답사했다.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으며 이날 행사에 참여한 답사객은 35명이다.문화해설을 맡은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에 대해 설명하면서 후백제 견훤이 포석정에서 경애왕과 신라 왕족들을 핍박한 역사,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기 전 왕실에서의 회의 장면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다.삼국유사 기행단은 경순왕의 항복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 마의태자와 같이 천 년을 이어온 나라의 운명을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적군에 바쳐버린 경순왕의 결정은 최악이었다는 설과 만백성의 백성을 전쟁의 고통에서 구해낸 성군의 선택이었다는 논쟁이 이어졌다.경순왕릉은 신라 56왕 중 왕릉이 밝혀지지 않는 능도 많지만 유일하게 신라의 땅을 벗어난 지역에 위치해 있다.경순왕은 927년 왕위에 올라 935년 고려 왕건에 나라를 바치고, 서라벌에서 왕건의 부름으로 개성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개성에서 978년 83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삼국유사 기행단 일행은 경순왕릉에서 참배하고, 미래의 열정과 역사의 숨결이 공존하는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시간도 가졌다.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만약 삼국통일이 신라가 아닌 고구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해 지금 우리나라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신라인들의 정신은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가졌던 국민성과 크게 대조를 보이며 희적적이었다”고 설명했다.대구일보가 주관하는 삼국유사 기행은 다음달 21일 진성여왕과 처용랑, 망해사에 대한 흔적을 더듬어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지고 올해 일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동문고, ‘창의·융합 인문학 기행 프로그램’ 운영

동문고등학교 1, 2학년생 24명은 최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SAN와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창의·융합 인문학 기행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미술·인문·건축학 계열의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로 구성됐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문화콘텐츠 육성 세미나…‘천년의 역사서’ 무궁무진한 활용법, 언제 어디서 펼쳐볼까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는 신라 천 년의 많은 흔적이 삼국유사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가진 우리와 직접 연결고리를 가진 떼려야 뗄 수 없는 핏줄과 같은 역사이자 현실이다. 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문화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산업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삼국유사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지난 15일 경주더케이호텔에서 학계, 문화연구단체, 문화산업단체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세미나가 열렸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삼국유사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실례로 삼국유사에 실린 225개소의 절터 찾기,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등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어 충담재, 월명재 등과 관련된 축제를 소개하면서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테마로 축제를 개발해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경주남산연구소는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코스를 테마별로 개발해 연중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한다. 또 문화유산에 대한 학습에 이어 현장 강좌를 개설, 운영하는 한편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한다.설화 또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를 정비하고 사적비 또는 표지석, 향가의 연고지 건립 등으로 문화탐방객 유치를 위해 노력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고지마다 문화축제를 열어 뛰어난 인물의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역사문화관광객을 유치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 또는 역사적 사실을 오페라, 연극, 음악 등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작극으로 개발 운영한다. 이어 삼국유사 신화와 전설 등의 문화유산을 지역별로 알려주고 해설을 받을 수 있는 어플을 개발한다.◆경주대학교 임선희 교수 임선희 경주대학교 교수는 ‘김춘추의 평화와 화해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하면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문화유산을 스토리와 장소로 연계해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엮어야 한다. 김춘추가 외교전을 벌였던 일본, 중국, 북한의 역사학자와 당시 상황 관련 공동연구 발표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한반도에서 삼국통일 후 평화와 화해가 지속된 점과 삼국의 기술발전으로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삼국통일 그 후부터는 한반도가 하나의 세력으로 외세에 대항했던 상황을 그리며 분야별 공간적 요소를 포함한 스토리를 완성해 이야기에 맞는 문화콘텐츠와 접목을 시도해야 한다.◆동국대학교 박종희 교수 박종희 동국대학교 교수는 4차 산업시대에서 삼국유사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도시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매력과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주에서 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삼국유사를 연결, 융합,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어 타지역과 연결하고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경주 역사문화에 과학의 새로운 옷을 입혀 21세기 융합관광의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역사적 현장을 재발굴하고 스토리텔링화 하고,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연결, 융합, 소통이다. 경주는 삼국유사를 활용한 다양한 인성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관광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웹진시인광장 이령 시인 웹진시인광장 부주간 이령 시인은 삼국유사 내용을 모티브로 사랑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지역의 역사문화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관심을 유발한다는 전략을 소개했다.이령 시인의 삼국유사 사랑서사시의 내용은 크게 10장으로 구성된다. 총 10장에 걸쳐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적과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장 5편씩 모두 50편을 싣는다.제1장-백률사(신라의 민심을 통합하려 했던 법흥왕 제위 시 이차돈과 관련된 나라사랑)-백률사는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이다.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라 불렸다. 절의 진입로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이 피고 한꺼번에 진다. 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유사해서 공심의 대표적 유적이라 생각된다.‘누구의 피 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 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 년의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지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1장 일부.◆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은 ‘삼국유사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역사의 뒤안길 기록, 신화와 설화의 보고, 불교유적의 스토리, 인물과 얽힌 이야기, 향가와 신라어의 본원 등으로 해부했다.삼국유사를 근거로 서사 공간으로써 활용이나 인터넷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접합 등을 도모한다면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은 무궁무진할 것이다.삼국유사의 설화에 깃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에 대한 이해와 융화와 조화라는 이상적 지향을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킨다면 원형적 상상력과 구술성은 새로운 상품이 될 것이다.삼국유사에 소개된 향가는 한반도의 노래 행위가 구술행위 중심에서 문자로 넘어오는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고대 신라어를 복원하고 활용한다면 여러 가지 요소의 콘텐츠로 재탄생할 것이다.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음을 생각하면서 삼국 당시의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이야기로 흡수해 재생산할 때 그 값을 다할 것이다.◆경북도의회 박차양 도의원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은 ‘스토리텔링이 답이다’는 제목으로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며 스토리텔링 방법까지 제안했다.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중심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이야기다. 신라는 천 년 동안 경주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주를 빼고 삼국유사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경주야말로 삼국유사의 본고장이다.경주에는 많은 역사문화 유적이 산적해 있다. 곳곳에 구슬이 널려 있다. 등록된 문화재만 330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우리 눈에 보이는 비지정문화재도 수두룩하다.이런 보석들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 달려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스토리텔링해 꾸준히 알리는 방법뿐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연극 등의 대중적인 문화콘텐츠와 접목시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이런 문화콘텐츠로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리텔링으로 옷을 입혀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정서에 맞는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경륜 있는 작가들에게 의뢰하거나, 작품공모를 통해 꾸준히 모집해 현실정에 맞는 이야기를 선정해야 한다.◆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문화재 활용을 통한 가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서악마을에서 삼한통일의 주역들과 함께 힐링여행을 기획 운영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를 산업화하는 과정을 소개했다.문화를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하자는 시대정신이 점점 커지면서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재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창의적 연출을 통한 문화재 활용은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넘어 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소통을 원활히 하고 국민의 문화수혜를 넓히는 창조적 문화생산이 되고 있다.그뿐 아니라 문화재 활용은 보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문화재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큰 부가가치를 지닌 소재여서 21세기 문화국가로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한다.특히 삼국유사의 주 무대인 경주에서는 우리 시대 문화창조의 신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신라문화원에서 삼한일통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는 서악마을을 가꾸고 문화재활용을 통한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흥덕왕…빼곡했던 천 년의 이야기 피로 물든 뒷 장은 감추고 싶은 듯 군데군데 이름조차 없구나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왕조사를 간단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천 년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소개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37대 선덕왕, 41대 헌덕왕, 희강왕, 민애왕 등은 왕들의 이야기가 집중되는 기이편에서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흥덕왕의 이야기도 아주 간단히 기록하면서 앞의 헌덕왕과 소성왕, 애장왕의 사연도 움푹 빠뜨렸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들추고 싶지 않았던 일연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원성왕 이후 잇따른 태자의 죽음과 소성왕, 애장왕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17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조들의 얼룩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본격적인 신라하대를 열었던 형제들의 쿠데타를 픽션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삼국유사: 흥덕왕과 앵무제42대 흥덕대왕 때 보력 2년은 병오년(826)인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으나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컷이 슬피 울어 마지않았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짝을 찾은 것으로 알고 이내 그 거울을 쪼아대었으나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자 슬피 울다 죽었다.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IMG03}]◆새로 쓰는 삼국유사: 권력과 사랑-형제들의 쿠데타: 원성왕의 장남으로 태자에 임명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의 아들은 6형제였다. 준옹, 언승, 숭빈, 수종, 충공, 제옹 등이 6형제가 태어난 순서이다.원성왕은 이들을 순서대로 궁중으로 불러들여 나랏일을 익히게 했다. 준옹은 맏손자여서 아들들이 죽자 곧 태자로 임명하고 중책을 맡겨 말년에 병부령에까지 올랐다.이들 6형제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성향은 각각 달랐다. 태자로 임명된 준옹은 천성이 심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 준옹은 병부령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도 몸이 약해 잠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IMG03}]이에 반해 둘째 언승과 넷째부터 막내까지 수종, 충공, 제옹은 활달한 성격으로 나랏일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키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셋째 숭빈은 소극적이고 차분한 편이었다.준옹이 원성왕의 죽음에 이어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심각해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았다. 아들은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여서 스스로 나랏일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소성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13살 어린 아들 청명에게 왕위를 넘겼다. 소성왕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동생들에게 섭정을 당부하면서도 몰래 비밀호위 무사들을 배치하고, 뛰어난 장수 명호와 정용을 시중으로 발탁해 아들을 엄호하도록 안배했다.소성왕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800년에 즉위했다. 이때부터 왕의 숙부 언승과 수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승이 섭정하면서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스스로 옮겨 앉아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언승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넷째 수종과 다섯째 충공을 병권과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으로 중용하고 실권을 휘둘렀다.그러나 애장왕이 18세가 넘어 성인으로 성장해 조금씩 자신의 의지를 펼치려 하자 삼촌 언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애장왕이 23세, 재위 10년차에 접어들던 809년 일이 터졌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문제에서 왕과 삼촌 언승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사신을 누구로 파견할 건지 예물을 무엇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마련할 것인지 등의 작은 문제로 시작해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상대등이었던 언승은 병부령과 상부령에 있던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병사들을 궁궐 깊숙이 배치하게 하고, 삼 형제가 칼을 빼들고 직접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애장왕의 비밀호위 무사들도 이미 언승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언승 형제들은 애장왕을 단숨에 베었다. 저항하던 애장왕의 동생 체명까지 처리하고,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애장왕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이렇다 할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헌덕왕은 특유의 괄괄한 성격으로 왕권을 박탈하는 일에 동생들을 모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없었던 헌덕왕은 자신의 일에 적극 찬동하고 앞장서는 수종을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충공을 상대등으로 삼고, 막내 제옹을 병부령에 앉혔다.헌덕왕은 즉위 이후에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는 등으로 흥청망청하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해 백성은 어려움에 처하며 신라하대 패망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흥덕왕의 사랑: 흥덕왕 수종은 애장왕의 여동생, 조카인 장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형 언승을 도와 병부령에 있으면서 권력을 자랑할 때였다. 수종과 장화부인의 애정은 궁궐을 벗어나 시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장화부인은 언승과 수종 형제가 자신의 오빠 애장왕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화부인이 10살, 어릴 때의 일이었고, 언승이 당나라에 소성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처럼 백성에게도 그렇게 숨기고 즉위했기 때문이다.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헌덕왕이 죽고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장화부인은 28살에 왕비의 관을 썼다. 화려한 날들이 시작되던 무렵 장화부인의 귀에 오빠들에 대한 죽음의 진실이 들려왔다.믿어지지 않는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곰곰이 뒤집어 생각하니 왕이었던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일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화부인은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흥덕왕 즉위 1년을 맞은 날에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술에 취한 흥덕왕의 입을 통해 비극의 전말을 들었다. 절망하던 장화부인은 끝내 이승의 문턱을 스스로 뛰어넘었다.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불운의 사랑인지 모른다. 현실로 닥친 사랑의 상실에 직면한 흥덕왕은 넋을 놓았다.그러나 흥덕왕은 당나라와 일본의 위협,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 흉년에 이어지는 도적떼들의 극성 등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신들의 추궁으로 사랑의 병을 앓을 틈을 잃었다.흥덕왕은 헌덕왕 때와는 다르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그는 아들 없이 물러나 본격적인 피의 왕권쟁탈전 시대를 불러왔지만 죽음에 이르러 장화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 영진고 학생 교사 학부모 함께하는 문학기행

대구 영진고등학교가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이 함께하는 문학기행을 열어 호응을 얻었다. 지난 2일 진행된 문학기행에는 50여 명이 참석해 담양의 죽녹원,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과 한국가사문학관을 다녀왔다. 지난달 9일 ‘책 쓰기 동아리’ 학생들도 이 지역을 한 차례 다녀가기도 했다. 학교는 문학기행 후 학생은 물론 교사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감상문을 받은 뒤 결과물을 모아 소책자로 만들어 배부할 예정이다.박재관 교감은 “국어과 선생님들이 매년 방학을 이용해 문학 작품의 무대와 작가의 생가를 찾아가는 답사를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업시간 학생들과 나누고 있다”고 했다. 1학년 학부모 대표 김성숙씨는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한 담양 죽녹원은 대나무 숲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 곳이었다. 담당 선생님께서 맨발로 죽림욕하는 모습을 보고 생활의 여유를 배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정혜 기자 yun@idaegu.com

원성대왕-③비극의 서막…저무는 영광의 시대…두 아들에 손자까지, 펼치지 못한 삶 끝나버려

원성왕은 통일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을 열었던 왕으로 분류된다. 그는 혜공왕을 시해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면서 왕위에 오른 선덕왕과 함께 최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상대등의 자리에서 병권과 내정을 주무르면서 본격적인 왕좌에 오르기 위한 발판을 굳혔다.적절한 기회를 맞아 선덕왕의 죽음에 이어 38대 원성왕으로 등극한 김경신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어 장남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일찍 죽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그러나 둘째 아들마저 죽자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을 태자로 책봉해 그가 39대 소성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소성왕은 사형제의 맏이였다. 왕위에 오른 소성왕은 1년 만에 죽었다. 이어 소성왕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등극했지만 그의 삼촌들에게 살해됐다.김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를 죽이고 41대 헌덕왕으로 왕좌에 앉았다. 17년의 왕위에 이어 헌덕왕의 동생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이어지며 신라 하대는 비극적인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신라 하대 비극은 원성왕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가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 원성왕의 죽음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서 있으며 또 보은사와 망덕루를 새로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 잡간에게 흥평대왕, 증조할아버지 의관 잡간에게 신영대왕, 고조 할아버지 법선 대아간에게 현성대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 잡간이다.-이른 눈제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 데 8월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인데 3월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제46대 문성왕 기미년(839) 5월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원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써가며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많은 심력을 기울였다.외교문제는 공격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유한 사신들을 당나라와 일본에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내적으로는 강한 나라의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잦은 사냥을 통해 건재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어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을 보여 외부의 침략에 대한 사기를 일찍이 차단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일찌감치 지정 공표했다. 원성왕은 사냥에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대동해 왕손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성왕은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매월 삭망일 두 차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냥을 했다.원성왕은 매월 초하루에는 어전 회의를 마치고 대신들과 함께 일찍 사냥에 나서 그달의 국운을 점치기도 했다. 사냥이 기분 좋게 잘 되는 날은 늦게까지 축하연을 열어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그의 보름날 달밤사냥이 문제를 가져왔다. 초하루의 사냥과 다르게 보름날의 사냥은 달이 높이 걸리는 시간에 맞춰 야간사냥으로 진행됐다. 큰 짐승을 잡기라도 하는 날에는 밤이 늦도록 주연이 이어졌다. 원성왕의 이 같은 사냥에 대한 취향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통일신라 하대를 비운의 시대로 흐르게 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주원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생명을 건지고 벼슬길에 오르게 된 김제공은 김주원의 은혜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주원이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피신해버리자 김제공은 스스로 김주원과의 관계를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이어 제공은 원성왕에게 거짓 충성을 하면서 눈에 들어 각간의 위치까지 올랐다.김제공은 거처를 왕경숲 근처로 옮기고 스스로 궁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인들과 벼슬아치들을 암암리에 포섭해 세력을 키웠다. 그의 목적은 원성왕의 세력을 꺾고 김주원을 모셔오는 것이었다.그러나 원성왕의 세력을 휘어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성왕 김경신은 타고난 무인체질로 활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태자 인겸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왕가로 뿌리를 내리며 튼튼한 울을 두르고 있었다.김경신이 오랜 장계를 통해 왕좌에 올랐듯이 김제공 또한 그의 튼튼한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장계를 세우고 곳곳에 복수의 함정을 마련했다.첫 번째 김제공의 복수는 쉽게 진행되는 듯했다. 792년 원성왕이 즉위 8주년을 기념해 전개하는 야간사냥 날이었다. 왕이 태자와 왕자를 대동하고, 대신들과 함께 대대적인 규모의 야간사냥을 축제로 진행하는 때를 기회로 잡았다. 많은 군사가 동원되고 무인들이 대거 참여해 위험했지만 오히려 반란세력들도 자연스럽게 사냥에 참여할 수 있었다.제공의 세력은 이날 왕과 태자를 한꺼번에 사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준비한 사냥감을 풀어 왕과 왕자팀이 두 곳으로 갈라지게 하고는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이날 사냥에서 왕은 충신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태자 인겸은 사냥감과 함께 함정으로 만들어놓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김제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덫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원성왕 또한 워낙 자신만만한 시기였고, 반대세력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반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태자를 잃어버린 원성왕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에게 벼슬을 주어 궁궐 가까이 두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구도를 한층 더 두텁게 했다.원성왕은 태자를 잃은 이후 사냥의 횟수를 크게 줄였다. 즐기던 야간사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천상 무인이었던 거친 기질의 원성왕도 나이가 들면서 차츰 기운이 쇠락해 갔다. 둘째 아들에 대한 왕위 수업과 손자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원성왕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잊혀 갈 무렵 김제공의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을 맞은 해였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 축하연을 조촐하게 궁 안에서 열었다. 축하연에 이은 야간사냥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로 진행했다.축하연에 참석했다가 늦게 동궁으로 돌아가는 태자의 말이 목에 피를 토하며 넘어졌다. 술에 취한 태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김제공 무리들의 비수가 원성왕 두 번째 아들의 목줄을 끊었다.궁궐에서는 잠든 왕실로 잠입하려던 김제공의 무리들이 기다리던 왕의 비밀 호위군사들에게 포박을 당했다. 10년 복수의 칼을 갈며 준비했던 김제공의 난은 왕자 두 명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원성왕의 마음에 비수를 던지는 일로 막을 내렸다.원성왕 또한 8주년 축하연의 사냥에서 입은 상처와 연거푸 아들을 잃은 심적인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원성왕은 즉위 14년인 798년 손자 준옹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의 장계에 종지부를 찍고 저승으로 떠났다.제39대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신라의 왕위는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②외세의 간섭…호시탐탐 뻗어오는 검은 손, 금은보화로 눈 가리고 ‘만파식적’에 슬금슬금

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춘추를 풀어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곡례, 논어, 효경 등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했다.왕은 조상의 5묘를 만들어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고 재상과 중앙과 지방정부의 조직을 정비했다. 발해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두텁게 하고, 봉은사를 건립했다.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죽어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어버리자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아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되었다.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중국을 비롯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 보물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등으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연회 국사가 번번이 해결책을 내놓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야사가 설득력 있다.◆삼국유사: 신라 보물 노리는 외세왕은 진실로 잘되고 못 되는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은 조정의 만파식적을 전하여 왕에게 넘겨주었다. 왕이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정원 2년은 병인년(786)인데 10월11일에 일본의 문경왕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고자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은 사신에게 “짐도 윗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라고 말했다.다음해 7월7일 다시 일본왕은 사신에게 금 1천 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천 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을해년(795)이었다.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보름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 다음 하루는 두 여자가 궁 안에 들어와 “저희는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마누라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바꾼 다음 통에 넣고 돌아갔습니다”고 했다. 이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남편들은 나라를 지키는 용입니다”고 청했다.왕은 쫓아가 하양관에 이르러 손수 잔치를 베풀면서 하서국 두 사람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용 세 마리를 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약 사실대로 이르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그러자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풀어주니 물살을 한길 남짓 튀기면서 기뻐 뛰며 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왕의 명석함에 탄복하였다.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를 안으로 불러들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려 묘정이 매번 금광정에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안에서 잠겼다 올랐다 하였다. 묘정이 그때마다 남은 음식을 먹이며 놀았다. 50일간의 화엄경 강의가 끝나자 묘정이 자라에게 “내가 너에게 덕을 베푼 지 여러 날인데 무엇으로 갚아주겠니”라고 말했다.며칠이 지나 자라가 작은 구슬 하나를 마치 주려는 것처럼 뱉어냈다. 묘정이 그 구슬을 가져다가 허리띠 끝에 달고 다녔는데 그런 다음 대왕이 묘정을 보고 매우 아껴 내전에 불러들여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때 잡간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또한 묘정을 아껴 함께 가도록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같이 당나라에 들어가자 당나라 황제 또한 묘정을 보고 총애하니 주변의 정승들이 우러러 마지 않았다. 점을 치는 신하 한 사람이 “이 승려를 살펴보니 하나도 좋은 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들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받으니 반드시 특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했다.사람을 시켜 검사해 보자 띠 끝에 작은 구슬이 보였다. 황제가 “짐이 여의주 네 낱을 가지고 있다가 지난해 하나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곧 내가 잃어버린 것이로구나”라고 말했다.묘정은 구슬을 얻은 일을 모두 갖추어 설명드렸다. 황제가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을 가만히 맞추어보니 같은 날이었다. 황제는 그 구슬을 두고 가라고 하였다. 다음부터 사람들이 묘정을 믿고 아끼는 일이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외세의 간섭원성왕은 즉위식에 이어 왕권 강화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선보였다. 원성왕은 주연에서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직접 만파식적으로 태평가를 연주했다. 축하연에 참석했던 대신은 물론 모든 이들이 태평가의 연주에 맞춰 어깨동무하기도 하며 흥겨운 춤을 추었다.당시 축하연에 참석해 만파식적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술에 취했던 사람도, 근심 걱정이 많았던 사람도, 몸에 병이 들었던 사람도 모두 건강하게 활달해졌다. 축하연에는 당과 일본의 사신도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에 대해 보고했다.일본의 왕은 사신에게 50냥의 황금을 보내 만파식적을 한 번만 구경할 수 있도록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일본 왕의 저의를 의심해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고, 만파식적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깊이 감추었다. 일본의 왕은 끈질겼다. 다시 사신에게 1천 냥의 금을 주어 만파식적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은 3천 냥을 주어 위로하며 돌려보냈다.당나라 사신도 황제의 명을 받아 신라 궁궐을 찾았다. 역시 만파식적을 빌려 가려는 수작이었다. 당나라 사신은 일본 사신들이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원성왕의 측근에 있는 대신들에게 접근해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주술사들을 동원해 여차하면 술법으로 만파식적을 가져가려 했다.그러던 중 당나라 사신들은 만파식적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영물이 신라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꿩 대신 닭이 아닌 봉황을 잡은 셈이었다. 당나라 사신들은 신라 궁성 주변에 웅크리고 있는 영험한 힘을 가진 세 마리의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신시켜 호리병에 넣어 도주했다.용의 아내들이 이러한 사실을 원성왕에게 보고해 신라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원성왕은 자신의 길을 안내해주던 도력 높은 연희 스님을 모셔오라고 명했다.신하들이 연희스님을 모시려 파발마를 출발시키려는 때 삿갓을 깊이 눌러 쓴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이 “먼 길 가는 수고를 덜어주려 하오”라며 궁으로 안내하라 전했다.연희 스님은 원성왕의 부탁을 직접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사흘 만에 호리병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왕을 대동하고 월지와 황룡사, 분황사를 돌며 호리병에서 물고기를 방사했다. 물고기는 청룡, 황룡으로 모습을 바꾸어 모두 거대한 용오름으로 한차례 춤사위를 보이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갔다.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해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수행하던 연회 스님은 원성왕의 부름에 거절할 수가 없어 국사의 직을 맡았으나 나라에 위기가 발생할 때에서야 해결책을 내놓곤 할 뿐 일체 국사에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에만 정진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단 경주 남산에서 신라의 패망을 논하다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발굴하는 작업을 이어가는 삼국유사 기행단 20여 명이 지난 26일 경주 남산 일대에서 신라 하대 역사를 재구성하는 답사를 했다.삼국유사기행단은 이날 경주 남산 포석정에서 시작해 지마왕릉, 삼릉, 경애왕릉을 거쳐 동남산의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을 돌아보며 신라하대 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이번 탐방에는 경주문화탐방 회원들과 경주박물관대학팀, 삼국유사강독반, 경주문예대학, 영포문학 등의 문화예술분야 단체팀들이 주를 이룬 가운데 부산, 울산, 포항 등의 인근도시에서도 참여했다.처음 출발한 포석정에서부터 역사의 기록이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토론이 불꽃을 튀겼다. 포석정은 연회하던 장소로 경애왕이 연회를 벌이던 중에 견훤에게 잡혀 죽음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 부분에 대해 반대의견이 제시됐다.기행단은 “견훤의 부대가 영천지역까지 밀고 들어온 사실을 경애왕도 알았을 텐데 적을 코앞에 두고 연회를 벌였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고, 당시는 음력 11월로 상당히 추웠을 때 야외에서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도 맞지않다”며 역사서의 기록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또 경주문화원 문화탐방반의 최영호 이사는 “경순왕은 나라를 팔아넘긴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성들이 추대한 것도 아니고 어떠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므로 신라의 왕이라 할 수 없다”며 “신라는 경애왕으로 이미 끝이났다”고 주장했다.이어 동남산의 헌강왕과 정강왕 형제의 왕릉을 돌아봤다. “두 왕의 여동생이었던 진성여왕은 문란한 행위로 신하들의 빈축을 받자 후계자를 찾아 왕위를 선양한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난 최초이자 유일한 신라의 왕이”이라며 “오늘날 정치인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기행단은 또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특히 남산의 신이 포석정, 망덕사 등의 현장에 다양한 모습으로 현신해 왕과 백성들에게 위기에 대한 주의와 경계할 것을 암시했다”며 “당시 왕과 백성들이 그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경주문화탐방회 장근희 회장은 “경주에 살면서 경주를 잘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될 때가 많아 역사문화탐방을 3년째 추진하고 있다”면서 “경주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의 자긍심으로 생각되는 신라 천 년의 유구한 문화역사를 공부해 제대로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한편 삼국유사 기행은 대구일보 주관으로 매월 한 차례 문화해설사와 함께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 역사적인 사실들을 살펴보고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스토리텔링하는 시간을 갖는다.삼국유사 기행단은 다음달 23일 경순왕의 발자취를 찾아 연천군 일대 문화유적을 탐방할 계획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