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85)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져온 내용이 기록돼 있다.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일은 요즘도 여러 사찰에서 귀중한 행사로 가끔 열리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인도, 태국, 필리핀 등의 여러 나라의 상당히 많은 사찰에서 모시고 있다. 과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얼마나 많아서 이렇게 많은 사찰에서 모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황룡사와 영묘사 등에서는 장육존상을 모셨던 이유에 대해 실물 크기로 조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부처님의 신체가 그렇게 장대했기 때문에 사리 또한 그만큼 많은 양이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적들이 많이 발생한다.부처님의 영험한 힘으로 해석하며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에 대한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본다. ◆삼국유사: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국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진흥왕 때인 태청 3년은 기사년(549)인데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 몇 낱을 가져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은 계묘년(643)인데 자장법사가 부처의 두개골, 이빨, 사리 100과와 부처가 입었던 붉은 비단에 금으로 무늬를 낸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사리는 셋으로 나눠 일부는 황룡사 탑에, 일부는 대화탑에, 또 일부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뒀다. 계단은 두 층인데 위층 가운데에 가마솥을 덮어놓은 것 같은 돌 뚜껑이 놓여 있었다.’ 반면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옛날 우리 고려조에 들어와 두 사람의 염사가 차례대로 와서 단에 예불을 드리고 돌솥을 들어 보았다. 앞사람은 돌 상자 안에 구렁이가 있는 것을, 뒷사람은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부터는 감히 열어보지 못했다.’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 임금 때에 명령을 받아 강동을 지휘했는데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을 들어내고 예불하려 했다.절의 스님이 어렵다고 했으나 두 사람은 군사를 시켜 굳이 들어냈다. 안에는 돌로 된 작은 상자가 있었다.함을 열어보니 유리통이 담겨있는데 통 안에는 사리가 다만 네 낱이 있어 돌려보며 경배했다.통에는 조금 갈라진 곳이 있었다.이에 유공이 가지고 있던 수정 상자를 시주하고 함께 보관했다. 옛 기록에서 ‘100과를 세 곳에 나누어 간직했다’고 했으나 이제 겨우 4과뿐이다.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니다. 진신의 네과 사리 외에는 변신 사리여서 모래알처럼 부서졌지만, 솥 밖으로 나오면 특이한 향이 가득 차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이것은 말년의 한 가지 기이한 일이다. 당나라 대중 5년은 신미년(851)인데 중국에 신년인사를 갔던 원홍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뒷날 당나라 동광 원년은 계미년(923)인데 우리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6년, 중국에 신년인사를 간 윤질이 5백 나한상을 가지고 왔다.현재는 북숭산 신광사에 있다. 송나라 선화 원년은 기묘년(1119)인데 중국에 공물을 드리러 간 정극영, 이지미 등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지금 내전에 두고 모시는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이 이렇다.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렀다.가까운 곳에 선율 스님이 있었는데 늘 하늘에서 공양을 해 주었다.재를 올릴 때면 하늘에 있는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주는 것이다.하루는 선율이 의상을 초청해 함께 재를 올렸다.의상이 앉아 오래 지났는데 하늘에서 줄 때가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그래서 의상은 바리때가 빈 채 돌아왔다.그제야 천사가 이르러 선율이 물었다.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늦었습니까?”“온 골짜기에 신병이 서서 막고 있으니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이에 선율은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았고, 그 도가 뛰어난 것에 감복했다.그래서 바리때를 두고서 다음날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불러 그 까닭을 설명했다.의상이 조용히 선율에게 “스님은 이미 하늘님이 경배하는 바를 입었습니다.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마흔 개 치아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세상에 내려 보내 복을 받게 한다면 어떻습니까?”고 말했다. 뒷날 선율은 천사에게 그 뜻을 하느님께 전하도록 했다.하늘님은 7일간만 보내준다 하니, 의상이 경배를 드리고 궁궐로 들여보내 모셨다. 진흥왕 때인 천가 6년은 을유년(565)인데 진나라 사신 유사와 명관 스님이 불교의 온갖 경론 1천700여 권을 실어 보내왔다.정관 17년(643), 자장법사가 삼장 400여 상자를 싣고와서 통도사에 모셨다.흥덕왕 때인 태화 원년은 정미년(827)인데 공부하러 갔던 고구려의 승려 구덕이 불경 약간 상자를 가져오니 왕과 여러 절의 승려들이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아들였다. 대중 5년(851)에 신년인사를 갔던 사신 원홍이 두루마리 불경을 약간 가져왔다.여기 기록된 의상전을 보면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을 찾아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석사의 본비에는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출가했다.영휘 원년은 경술년(650)인데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고자 고구려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용삭 원년은 신유년(661)인데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에 배웠다.총장 원년(668)에 지엄이 돌아가시자 함형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왔다.‘장안 2년 임인년(702)에 돌아가시니 나이가 78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엄과 선율스님이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에 있던 부처의 어금니를 청한 일은 신유년(661)에서 무진년(668)까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 고려조에서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임진년에 천궁의 기한인 7일에 찼다고 의심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도리천에서의 하루 밤낮은 세상에서 100년이다.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간 신유년부터 계산해 고종 임진년까지는 693년이다.경자년(1240)까지 비로소 만 700년이 돼 7일의 기한이 찬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율사와 의상법사신라시대 진골 출신으로 관직에 있었던 무림은 아들이 없었다.부처님에게 축원해 아들을 낳았다.그 아들이 화엄경을 창안하고, 신라의 대국통으로 분황사와 황룡사 주지를 역임했던 자장율사다. 자장율사는 어버이가 이승을 하직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처자식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매진했다.왕이 재상으로 기용하려 했지만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응하지 않았다. 이어 자장은 중국으로 들어가 종남산에서 수도하며 장안까지 높은 덕이 알려졌다.이후 당 태종이 장안의 승광별원에 머물게 할 정도로 두터운 예우를 받는 입장이 됐다. 자장은 장안에 머무르며 당 태종의 정치적 이념을 설정하는 절대적 위치에 있으면서 신라의 안녕을 위한 복안을 마련했다.후일 의상법사가 장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예언하며 그로부터 정치의 향방을 묻는다면 태평할 것이라 일러뒀다.당 태종은 자장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고 모두 그의 말에 따르도록 했다. 선덕여왕이 나라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인재가 절실함을 느끼고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내 줄 것을 당 태종에게 청해 드디어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게 했다.자장은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의상은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했다.그의 나이 서른 중반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 지엄을 만나 화엄사상에 대해 깊이 공부해 훗날 신라에서 자장의 뒤를 이어 화엄종을 더욱 발전시켰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장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태종은 이미 사망하고, 고종이 뒤를 이었다.태종과 자장의 약속은 고종의 대에는 이미 잊혀지고 파기된 후였다.의상은 고종이 50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대비책을 마련하게 했다.의상은 부석사, 낙산사 등을 창건하고 3천여 명의 제자를 나라의 동량으로 키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4) 남백월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목적이 민족 자긍심을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편이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황제가 조성한 연못에 아름답고 신비스런 풍경의 사자암이 나타나, 황제가 화공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그 신성한 땅을 찾게 했다고 한다.이는 신라 땅에 그 대단한 복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대목이다.또 평범한 청년들이 어느 날 수련하기로 마음먹고 백월산에서 부처가 됐다는 이야기로 신라에는 뛰어난 인재가 넘쳐난다고 은근히 자랑한 것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천30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백월산을 둘러싼 창원은 복된 땅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제법 있다.낙동강 줄기가 여유롭게 흐르고 있고,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있는 산들은 여인이 하늘을 보고 누운 형상의 길지라는 해석을 들려준다.지금도 백월산에는 그 맥을 이은 절이 향불을 피우고 있고 전설의 현신을 꿈꾸며 수련하는 도사들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삼국유사: 남백월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백월산 두 성인의 성도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다.봉우리들이 삐죽삐죽 솟아있고, 수백 리 이어지는 참으로 거대한 자태이다.예부터 노인들이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연못을 하나 팠지.매달 14일에 달빛이 환하게 밝을 때 사자처럼 생긴 산의 바위 하나가 꽃 그림자 사이에 은은히 비추며 연못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야.황제가 화공더러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시켜 천하를 돌며 찾게 했어.우리나라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커다란 사자암이 있고, 산 서남쪽 2보쯤에 산이 셋 있는데 이름이 화산이야.그림과 아주 비슷했지. 그러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신발 한 짝을 사자암의 정상에 걸어놓고 사신들은 돌아가 아뢰었지.신발의 그림자가 연못에 나타나는 것이야. 황제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백월산이라 했어. 그런 다음에 연못에는 그림자가 사라졌어.” 산에서 동남쪽 3천 보쯤 거리에 선천촌이 있다.그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둘 다 풍채가 평범하지 않고 이 세상 밖의 뜻을 품으며 친구사이로 가까이 지냈다.나이가 스무 살쯤 됐을 때 마을의 동북쪽 고개 너머 법적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 법종곡의 승도촌에 오래된 절이 있는데 머무를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그들은 모두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 생계를 꾸리며 서로 오갔지만 속세를 떠나려는 뜻을 잠시라도 잊지 않았다. 두 친구는 서로 말했다.“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뤄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사람 사는 세상을 떠나 깊은 골짜기에 숨기로 했다.밤에 꿈을 꾸는데 백호광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가운데서 금빛 팔이 드리워져 두 사람의 이마를 만졌다.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자 두 사람이 똑같았다.오래도록 감탄하다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스님은 북쪽 마루의 사자암에 자리를 잡고, 부득스님은 동쪽 마루의 돌무더기 아래 물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각기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열심히 미륵보살을 찾고, 박박은 한마음으로 미타보살에게 예불을 드렸다.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경룡 3년 기유년(709)의 4월8일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8년이었다.저물 무렵 몸매가 아주 빼어나고 그윽한 기운을 풍기는 스무 살쯤 된 여자가 문득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했다. 박박이 “절이란 깨끗이 지키는 것을 일삼는 곳이오. 그대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빨리 떠나시고 이곳에 머물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남암으로 가 앞에서처럼 청했다. 부득이 여자에게 “이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면서 암자 안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밤 깊도록 맑은 마음을 지키며 등잔불 아래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웠다.그런데 밤이 이슥해질 무렵 여자가 “제가 하필 아이를 낳으려나 봅니다. 스님께서 거적대기를 좀 준비해 주시지요”라고 부탁했다. 부득은 애처로운 마음에 등불을 가만히 피워놓았다.여자는 아이를 낳더니 목욕물을 부탁했다.노힐부득은 두려운 마음이 엇갈렸으나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더할 나위 없었다.항아리 욕조를 마련해 여자를 거기 앉히고, 새로 물을 끓여 씻겼다.그러자 욕조 안의 물이 향기를 가득 피우면서 금빛의 즙으로 변하는 것이었다.노힐이 크게 놀라자 여자가 “우리 스님도 여기서 씻으시지요”라고 권했다. 노힐은 사양하다가 이에 따랐다.문득 정신이 상쾌하고 맑아지면서 피부가 금빛이 됐다.그 곁을 보았더니 어느새 연대가 하나 나타났다.여자는 거기 앉으라고 권하며 “나는 본디 관음보살이오. 스님이 대보리를 이루도록 와서 도운 것이라오”라고 말을 마친 후 사라졌다. 박박은 “부득이 오늘밤 분명 계를 더럽혔을 것이야. 가서 비웃어 주어야지”라며 와서 부득을 보니 연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돼 밝은 빛을 내며 몸은 금으로 꾸며져 있었다.저절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고 연유를 물었다. 노힐부득이 연유를 설명하자 박박은 “내가 눈에 씌인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해 나보다 먼저 이뤘네”라고 탄식했다. “욕조에 즙이 남아 있네. 씻을 수 있을 거야.”박박이 씻자 부득처럼 무량수불상이 돼 두 불상이 우뚝 마주보고 앉았다.마을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며 “희귀한 일이 일어났어. 희귀한 일이”라며 감탄했다.두 성인은 설법을 베풀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천보 14년은 을미년(755)인데 신라 경덕왕이 즉위해 이 이야기를 듣고 정유년(757)에 사람을 보내 큰 절을 짓고, 백월산 남사라 불렀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도기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백월산 기슭의 선천마을에 각자 가정을 이루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부득과 박박은 일을 마치고 저녁이면 만나서 농사 계획과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어느 날 두 친구는 비보를 접했다.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함께 마음을 주고 있었던 여인이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홀어머니를 혼자 부양하면서 두 청년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러던 중 어머니와 산책을 나갔다가 빗길에 낭떠러지로 떨어져 모녀가 함께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부득과 박박은 서로가 아끼던 여인의 장례를 치르고 삶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했다.“우리는 모르고 왔던 것처럼 갈 곳이나 갈 때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삶의 궁극은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밥벌레와 다를 바 없다”며 “머리를 깎고 공부에 매진해 답을 찾자”고 다짐했다. 깊은 삶의 의미를 찾기로 약속을 한 두 친구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와 백월산 깊숙한 계곡으로 들어갔다.둘은 북쪽과 동쪽에 각자 거처를 마련하고 잠을 설쳐가며 수련에 몰입했다. 부득과 박박은 먹는 것조차 잊었다.절에서 가져온 관음과 미륵상을 걸어놓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삶의 끝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구했다.둘은 씻는 것은 물론 먹는 것도 잊고 오로지 도를 닦는 일에 몰두했다.청년 둘이 똑같이 열흘 만에 쓰러졌다.그런데 그들의 머리 위로 빗물이 쏟아져 정신을 차리게 했다.그리고 그들의 옆자리에 신비스런 향이 나는 과일이 놓이기 시작했다.영문을 모른 채 둘은 과일로 공양하며 더욱 정진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이 지난 어느 날 어여쁜 여인으로 분장한 관음보살이 이들의 거처에 나타나 마음을 시험했다.그러나 이미 경지에 이른 그들은 미색에 혹하지 않았다.관음보살은 그들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했다.선천마을 전체로 무지개 한 쌍이 7주야 크게 원을 그리며 걸렸다.마을 사람들이 무지개를 찾아가니 두 성인이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둘은 마을사람들에게 한차례 법어를 남기고 함께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소식을 들은 왕이 그들이 수도하던 곳에 절을 지어 불사를 길게 이어가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3) 미륵선화와 진자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나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불교의 융숭한 발전 덕택이었다.국론통일을 이끌어낸 국민들의 정서적 안정과 화합을 이룬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더불어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미륵선화와 진자사편은 이러한 신라를 관통하는 국가적인 정서를 그대로 축약 표현하고 있다. 진흥왕이 인재양성을 위해 처음 원화제도를 도입했지만 실패했다.하지만 이어전 화랑제도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육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또 법흥왕의 뜻에 따라 불교를 장려해 황룡사, 흥륜사 등의 국가적 사찰을 건립해 국론통일의 기반을 조성했다. 삼국유사는 진자 스님이 흥륜사에서 공주 수원사를 거쳐 다시 서라벌 영묘사까지 구도에 이르는 길과 화랑으로 활동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진자 스님이 부처를 직접 만나기 위한 염원은 꿈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서라벌에서 웅천까지 삼보일배로 정진하는 모습과 불교의 궁극적인 이치를 깨우쳐가는 과정을 소개하며, 애국심은 화랑의 활동을 통해 보여준다. ◆삼국유사: 미륵선화와 미시랑 그리고 진자사제24대 진흥왕은 성이 김씨고 이름은 삼맥종이다.심맥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양나라 대동 6년 경신년(540)에 즉위하였다. 큰아버지 법흥왕의 뜻을 좇아 한마음으로 부처를 받들고 널리 절을 만들었으며 사람들을 인도해 승려가 되게 했다. 또 타고난 성품이 풍류를 즐기고 신선을 높여 여자아이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골라 원화로 세웠다.인물을 뽑아 효제와 충신으로 가르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이에 남모낭과 교정낭을 세워 무리 300~400명을 모았다. 교정낭은 남모낭을 질투했다.술을 많이 가져다 놓고 남모낭에게 마시게 하고, 남모낭이 취하자 슬그머니 북천으로 데리고 가서 죽인 후 돌을 들어 그곳에 묻었다.남모낭의 무리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며 흩어졌다.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노래로 지어 동네 어린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했다.남모낭의 무리들이 듣고 시신을 북천에서 찾아낸 다음 교정낭을 죽였다. 이에 왕이 원화를 폐지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났다.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모름지기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의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아 화랑이라 했다.처음으로 설원랑을 추대해 국선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작이며 명주에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악한 짓은 반성해 착하게 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며 아랫사람을 바로 이끌도록 했다. 이때에 오상, 육예, 삼사, 육정이 널리 행해졌다. 진지왕 때에 흥륜사에 진자라는 스님이 있었다.매번 절에서 모시는 미륵불상 앞에서 “바라옵건대 우리 부처님께서 화랑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늘 가까이 모시고 받들어 두루 시중을 들겠나이다”며 소원을 빌며 맹서했다. 그 정성이 매우 간절했다.하루 저녁에는 꿈을 꾸는데 어떤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너는 웅천의 수원사로 가라. 미륵선화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가 깨어나서 기쁘고도 놀라 그 절을 찾아가는데 열흘을 가면서 발걸음마다 예불을 드렸다.그 절 문밖에 이르자 맑고 깨끗한 청년이 맞이하며, 작은 문으로 안내해 손님이 묵는 방에 모셨다. 진자가 올라가 머리를 숙이며 “그대와 평소 알고 지내지 않았는데 어찌 접대가 이처럼 정중합니까?”라고 말하자 “저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스님께서 머나먼 길을 오신 것을 보고 와서 챙겨드린 것뿐입니다” 했다. 조금 후 문 밖으로 나갔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진자는 우연이라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다만 절의 스님에게 지난날의 꿈과 일어나서 오게 된 뜻만 말했다.그러면서 “잠시 저 아래 자리에 머물며 미륵선화를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절의 스님은 “여기서 남쪽 마을로 가면 천산이 있소. 예로부터 현철하신 분이 살고 있어 깊은 느낌이 많다오. 그 거처로 가보시지 않겠소?”라고 답했다. 진자가 이 말을 따라 산 아래에 이르자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해 나와 맞으며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 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다시 와서 무얼 찾아?”라며 오히려 물었다. 진자가 듣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본사로 돌아와 한 달 남짓 지냈다.진지왕이 이를 듣고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묻고는 “청년이 서울사람이라 했다면서? 성인이 빈말을 하겠느냐, 성안을 찾아보면 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진자가 왕의 가르침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샅샅이 찾았다.그런데 곱게 차려입은 수려한 소년이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 나무 아래서 팔짝거리며 놀고 있었다.진자가 그를 보고 놀라며 “이 이가 미륵선화이다”라며 나아가 ”그대는 집이 어디인가? 성씨도 좀 알고 싶은데?“라고 물었다.소년은 “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성은 뭔지는 모릅니다”고 답했다. 이에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 왕에게 뵈었다.왕은 공경하며 추대해 국선으로 삼았다. 여러 무리들과 화목하며 예의가 바르고 의리를 지키는 모습이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세상에서 7년쯤 활약하더니 문득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진자의 슬픔은 너무나도 컸다.그러나 자애로운 은택을 실컷 누리고 맑은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스스로 고치고 부지런히 수도하여 도를 이뤘다.아쉽게도 말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미륵불을 만난 진자 스님신라 24대 진흥왕은 정복군주로 불릴 정도로 나약했던 신라를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진흥왕은 강한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 청년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화랑제도를 크게 강조했다. 또 전국에서 뛰어난 청년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선발해 학문과 무예는 물론 예술까지 교육해 강한 군대 조직으로 육성했다. 진흥왕 말기에 흥륜사의 이름 높은 진자 스님이 추천하는 미륵선화를 국선으로 삼았다.미륵선화는 외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예도 출중하며 훌륭한 통솔력을 갖춰 화랑도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다. 미륵선화는 낭도들과 밤낮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그러나 낭도들이 모두 흥겹게 시간을 노는 듯 흘려보냈지만 곰곰이 되돌아보면 노는 일들이 모두 전략전술을 익히는 것이자, 예법을 몸으로 익히는 공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낭도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쉬는 시간에 함께 마시는 곡주는 가끔 취할 만큼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국선 선화랑이 흘려보내는 신비스런 향이 낭도들을 정신적으로는 취하지 않게 했다.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왕위를 이으면서 국정은 문란하게 퇴락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노려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이 산발적으로 침략해와 신라가 점령했던 땅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갔다. 이때 진지왕을 앞세워 권력다툼을 벌이던 미실과 거칠부는 선화랑이 이끄는 화랑도의 세력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상대등의 지위에 있던 거칠부가 선화랑을 불러 백제 땅을 치는데 앞장서도록 명했다. 미륵선화는 낭도들을 이끌고 백제군사들이 집결해 있던 웅천 관산성으로 진군했다. 미시랑은 낭도들에게 진군하면서 노랫소리에 맞춰 빗자루를 들고 흔들도록 했다. 이 모습이 백제군들의 눈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십만 대군이 말을 타고 내닫는 것과 같이 보여 모두 성을 버리고 삼십 리 밖으로 퇴각했다. 승전보가 서라벌 궁성에 도달하자, 거칠부는 선화랑에게 다시 고구려를 칠 것을 명했다. 하지만 미륵선화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미륵선화는 수원사에서 도를 닦는 승려들을 돌보는 불목하니가 돼 있었다. 미륵선화를 찾던 진자 스님도 낭도의 무리에서 벗어나 수원사에서 도를 닦아 성불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2) 중생사

신라시대 중생사는 경주 낭산 일대에 있었던 제법 규모가 있었던 사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생사에는 당나라의 유명한 예술가가 조성한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이 관음보살상에 기도해 이루어진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영험한 부처로 알려지고 있다.신라 최은함은 기도로 아들을 낳고, 전쟁터에 나간 사이 그 아이를 돌보아 주기까지 했다. 부처가 직접 시주를 하고, 법당에 불이 났을 때 스스로 절문 밖으로 불을 피해 나앉은 일 등이 이야기로 전한다.경주 낭산의 중생사로 전해지는 절터에서 발견된 십일면관음보살입상, 키가 큰 관음보살입상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 전시되고 있다. 또 현대에 들어와 중생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는 곳의 서쪽에 마애보살삼존좌상이 있다. 이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눈길을 끈다.◆삼국유사: 중생사다음은 신라 고전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당나라 천자가 대단히 예뻐하는 여자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누구와 견줄 데 없으니 “예로부터 이제까지 그림에서도 이 같은 여자는 드물다”고 할 정도였다.황제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사람이 명령을 받들어 그림을 완성했는데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아래가 붉은 자국으로 더럽혀졌다. 그것을 고치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붉은 표시가 분명코 날 때 생겼으리라 생각하며, 그림을 그대로 바쳤다.황제가 “겉모습은 매우 그대로이구나. 그런데 배꼽 아래 표시는 안에서만 아는 비밀인데 어찌 알고 함께 그렸는가”며 추궁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옥에 가두고 벌을 주려 하자 승상이 “그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습니다”며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황제는 “그렇게 현명하고 곧다면 지난 밤 내 꿈속의 모습을 그려내어라. 그대로 그린다면 용서하리라” 했다. 그 사람이 곧 11면 관음상을 그려냈다. 꿈과 맞으니 황제는 의심이 풀려 용서해 주었다.풀려나자 그는 박사 분절에게 “내가 듣기에 신라 나라는 불교를 깊이 믿는다 하오. 그대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함께 불사를 닦고 어진 나라에 널리 이익을 준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라고 했다. 드디어 함께 신라에 도착해 중생사의 대비상을 완성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 기도를 드려 복을 받은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신라 말 천성 연간(926~927) 이었다. 정보 최은함이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이 절의 부처님 앞에서 기도했다. 태기가 돌아 아들을 낳았다.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백제의 견훤이 서울을 쳐들어와 성안이 온통 혼란에 빠졌다.은함이 아이를 안고 와서 “이웃 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대성께서 주신 아이라면 부처님의 힘을 빌려 이 아이를 키워주시고,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며 아이를 부처님 앞에 두고 전쟁터로 나갔다.보름쯤 지나 적들이 물러가자 와서 찾아보니, 아이의 피부가 마치 새로 목욕한 듯 몸이 반들반들하며 입 언저리에서는 아직 우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안고서 돌아와 길렀는데 자라자 남보다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최승로이다. 지위가 정광에 이르렀다.또 992년 3월에 절의 주지 성태 스님이 보살 앞에 꿇어 엎드려 “제가 이 절에서 오랫동안 거처하며 열심히 향불을 피우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에 밭이 없어 향불 피우기를 계속할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라고 인사했다.이날 언뜻 잠이 들었는데 꿈에 대성이 나타나 “그대는 여기 머물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모아 향 피울 돈을 충당하겠노라”고 말했다.스님은 좋은 기분으로 깨어나 거기 머물고는 떠나지 않았다. 13일 뒤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왔다. 스님이 나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우리들은 금주 땅 사람들입니다. 저번에 한 비구 스님이 우리에게 와서 내가 서울의 중생사에서 머문 지 오래되었다. 공양드릴 일이 어려워 시주를 받으러 왔다라고 하였소. 그래서 우리가 인근 마을에서 시주를 모으되, 쌀 6석과 소금 4석을 지고 왔습니다.”“이 절에서는 시주받으러 나간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이 잘못 들었는가 싶소” 하니 “지난번 비구 스님이 우리를 데리고 와서 이 신현정 우물가에 이르러 절까지가 멀지 않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그대로 따라 절에 온 것입니다”고 했다.스님이 그들을 인도해 법당 앞에 들어갔더니 그 사람들이 대성에게 예를 갖추며 “이분이 시주를 거두던 분의 얼굴이다”고 서로 말하며 놀랐다. 이 때문에 절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또 어느 날 저녁 절의 문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다 법당에 올라가 보니 불상이 간 데가 없었다. 찾아보니 벌써 뜰에 있었다. 서로 물어보니 아무도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관음보살의 영험함을 알았다.또 계사년(1173)에 점숭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거처하고 있었다. 글을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성품이 본디 순수하고 향불 피우기를 무척 부지런했다. 한 스님이 그 거처를 빼앗으려고 친의천사에게 “이 절은 나라에서 은혜와 복을 비는 곳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를 뽑아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천사가 그렇다 하고,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 문서를 거꾸로 주었는데 점숭은 펼쳐서 유창하게 읽는 것이었다. 천사는 탄복하며 방안에 돌아와 앉았다가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다. 점숭은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못했다.천사는 “이 사람은 진실로 대성이 지키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 빼앗지 않았다. 당시 점숭과 함께 거처한 처사 김인부가 이 이야기를 노인들에게 전하고 전기로도 써두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중생사신라말기에 나라의 일을 하는 하급관리가 늦둥이를 얻었는데 아주 예쁘게 생긴 여식이었다. 관리는 그 딸자식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집안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그러나 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도 앉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관리는 딸아이를 위해 좋다는 약은 죄다 사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생사 관음보살이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업고 중생사로 달려갔다.관리는 딸아이를 관음보살 앞에 내려놓고는 엎드려 절하며 울며 빌었다. “부처님 우리 아이가 일어나 뛰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을 보게 해 주신다면 저는 평생 부처님의 종이 될 것이며 아이 또한 부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며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기도했다.기도하기 시작한 지 보름째 되는 날 관리가 저도 모르게 법당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 관음보살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가보아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관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관음보살이 꿈속의 그 모습으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주변에 그윽한 향기가 넘쳐나는 것을 느꼈는데 문득 데리고 왔던 딸아이가 안보였다. 퍼뜩 정신이 든 관리는 부처님의 목소리가 생각나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그 관리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딸아이가 “아빠 또 부처님께 인사하고 오시는 길이세요”라며 뛰어와 안겼다. 관리는 꿈인가 싶어 한참 안고 있던 딸아이를 품에서 떼어 다시 들여다보기를 여러 차례 했다.관리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세간살이조차 팔아 모두 정리하고 중생사로 들어와 불목하니를 자처해 정성껏 절의 일을 보살폈다. 그는 스스로 부처의 자식이라며 이름도 ‘불종’으로 개명했다.딸아이는 부처님의 덕으로 다시 얻은 아이라 하여 ‘덕득’이라 이름을 고쳐 지어 불렀다. 덕득은 총명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렸다.덕득은 자라면서 남자를 능가하는 힘으로 산을 뛰어다니며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려 활을 쏘는 등 무술에 관심을 두었다. 불종은 처음에는 덕득에게 글 읽기만 하라고 권하다가 늦게는 그냥 두었다.덕득은 여장부로 자라 결국 남장을 하고 군인이 되어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신라가 패망하게 된 견훤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0) 금관성의 파사석탑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관성의 파사석탑과 김수로왕, 허황후의 이야기는 설화에 가까운 사실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김수로왕이 6가야국 왕들과 함께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미리 왕비가 될 여인이 나타날 것을 알고 신하들이 왕비를 추대하려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 왕과 왕비가 158세, 157세까지 살았다는 것 등이 비현실적이다.그러나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과 파사석탑이 엄연히 지금까지 가야의 땅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모두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흥미롭게 하고,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한다.설화 속의 파사석탑을 찾아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줄 문화콘텐츠의 씨앗이 될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본다.◆삼국유사: 금관성의 파사석탑금관성 호계사 파사석탑은 이 마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서역의 아유타국으로부터 싣고 온 것이다. 동한시대 건무 24년 갑신년(48)의 일이다.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나가 동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제대로 건너와 남쪽 언덕에 와서 정박했는데 비단 돛에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구슬 같은 아름다운 물건이 함께 있었다. 지금은 그곳을 주포라 한다.처음으로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벗은 곳은 능현, 처음으로 붉은 깃발이 바닷가에 들어온 곳은 기출변이라 부른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정중히 모셔 들여 함께 15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그러나 이때까지도 우리나라(고려)에는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이르지 않았고, 사람들이 기꺼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가야국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지었고 또 왕후사를 창건해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다. 아울러 남쪽 왜구를 진압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탑은 네모나게 4면이요, 5층인데 조각한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엷게 붉은색 무늬가 있고, 바탕이 아주 부드럽다. 이 지역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신농본초에 ‘닭 벼슬의 피를 찍어 시험한다’ 함이 이 것이다.금관국은 가락국이라고도 하고, 가락국 본기에 모두 실려 있다.석탑 실은 비단 돛배 붉은 깃발도 가벼이/ 신령께 빌어 험한 파도 헤치고 왔네/ 여기까지 이르려 한 허황옥만 도왔으랴/ 오래도록 남쪽 왜구의 침략을 막아주었네.◆금관성 파사석탑파사석탑은 경남 문화재 자료 제227호로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가야시대에 조성된 이형 석탑이다.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에 실어왔다는 돌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석질로 조성된 5층 석탑이다.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배필을 찾아 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시작했다. 풍랑을 만나 항해에 실패를 거듭하자 파도를 잠재우는 신령스런 힘을 가진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가락국에 도착해 김수로왕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허황후가 타고 온 배는 발굴 결과 배의 나뭇조각을 통해 최소 15m 크기로 30여 명이 탈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당시 아유타국, 인도와 가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가야지방의 고분에서 발견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인의 DNA와 비슷한 DNA가 나왔다는 것과 인도 미쉬라의 궁에 허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고, 출생지가 표시되어 있다는 것. 언어학계에서도 한국어와 인도의 타밀어에 발음이 같거나 의미가 같은 단어들이 400~500개나 있어 가야와 인도는 어떠한 형태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학계에서는 또 설화와 다른 의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2천 년 전에 수개월이 걸리는 대양을 건너온다는 것에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전문가들은 파사석이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것보다 배의 무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는 평형석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분석한다.파사석탑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 잘 나지 않는 돌인 파사석으로 구성됐다. 인도 남부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돌이다. 파사석은 본초강목에 일종의 약재로 해독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태우면 유황냄새가 나고 닭 벼슬의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피가 물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또 파사석탑의 조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풍랑을 만나도 안전하다는 설이 전해지면서 어부들이 바다로 나갈 때 파사석탑의 돌을 깨어가면서 석탑이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상황이라는 분석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파사석탑의 은혜인도에 천 년을 함께 살아온 거북이 칠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용왕도, 지상의 황제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우의가 좋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칠형제 중 막내가 용왕이 아끼는 닭을 모르고 잡아먹었다.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린 용왕이 거북이 칠형제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돌로 만들어버렸다.돌이 되어버린 거북이 칠형제는 비 오는 날에야 깨어나 하늘에 하소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천 년이나 먹고 살던 대로 했을 뿐인데 용왕님의 미움으로 꼼짝도 할 수 없는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라고 빌었다.상제도 용왕의 뜻에 반한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들이 내가 시키는 일을 해준다면 마음대로 나다닐 수는 없어도 뜻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거북이 형제들은 상제의 뜻에 따라 인도 아유타국 공주를 안전하게 대양을 건널 수 있도록 용왕 몰래 배에 올라 100일이나 거친 항해를 하면서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일을 했다.김수로왕은 왕비를 맞아 나라 전체에 잔치를 베풀었다. 또 상제의 말을 들어 허황후를 안전하게 데려온 거북이 형제를 왕궁의 뜰에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닭을 잡아 제를 올리는 의례를 갖추었다.용왕은 거북이 칠형제가 가야국으로 몰래 들어간 것을 알고 닭 잡는 인부들을 못살게 굴었다. 허기진 거북이들은 다시 용왕에게 하소연했다.용왕은 거북이 형제들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기로 했다. 대신 닭을 잡아먹었던 막내가 용궁에서 매일 아침 시간을 알리는 문지기가 되기로 하고, 거북이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모든 감정을 풀기로 했다.이후 가야국에서 겨울이 지나고 본격적인 어업을 시작하는 이월 초하루에 파사석탑 앞에서 거창한 제를 올렸다. 풍랑이 일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많은 고기를 잡아 잘 살 수 있게 해주길 기원하는 제를 올렸던 것이다.파사석탑으로 이름 지어진 거북이 칠형제는 허황후의 후손인 가야국 왕들의 소원은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그대로 들어주었다.특히 바다의 일을 부탁하는 일이라면 어김없이 소원을 들어주는 파사석탑의 영험함은 가야국 전체로 퍼져나가 백성들 모두가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바다로 나가는 백성들은 닭을 잡아 파사석탑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세월이 지나면서 파사석탑에 대한 전설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석탑의 조각을 품에 안고 바다로 나가면 아무리 거친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다는 소문이 번졌다. 이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남몰래 파사석탑의 조각을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급기야 석탑이 원형을 잃고 크게 훼손되면서 안전하던 가야국의 뱃길에도 다시 재난이 닥쳐왔다. 이러한 소문이 왕실에 전해지면서 파사석탑에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도록 누각을 지어 보호하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기행단 우중에 경주 남산 용장골 답사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삼국유사 기행단이 지난 12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주 남산 용장골 등을 답사했다.삼국유사 기행단은 이노버즈와 대구일보가 주관해 매월 삼국유사를 소재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역사문화 현장을 찾아간다.이날 기행단은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사전 신청을 통해 참여 인원도 20명으로 제한한 것은 물론 탐방도 마스크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진행했다.기행단은 서남산 용장리 주차장에서 출발해 길게 바위로 형성된 용장계곡을 따라 발걸음마다 드러나는 역사문화 현장을 더듬었다. 경주 남산의 서쪽 용장계곡에서 김시습이 은거했다는 용장사 절터와 은적골, 설잠교를 지나 용장사의 보물 3개소를 찾았다.용장사지에서 동쪽으로 100여m 지점에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오롯이 모여 있다.삼국유사에서 용장사지에 대해 자세하게 사연이 소개되는 내용은 유가종을 창시한 대현 법사편에 나타난다. 대현 대덕이 남산 용장사에서 지냈는데, 절에는 돌로 된 미륵보살의 장륙존상이 있다. 대현이 둘레를 돌 때면 불상도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지혜롭고 영리해 이 땅의 후배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중국의 학사들도 가끔 그의 글을 보며 안목을 틔웠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지금 용장사지의 석조여래좌상이 일연이 말한 그 불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둥근 대좌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불상의 수인과 독특한 옷매듭 등은 아직도 많은 연구를 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다”고 설명했다.기행단은 남산에 뿌리를 둔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삼층으로 쌓아 올린 석탑을 둘러보고, 다시 비를 맞으며 정상으로 걸음을 옮겨 삼화령으로 전해지는 곳의 거대한 연화대좌를 찾았다.삼화령에 대해 삼국유사는 두 가지 이야기를 싣고 있다. 경덕왕이 삼화령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차 공양을 하고 내려오는 충담스님을 초대해 안민가를 짓게 했다는 이야기. 또 선덕여왕 때 생의 스님이 꿈에 승려가 이끄는 대로 남산에 올라 풀을 묶어 표시해 두고 다음날 그 땅에서 돌미륵을 꺼내 삼화령에 두고 생의사라 이름지었다는 내용이다.김 소장은 “경주 남산에는 삼화령으로 추정되는 곳이 두 곳”이라며 “모두 그럴듯한 유적이 있어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9) 사불산 굴불산 그리고 만불산

삼국유사를 자꾸 읽어갈수록 신라는 역시 불국의 나라였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불산과 굴불산의 믿기지 않는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의 현존함이 신화 같은 유사를 역사로 받아들이게 한다.또 당나라 황제를 감탄하게 한 만불산을 조각한 신라의 불심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감각과 과학적 기술력은 수십 세기를 훌쩍 뛰어 넘어도 신비롭고 감탄스럽다. 이는 신라의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삼국유사가 의도한 제작의 목적을 보는 듯하다.문경 대승사의 사불산 사불암, 경주 금강산 백률사의 굴불암, 그리고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만불산의 흔적을 더듬어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소개한다.◆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그리고 만불산죽령의 동쪽 100리쯤에 우뚝 높이 선 산이 있다. 진평왕 9년 갑진년이었다. 4면이 널찍하고 사방여래를 새긴 큰 바위 하나가 갑자기 하늘에서 그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모두 붉은 실로 감싸 있었다.왕이 이를 듣고 가마를 타고 가서 우러러 경배하고, 바위 옆에 절을 지었다. 이름은 대승사이다. 비구승 망명을 불러다 연경을 외게 하고 절을 주관하되 돌을 깨끗이 하고 향불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부르기를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했다.비구승이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고 나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올랐다.또 경덕왕이 백률사에 갔을 때였다. 산 아래 이르자 땅 속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보게 했더니 큰 돌이 나왔는데 4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지어 굴불사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은 잘못 불러 굴석이라 한다.왕이 또 당나라 대종황제가 불교를 매우 숭상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기술자들에게 다섯 빛깔 나는 담요를 만들고, 또 침단목과 좋고 아름다운 옥으로 새겨, 높이가 한길쯤 되게 산 모양을 만들어 담요 위에 올려놓았다.산에는 깎아지른 바위와 기이한 돌 그리고 물이 솟아나는 구멍을 띄엄띄엄 만들었다. 한 구획마다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여러 나라 산천의 모습과 산들바람이 집안으로 들어가고 벌 나비가 날아다니며 제비와 참새가 춤추는 모습이 은은히 숨어 보이는데 실제인지 만든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그리고 그 안에 1만 개의 불상을 모셨다. 큰 것은 1촌이고 작은 것은 8~9분쯤 되었다. 그 머리는 큰 기장 알만한 것, 콩 반쪽만한 것도 있고, 골뱅이처럼 틀어 올린 머리카락 모양과 두 눈썹 사이의 백호, 눈썹과 눈까지 또렷했다. 모두 갖추어진 모습을 비슷하게는 설명하겠지만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만불산이라고 했다.다시 금과 옥을 아로새겨 깃발과 일산 그리고 우거진 치자나무 꽃 열매 등과 장엄하게 100보가 되는 누각과 본당, 강당도 만들었다. 대체적으로 작기는 하나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앞에는 비구상 1천여 개를 돌아다니듯 만들고, 아래에는 자줏빛 금종 세틀을 늘어놓았는데 모두 종각과 좌대가 갖추어졌다. 고래 모양으로 쇠 부채를 만들어 놓고, 바람이 불어 종이 울리면 돌아다니던 승려들이 모두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는 것 같았다. 은은히 염불소리가 들리니 이는 종에서 나는 것이었다. 비록 만불이라 부르기는 하나 그 실제를 다 적을 수 없다.다 만들어지자 사신을 보내 바쳤다. 대종은 이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신라 사람들의 재주는 하늘이 만든 것이로군. 사람의 솜씨가 아니야.”이에 구광선으로 바위 사이에 덮어두니 이 때문에 불광이라 불렀다. 4월8일에 두 거리의 승려들을 내도량으로 불러 만불산에 예배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삼장 불공에게 밀교의 경전을 천 번 되풀이 염송하며 경하하도록 했다. 보는 이마다 모두 그 솜씨에 탄복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신라 35대 경덕왕은 34대 효성왕의 동생이다. 경덕왕은 742년에 즉위해 765년까지 23년간 왕위에 있었다. 이때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안정적이고 힘이 팽창했던 시기다. 문화 예술적으로도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때로 드러난다.경덕왕은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안정적인 나라로 운영하기 위해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랑주를 양주로 고치는 등 지명을 고치고, 제도를 개편하는 한편 관직의 명칭도 대거 바꾸었다.또 경덕왕은 불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불국사와 석굴암, 굴석사와 대승사 등의 많은 불사를 진행하며 표훈대사 등의 승려들에 대한 대우를 특별히 높였다. 특히 불사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기 위한 애착 때문이었다.경덕왕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무섭도록 강했다. 첫 번째 왕비 김순정의 딸 삼모부인이 아들을 잉태하지 못하자 성급하게 둘째 왕비로 김의충의 딸 만월부인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만월부인에게서도 아들이 생기지 않아 경덕왕은 급기야 표훈대사를 통해 천제께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표훈대사는 당시 불국사에 머물러 있었다. 표훈대사의 법력은 이미 일반성인의 수준을 넘어 하늘을 오가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경덕왕의 부탁은 표훈대사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표훈은 경덕왕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굴불사 부처에게 일을 의뢰하기로 하고 행장을 꾸려 굴불사로 향했다. 굴불사의 사면불에는 아홉 부처가 모두 특별한 능력을 자랑하며 각자 동서남북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표훈은 이미 아홉 부처 중 상제와 잘 통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부처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경덕왕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서쪽의 아미타 삼존불이었다.이들이 경덕왕을 기껍게 생각하는 것은 1천여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자신들을 기꺼이 지상으로 불러내어 절을 지어 백성들이 매일 거르지 않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표훈은 굴불사의 사방불 앞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한 거대한 상을 차렸다. 불상 주변에 팔색의 화려한 비단을 두르고, 매 끼마다 온갖 산해진미로 산처럼 먹을 것을 쌓아 정성을 드렸다. 매일 새벽 몸을 정갈하게 하고 사방불의 서쪽에서 아미타삼존불을 마주하고 앉아 기도를 드렸다.그의 깊은 정성에 삼존불은 21일 만에 감응해 표훈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당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삼존불의 물음에 표훈은 “천년 사직을 이을 기둥을 얻고자 하옵니다”며 간절한 목소리로 아뢰었다.삼존불은 각자 “우리가 아들딸을 점지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경영할 재목은 하늘의 뜻이니 천제께 부탁을 드려야 한다”며 일의 중대함을 이야기 하고 천제가 아끼는 우협시보살이 일을 맡기로 했다.우협시보살이 순식간에 날개를 펄럭여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나를 닮은 딸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신다”며 천제의 이야기를 전했다. 표훈은 경덕왕에게 하늘의 뜻을 아뢰자 한사코 아들이어야 한다고 다시 당부하게 했다.이에 표훈이 경덕왕의 완고한 의지를 전하자 좌협시보살이 담당하기로 하고 사방불에서 몸을 날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제의 고집도 좀체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미타삼존불과의 두터운 친분 때문에 천제도 어쩌지 못하고, 우협시보살의 얼굴을 닮은 아들을 약속했다.자신의 의지를 꺾게 한 경덕왕의 고집에 천제는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천년 신라의 사직을 기울게 하는 역사를 써버렸다.하늘에 빌어 아들을 얻은 경덕왕은 기쁨에 겨워 표훈대사에게 크게 감사하며 불국사에 만결의 토지를 희사했다. 이어 온 나라에 축복하는 분위기를 담아 1년간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케 했다.그러나 재앙의 씨앗은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경덕왕의 심부름을 했던 사방불의 좌우 협시보살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굴불암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별개의 조각으로 떨어진 채 서있다.경덕왕은 아들을 얻었지만 7년 만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아들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36대 혜공왕이 되었지만 숙부 언승과 김경신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본격적인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이 시작되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8) 영묘사 장륙

영묘사는 전불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시대에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도깨비들이 하룻밤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선덕여왕이 영묘사 법회에 참석했다는 기록으로도 절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유명사찰이었던 만큼 전하는 설화도 다양하다.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가 심화로 절을 태워버린 이야기는 유명하다.영묘사에는 신라시대 승려이자 조각가요 도술가, 예술인으로 전해지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여럿이다. 향가로 전하는 영묘사의 장륙존상과 목탑,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의 글씨도 양지 스님의 솜씨다.영묘사는 기록으로도 전하는 것처럼 유명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절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다. 흥륜사지로 전해지면서 사적 제15호로 지정했지만 이곳에서 영묘사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지로 전해지고 있다.여기에서 발굴된 얼굴무늬수막새는 2018년 11월27일 대한민국 보물 제2010호로 지정됐다.◆삼국유사: 영묘사 장륙선덕왕(재위 632~647)이 절을 짓고 소상을 만든 인연은 모두 ‘양지 법사전’에 실려 있다.경덕왕(재위 742~765) 즉위 23년(764)에 장륙존상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비용이 조 2만3천700석이 들었다.양지전에서는 불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하였다. 지금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둔다. ◆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시 635년에 창건된 규모 있는 사찰이다. 영묘사에는 당시 최고의 장인으로 전해지고 있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많다. 양지 스님은 영묘사 전탑의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도 직접 썼다고 전한다.특히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든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장륙존상은 흙으로 빚었는데 이때 도성의 백성들이 흙을 나르며 부른 향가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더럽도다 이 몸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는 풍요다.장륙존상은 경덕왕 때 금으로 칠했다는 기록도 있다.영묘사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있다. 경주 송화산 기슭 서천변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는 설과 부 서쪽 5리에 있다는 기록, 동천동에 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1976년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 흥륜사지 발굴에서 ‘대령묘사조와’라는 기와편이 발견된데 이어 지속적으로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현재의 흥륜사지가 영묘사지라고 결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발굴조사에서 명문기와편과 금당지, 목탑지, 기단유구, 동서회랑지 등이 발견되면서 영묘사는 삼국시대에 이미 창건되어 선덕여왕과 통일신라 이후에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영묘사는 조선 중종 재위기인 1515년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묘사 지귀와 선덕여왕 설화선덕여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받았다. 여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 활리역의 지귀라는 젊은이도 사람들 틈에서 여왕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선덕여왕을 부르다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의 행차에 지귀가 백성들 틈에 나타났다. 지귀가 선덕여왕을 부르며 뛰어가자 관리들이 그를 잡았다. 이 소란을 지켜본 선덕여왕이 관리에게 연유를 물었다.지귀가 여왕을 사모하여 미쳐 쫓아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은 관리에게 지귀가 자신을 따라오게 하라고 전했다. 지귀는 기뻐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을 따라갔다. 여왕은 영묘사 법당에서 불공을 드렸다.지귀는 여왕이 불공을 드리는 동안 목탑에 기대어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렸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나오다 잠든 지귀를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벗어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두고 돌아갔다.지귀가 잠에서 깨어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그 기쁨은 불씨가 되어 지귀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라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불은 지귀가 잡고 있던 목탑에 옮겨 붙어 순식간에 탑을 태웠다. 지귀는 온 몸에 불이 활활 일어나는 불귀신이 되었다.여왕은 술사에게 명하여 지귀의 불에서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을 짓게 해 백성들에게 돌렸다. 이때부터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이 생겨났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년의 미소선덕여왕이 도깨비들에게 명하여 연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립했다. 이 때문에 연못에 살며 도를 닦던 이무기가 승천의 기회를 놓쳐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에게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그 이무기는 이미 상당한 도력을 지녀 사람으로도 변신하는 재주를 가졌다. 이무기는 영묘사 불목하니 지귀로 변신해 영묘사의 온갖 일에 간섭하며 방해했다.지귀는 노골적으로 부처의 권한을 가로채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영묘사의 기도효험이 높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을 모시는 법사의 도력이 높아 이무기의 장난을 알아채고 여왕에게 이를 아뢰었다.선덕여왕은 법사의 방침에 따라 양지에게 장륙존상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양지 스님도 법력은 이무기의 재주에 못지않았다.양지는 이무기의 방해를 미리 알아차리고, 전국에서 백성들이 장륙존상을 조성하는데 참여하게 했다.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땀 냄새가 진동하게 하려는 것이 양지의 비방이었다. 그러나 불상을 조성하는 백성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이무기는 조성해둔 불상을 허물어뜨렸다.이를 지켜본 양지가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나타나는 이무기의 목을 잡고 물었다. “네 녀석이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국사로 진행하는 불사를 함부로 망치는 일은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어르고는 “네 사정을 알고 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합당한 보상을 할 테니 말하라”고 타일렀다.지귀로 변한 이무기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선덕여왕이 나를 망치게 했으니 선덕여왕과 혼인하게 해 달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양지는 “여왕은 나라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로운 개인과 혼인할 수 없다. 네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면 죽여 후환을 없애겠다”고 으르자 지귀가 납작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지귀는 빌면서 “그렇다면 여왕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제게 주신다면 가슴에 품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살겠다”고 말했다.양지는 지귀가 기어이 영묘사를 허물어뜨리려 한다는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알았다. 여왕님의 금팔찌를 선물하도록 주선하겠다”고 달래어놓고 장륙존상을 완성했다.양지는 장륙존상을 완성한 다음날 여왕이 장륙존상에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금팔찌를 얻어, 불씨를 주술로 심은 뒤 지귀의 가슴에 얹어 주었다. 지귀는 여왕의 팔찌를 보고 기쁨에 겨워 가슴 깊숙이 간직했다. 그러나 그 금팔찌가 자신을 태워 죽이는 불씨라는 것을 지귀는 꿈에도 몰랐다.선덕여왕이 왕궁으로 돌아간 뒤 지귀는 불귀신이 되어 목탑을 태우고 금당으로 뛰어들었지만 장륙존상이 뿜어내는 불력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지귀는 한 줌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7)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신라 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의 문화예술을 비롯해 정치적으로도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시기의 왕이다. 경덕왕이 불교적인 면에서 이룬 업적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흔적들도 많다. 가장 큰 불교적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들 수 있다. 또 성덕대왕신종, 황룡사종, 분황사 약사불 주조 등의 큼직한 일들이 경덕왕 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특히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에 이르는 거대한 황룡사대종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최근까지 바다 아래서 발견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신고에 따라 문화재청이 나서 발굴 작업을 펼치기도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몽고란 때에 동해천으로 싣고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바다에 침몰되었다는 설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양북면 봉길리 마을에는 예부터 태풍에 파도가 몰아칠 때면 바다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는 구전도 신빙성 있게 들린다.분황사 약사불 또한 거대한 크기로 조성되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봉덕사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던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곳으로 이동되면서 경주지역의 명물로 주목받다가 국보 제2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삼국유사: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신라 제35대 경덕대왕(재위 742~765)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니, 종의 길이는 1장3촌이고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천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 이찬과 삼모부인이요, 장인은 이상택 하전이었다. 고려 숙종조(1095~1105)에 새로운 종을 만드니 길이가 6척8촌이었다.또 이듬해 을미(755)에 분황사의 약사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6천700근이며, 장인은 본피부 강고 내말이었다.왕은 또 황동 12만 근을 희사해 아버지 성덕왕(재위 702~737)을 위한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혜공왕(재위 765~780) 건운이 대력 경술(770) 12월에 유사에 명해 공장들을 모아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봉덕사는 효성왕(재위 737~742)이 개원 26년 무인(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에 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이니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를 위해 시주한 쇠이므로 성덕종이라 한 것이다.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랑 김필월이 교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장황해 수록하지 않는다.◆봉덕사와 봉덕사종-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이다. 봉덕사는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과 효성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는 기록들이 있다.또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하기 시작해 효성왕 시대에 완공해 성덕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몰되어 종을 제외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는 봉덕사종은 신라 혜공왕이 주조한 종으로 구리 12만 근이 들었다. 종을 치면 소리가 100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에 침몰하자 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했다.-봉덕사종은 종신에 새겨진 이름에 따라 성덕대왕신종으로 불린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덕을 기리며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했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왕실에서 왕권의 권위와 존엄성을 드러내고 왕실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주조했다는 것과 경덕왕이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해석한다.종은 771년에 완성해 봉덕사에 달았다. 조선시대 수해로 봉덕사가 수몰되자 영묘사로 옮겼다. 다시 봉황대로 옮겨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달았다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준공되면서 옮겨 관리하고 있다.1992년 제야의 종으로 33번 타종한 뒤 중단했다가 학술조사를 위해 1996년 다시 타종하고, 2001년 10월9일, 2002년 10월3일, 2003년 10월3일 타종행사 이후 안전을 위해 타종을 완전히 중단했다.-분황사 약사여래불은 무게 30만6천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이었다는 기록이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1998년 분황사 보광전을 고쳐짓기 위해 해체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한 기록에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다. 현재 불상은 1609년에 동 5천360근으로 조성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현재 약사불의 왼손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갑오년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기 어렵다.현재 보광전의 약사불은 불상의 얼굴이 둥글고 육감적이며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옷 주름 표현과 전체적인 조형기법, 보광전 보수 때 발견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이 불상은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은 우선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봉덕사종은 황룡사종의 1/4에 불과했지만 봉덕사종 역시 황동 12만 근으로 만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종이다. 사찰의 종을 이렇게 엄청난 크기로 조성한 배경에는 왕실의 권력다툼이 숨어있다.종을 치면서 기원하는 일은 부처 앞에서 기도로 염원하는 일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소리의 울림을 통해 세상에 전파되면서 공명하여 뜻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경덕왕은 통일신라의 최고 절정기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해 왕위세습에 대한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다.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낳는 일이 안정된 왕실을 바탕으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경덕왕은 소원하는 바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고, 황룡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는 일이었다.종의 규모가 클수록 소원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경덕왕은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왕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폐비되어 출궁된 삼모부인이 종을 만들기 위한 49만7천581근의 무쇠를 경덕왕에게 시주했다.황룡사대종이 엄청난 크기로 주조돼 황룡사에 걸리자 귀족들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폐위된 삼모부인의 시기하는 마음이 후비로 들어온 만월부인의 태기를 가로막아 왕자를 보기 어렵게 할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암중세력다툼으로 번졌다.급기야 만월부인은 아들이 생기지 않자 경덕왕에게 부탁해 최고의 장인을 불러 신종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의 덕을 기리고 백성들의 안녕과 나라의 홍복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봉덕사를 짓고, 봉덕사종을 주조하도록 명했다.봉덕사종의 주조가 늦어지자 만월부인은 경덕왕을 통해 황룡사대종 타종을 금지토록 했다. 경덕왕은 “황룡사대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전쟁에 나아갈 때와 정월초하루 제례 외에는 타종을 금하라”며 엄명을 내렸다.황룡사대종을 타종하고 전쟁에 나아가면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서도 군사들이 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몽고 군사들은 신라의 국경을 넘어서면서 첩자를 보내 황룡사대종의 목어를 숨겨버렸다. 황룡사대종 타종을 못하고 몽고전에 출전한 신라 군사들은 맥없이 쓰러지고, 결국 황룡사까지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황룡사대종의 신비한 힘을 믿은 몽고군은 배를 이용해 대종천으로 종을 실어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에 가라앉아버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에서 세계문화유산축전 달빛기행 이벤트에 관광객들 호응

피서 철을 맞아 지난 주말 경주에서 진행된 세계문화유산축전 달빛기행에 경주시민과 관광객이 참여해 신라 천 년의 야간 문화를 답사했다.신라문화원이 주관한 이번 달빛기행 참가자는 온라인 신청 및 현장 접수를 통해 200명의 참가자를 모집했다. 첨성대 광장에서 진행된 세계유산축전은 달빛기행, 천문학 만들기 체험, 천체관측, 우주특강 등 내용으로 전개됐다.달빛기행에는 대부분 가족, 연인들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무더위에도 등불을 들고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첨성대, 계림, 교촌마을, 월정교 등을 둘러봤다.첨성대에는 선덕여왕이 왕관을 쓰고 움직이는 포토존이 설치돼 인기를 끌었다.월정교에서는 삿갓을 쓴 원효대사로 분장한 뮤지컬 배우와 문화해설사가 요석공주와의 설화에 대해 설명했다.계림에도 야간 조명등을 밝혀 멀리 내물왕릉과 고분들의 능선이 푸르게 드러나면서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이 늦은 시간까지 줄을 이었다.달빛기행 참가자들은 문화유산 답사에 이어 첨성대 앞에서 국악 공연, 천문관측, 향가 안민가의 정가 따라 부르기 등을 체험했다.세계문화유산축전 달빛기행은 오는 22일과 28일에도 열린다. 온라인과 현장 신청을 받는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6) 황룡사 구층목탑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시대 건축 기술과 문화 예술적 감각을 자랑하는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목탑은 황룡사장륙존상, 진평왕 옥대와 함께 신라삼보에 손꼽힐 정도로 특별했다.황룡사 구층목탑은 천 년이 지나 획기적으로 발달한 현대 과학과 건축기술로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눈길을 끄는 순수 목조건축물의 기술과 탁월한 예술성을 자랑한다.역사학자는 물론 건축기술자들의 고증을 통해 순수 목조건축물을 높이 82m, 현대 아파트 30층에 이르는 건축물을 못 하나 없이 끼워 맞추기식의 공법으로 당당하게 세웠다.황룡사가 들어선 지역은 저수지를 메운 습지대로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건축물을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최고의 건축공법인 판축기법을 도입해 육중한 건축물이 지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신라 제27대 선덕왕(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했다.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족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 공공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자장은 이것이 바로 대성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중국의 태화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했다.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과 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신령스러운 사람이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자장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신하들과 의논했다.신하들이 “백제로부터 공장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했다. 아비지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 용춘이 일을 주관해 소장 200명을 인솔했다. 처음 찰주를 세우는 날에 공장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했다.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83척이다”고 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했다.이는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이른다. 신라삼보 때문에 그 모략을 중지했다. 주나라에 9정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설립기’에는 신라 제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이 침노했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이요, 제2층은 중화요, 제3층은 오월이요, 제4층은 탁라요, 제5층은 응유요, 제6층은 말갈이요, 제7층은 단국이요, 제8층은 여적이요, 제9층은 예맥이라고 했다.또 국사와 절의 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553년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대인 정관 645년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효소왕 즉위 7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했다. 경문왕(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본조 광종(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로 벼락을 맞아 현종(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 또 고종(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의 병화(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륙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의 울음선덕여왕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여왕은 백성들의 평화를 무엇보다 우선해 생각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심지어 왜에서까지 침략이 끊이지 않아 군사정책에 많은 고민을 했다.선덕여왕이 즉위 10년에 접어들 때 신하들이 왕의 고민을 헤아리고는 “당나라에 유학중인 자장법사의 법력이 뛰어납니다. 황제에게 간청해 자장을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심이 가한 줄 아뢰오”라며 간청했다.선덕여왕은 나라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헐벗음을 장구한 필설로 기록해 많은 보석들과 함께 당태종에게 보내면서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당나라의 황제는 여왕의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는 자장을 불러 크게 위로하면서 신라로 돌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을 타일렀다. 황제는 부처님의 사리 100낱을 선물하면서 “9층탑을 건설할 때 심초 석에 넣고 건축물을 세워 팔관회를 주관하며 지성으로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인근의 나라들이 항복해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자장이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며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건의했다. 여왕은 크게 기뻐하며 구층 목탑을 건축할 수 있는 장인 아비지를 백제로부터 초빙해 대역사를 시작했다.아비지가 주춧돌을 놓기 전날 백제의 궁궐이 불에 타는 꿈을 꾸고, 불안해 목탑 건축을 중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아비지의 꿈에 거대한 역사와 도사가 나타나 “이놈 이탑은 신라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왜 등의 만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건축하는 것이니 게으름을 피우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며 호통을 치고는 60여 개의 기둥을 세우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꿈에서 깬 아비지는 “이탑은 운명적으로 세워야 할 신의 탑”이라 생각하고 즉시 서둘러 목탑 건축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황룡사구층목탑은 장륙존상과 같이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심초석이 울며 몸을 흔들어 건물 전체가 지진이 온 것처럼 흔들렸다.탑이 645년 완공된 이후 처음 흔들린 것은 647년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다. 기와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렸고, 결국 선덕여왕은 이 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다시 목탑이 흔들린 것은 당나라가 50만 수군을 동원해 신라로 진격해 올 때였다. 견훤이 서라벌로 진격해 올 때와 몽고군이 신라를 유린할 당시 1238년에는 기왓장이 떨어지고, 지붕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며 심초석이 소리 내어 울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5) 황룡사 장륙

신라 24대 진흥왕은 삼촌이자 외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불교를 지향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삼국유사: 황룡사 장륙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태자는 왕에게 “힘만으로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 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불상이 완성되자 동축사의 삼존불도 이 절로 모셔왔다. 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평왕 5년 갑진년(584)에 금당을 만들었다. 선덕왕 때 절의 첫 지주는 진골인 환희사이고, 2대는 자장 국통, 다음은 혜훈 국통, 다음은 의상 율사이다.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다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에 깃든 진흥왕의 통치이념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진흥왕의 군사진영이 짜여지자 곡창지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성왕을 죽이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로 삼았다.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왕의 반문에 미실은 “왕궁의 규모와 같은 절을 지어 백성들의 평화와 부강한 나라를 기원하는 법회를 지속적으로 올린다면 귀족은 물론 백성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왕실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고 했다.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황룡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왕궁과 맞먹는 대규모의 사역을 자랑하며 최고의 국찰로 완성됐다.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4 가섭불연좌석

삼국유사 9편 중 네 번째가 탑상편이다. 탑상은 30여 꼭지의 탑과 불상에 대한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탑상편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가섭불연좌석이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의 일곱 부처 중 여섯 번째 부처로 석가모니의 스승이라고도 전한다. 가섭불연좌석은 가섭부처가 앉아 참선하던 자리라는 뜻이다. 황룡사에 가섭불이 참선하던 자리가 있다고 일연스님이 소개한 것이다. 신라는 불교와 일찍부터 인연이 지어진 땅이다. 석가모니 이전부터 칠불이 신라 일곱 곳의 절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금당의 주춧돌이나 불상을 떠받치고 있었던 대좌, 탑의 기초석과 같은 석물들에서 지나간 시대의 일들을 유추해 볼 뿐이다. 가섭불연좌석 또한 삼국유사 기록이 남긴 오랜 시간 이전의 사실들을 더듬어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 어떠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일까. 한 겹씩 벗겨보는 학자들의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불가사의한 이야기, 가물가물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희미하게 남은 흔적에서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의 연좌석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본다.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서 모두 “신라 월성 동쪽의 용궁 남쪽에 가섭불 연좌석이 있다. 이 땅은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절터였다. 지금 황룡사 땅은 곧 일곱 절터 중 하나”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은 계유년(553)인데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의아하게 여겨 황룡사로 고쳐지었다. 연좌석은 불전의 뒷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한번 뵌 적이 있다. 돌의 높이가 대여섯 척은 되고, 둘레가 거의 세 주쯤 되는데, 깃대처럼 우뚝 서 있고 이마 부분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지은 다음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는 깨진 곳이 있었다. 절의 승려가 철을 발라 보호하고 있었다. 찬한다. 지나온 부처님의 시대 다 적지 못하나/ 오직 연좌석은 남아 의연하구나/ 뽕나무밭은 몇 번이나 바다로 변했던가/ 외로이 우뚝 서 상기도 변함없네. 얼마 후 몽고군의 침략을 받은 다음 불전과 탑은 타버렸고, 이 돌 또한 매몰되어 거의 땅 높이와 비슷해졌다. 아함경을 살펴보자. “가섭불은 현겁의 세 번째 부처님이시다. 사람 나이로 2만세 때에 세상에 나타나신다.” 이를 근거로 증감법을 가지고 계산해보자. 성겁의 처음에 매번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사셨다. 점점 줄어서 나이가 8만세에 이르렀을 때가 주겁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백년에 1세를 줄여 10세를 누리셨을 때 1감이 되며, 또 늘어나 사람의 나이 8만세에 이르렀을 때 1증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감과 20증이 1주겁이다. 1주겁 가운데 1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다. 지금 우리 스승 석가는 네 번째 부처님이시다. 석가세존부터 지금 지원 18년 신사년(1281)까지는 세월이 벌써 2천2백30년이다.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만 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조정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었는데 “금나라 정우 7년 기묘년(1219)으로부터 거꾸로 세어서 4만9천6백여 년에 이르면 반고가 개벽한 무인년이다”라고 했다. 여러 경전을 살피건대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이 돌의 수명이다. 그러나 겁초 개벽할 때부터 시간에 비하면 어린애다. 세 사람의 설명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개벽설에 대해서 몹시 소홀했던 것 같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신라 눌지왕 때 왕궁의 동쪽에 용궁사라는 절이 있었다. 용궁사 앞뜰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고, 황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절의 주지는 가섭이라는 스님으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도인처럼 생긴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가섭은 평소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상적인 대화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며 상대를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가섭은 낮에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절 뒤편에 사람 키 높이의 돌기둥 위로 올라가 날이 밝을 때까지 참선에 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또 어떤 날은 3일 밤낮으로 석주에서 기도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가섭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그에게 지도받으려는 승려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궁사는 서라벌의 백성들은 물론 국내외에서 몰려드는 사람으로 북적거리며 서라벌의 중심이 되자 왕실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바다 건너 천축국에서 여러 승려들이 용궁사로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중 귀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며 기이하게 생긴 싯달타라는 승려가 있었다. 싯달타는 가섭과 문답을 시작하면 하루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몰입했다. 그가 후에 부처가 되었던 석가모니다. 눌지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백제와 왜는 첩자를 보내와 정탐하며 수시로 국경을 침범해 오는 통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용궁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자 왕궁에서는 백제 등의 첩자들이 활동하는 근거지가 될 것으로 우려해 감찰부에서 조사를 했다. 사실 용궁사에는 백제와 왜의 첩자들이 승려를 가장해 숨어들어 활동하고 있었다.가섭은 왕궁에서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자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백제와 왜에서 오는 첩자들을 선별해 왕궁에 은근히 밀지를 넣어 알리기도 했다. 가섭은 또한 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신라를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끝내 왜의 첩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왕궁의 군사가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왜의 첩자 긴모리와 언쟁 끝에 조사하던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실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전국의 사찰을 모두 문을 닫게 명령을 내렸다. 신라에 일곱 군데서 운영되고 있던 절이 모두 산문을 닫고 폐사에 이르렀다. 용궁사의 문도 굳게 닫혔다. 가섭은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궁사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섭불연좌석만 벌판 가운데 우뚝 서서 절이 있었던 곳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가섭불연좌석은 그냥 두었다. 승려들과 불교를 공부하던 신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신라의 불교는 반짝 번창하려다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불교의 씨앗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3) 흥륜사 금당십성-혜공과 혜숙

혜공과 혜숙은 같이 신라 십성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일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특히 혜숙은 더 그렇다. 그렇지만 두 성인은 도력이 높아 일반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으나 불교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신라시대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이 출세할 수 있었던 시대로 읽혀진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들의 이력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 등의 이력을 흔히 볼 수 있다. 혜숙 스님은 화랑 출신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몸으로 깨우침을 주었다.혜공 스님과 원효대사가 도력을 시험하는 이야기는 설화로 전해 내려오며 오어사라는 사찰 이름까지 남겼다. 기행을 일삼았던 신라십성 혜숙과 혜공 스님의 이야기를 더듬어본다.◆삼국유사: 혜숙과 혜공의 삶-혜숙 스님은 호세랑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 혜숙이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은거해 20여 년을 보냈다.때마침 국선인 구참공이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되었다. 구참공이 가는 길가에 혜숙이 나와 말고삐를 잡으며 “저 또한 따라가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공이 허락했다.사냥하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치달으며 옷소매를 걷고 서로 앞서거니 요란스러웠다. 공은 흐뭇했다. 잠시 쉬면서 여러 줄로 앉아 고기를 삶아 다투어 먹고 권하고 했다. 혜숙 또한 더불어 씹어 먹는데 꺼려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다 구참공의 앞에 나아가 “이제 이보다 더 좋고 신선한 것이 있으니 바칠까요”라고 하니 “그래, 좋다”고 했다.혜숙은 사람들을 물리고 허벅지 살을 베어 쟁반에 올려 바쳤다.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공은 깜짝 놀라 “어찌 이다지 지독한 짓을 하는가”라고 물었다.“처음에 저는 공을 인자한 사람이며 만물과 통할 수 있는 분이라 여겨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살펴보니 공께서는 죽이는 데에만 온통 푹 빠져 있으시고, 남을 헤쳐 자신만 살찌우려 하니, 어찌 군자가 할 짓이겠습니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고 꼬집고는 옷을 털고 가버렸다.공은 대단히 부끄러워졌다. 혜숙이 먹던 쟁반을 보니 생고기가 그대로였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조정에 돌아와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아 들이도록 하였다. 혜숙은 부녀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사신이 더럽게 여기고 7~8리쯤 돌아오는 길에서 혜숙을 만났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성 안 우리 신도 집의 칠일제에 갔다가 파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 신도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얼마 있지 않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의 동쪽에 묻어주었다. 마을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현의 서쪽에서 오다가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 가는가 물었더니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다른 지방에 가고자 하네.”서로 절을 하고 헤어졌다. 반리쯤 갔는데 구름을 타고 멀어졌다. 그 사람이 이현의 동쪽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있었던 일을 말했다. 무덤 안을 보니 오직 가죽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절이 있는데 이름이 혜숙사이니 그가 거처했음을 말한다. 또한 부도가 있다.-혜공 스님은 천진공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의 이름은 우조였다.천진공이 일찍이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때 우조의 나이 일곱이었다. 우조는 어머니에게 공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라 말하고 공의 침실로 찾아가 저절로 병이 낫게 했다.우조가 커서 공의 매를 길렀는데 공의 뜻에 꼭 들어맞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공은 우조가 성인임을 늦게야 깨달았다.“내가 지극한 성인이 우리 집에 맡겨진 것을 알지 못하고 헛말과 비례로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구나. 그 죄를 어찌 씻겠는가? 이후로는 인도자가 되어 저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는 내려와 절을 했다.신령스런 이적이 드러나면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이라 했다. 혜공은 작은 절에 머무르며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그래서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거처한 절도 그런 까닭에 부개사라 했다. 이는 삼태기의 신라 말이다.또 절의 우물 가운데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기도 했다.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이 이를 보고 나오리라는 신호로 알았다. 그렇게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묻곤 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똥을 누었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쳤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 지었다.또 하루는 새끼줄을 꼬아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 그리고 남문의 회랑 둘레를 묶었다. 강사에게 이 새끼줄을 3일 뒤에 거두라고 일러두었다. 강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따라 했다. 드디어 3일이 지나 선덕여왕의 가마가 절 안으로 들어오자 지귀가 불을 질러 그 탑을 태우는데 오직 새끼줄로 묶어둔 곳만은 화를 면하였다.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으며 마지막에는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과 원효의 도술 시합혜공은 부궤화상이라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삼태기를 짊어지고 시장바닥이든 야산이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 곳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혜공은 이미 아무렇게 행동해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자연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기인의 이적을 일으키곤 했지만 누구도 그 행적을 알아채지 못했다.다만 고선사와 기림사에 머물며 대승불교론을 써내려가던 원효대사는 그의 행적과 높은 공부를 이해하고 가끔 선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원효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혜공의 기행을 부러워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깨우침에 적극 나서길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혜공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며 웃음으로 넘겨버렸다.원효가 혜공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에 장난을 부렸다. 혜공이 잠든 틈에 그의 삼태기에 죽은 쥐 여러 마리를 넣어두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채소더미로 보였다. 일어난 혜공은 삼태기에 가득한 채소를 보더니 소여물을 삶는 농부의 솥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쥐는 이미 채소로 변한 채 소여물이 되었다.다음 원효가 항사사로 옮겨가 있는 혜공을 찾아갔다. 이때 혜공이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플 텐데 물고기나 잡아먹자”고 권했다. 원효는 먼저 장날 쥐로 장난한데 대한 복수라 생각하고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둘은 어린아이들처럼 물가를 첨벙거리며 고기를 잡아 배부르게 구워먹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마주보며 물가에서 변을 보았다. 배설되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되어 상류로 힘차게 헤엄쳐갔다. 그중 하나가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며 춤추듯 두 사람을 선회하다가 또한 상류로 유유히 사라져갔다.이를 보고 둘은 서로 “저 녀석은 내 고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여시오어(如是吾魚)’라는 말이다. 이 말로인해 혜공이 머물던 항사사의 이름이 오어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기행단 삼화령미륵불의 비밀 찾아 남산 기행

삼국유사기행단이 장맛비가 내린 가운데 경주 남산에서 삼화령미륵불 출토 현장과 남산신성 흔적을 찾아 답사기행을 진행했다.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기행단 30여 명은 지난 25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과 중사 미륵불과 십일면관음상을 찾아보고 경주 남산과 낭산을 둘러보는 답사를 이어갔다.이날 답사는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해설로 진행됐다. 기행에는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 한순희 전 경주시의회 문화행정위원장, 이상애 전 경주시 공보관, 손은조 시인 등의 문화인과 부산, 울산, 포항 등에서도 함께 참여해 역사문화에 대한 열기를 보였다.기행에서 경주박물관 옥외전시실의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성덕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구리 12만근으로 주조하기 시작해 혜공왕 7년 771년에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는 내용과 영묘사, 봉황대, 경주문화원, 박물관 등으로 이동경로까지 분석했다. 김구석 소장은 성덕대왕신종의 특징과 한국종과 외국종의 비교까지 상세하게 해설했다.경주 남산에서는 화백제도가 밝혀진 경위를 설명하고, 진덕여왕 당시 우지암에서 신라 대신들이 회의를 진행하면서 호랑이가 나타난 이야기와 김유신의 위상에 대한 당시 시대적 분위기 등도 구수하게 풀었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남산신성은 문무왕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된 문헌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특히 대규모로 지어진 창고는 나라의 무기와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가 아니라 문무왕의 개인적인 창고”라고 이색적인 해설을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또 최근 발견된 경주 남산의 토성과 남산신성의 축성 흔적, 남산신성의 북문지 등을 돌아보며 “남산신성의 둘레는 약 4.6㎞의 거리로 기록과 남아 있는 흔적이 일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네 자매가 함께 참석한 이상애 가족은 “역사문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배우고, 또 다른 문화콘텐츠를 육성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꾸준히 기행에 참석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