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삼국유사 기행(10)- 실성왕

역사는 상상이다. 누구도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보지 않은 1천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제18대 왕인 실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시대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더욱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삼국유사는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 즉위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당시 주변 정세 등을 두고 온갖 정황을 역사적 사건과 가치 기준에 빗대어 해석하고 있다. 어차피 오래된 시간이 만든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덧대어 추정한 것에 불과해 사실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성왕의 죽음과 내물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이동 과정을 상상해 본다. ◆삼국유사 실성왕의희 9년 계축(413)에 평양주의(지금의 경기도 양주)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함을 미워하고 꺼려서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곧 창을 뒤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당시 기록 속의 왕들△내물왕: 내물왕은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 신라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세습체제를 갖추었다. 내물왕은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석씨의 피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다. 김씨로 왕권을 거머쥐었지만, 석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 대에는 백제와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야 했다. 당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왜와 가깝게 지내면서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내물왕 때에는 가뭄과 지진도 자주 일어나 자연재해를 많이 입었다. 농사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 농사를 포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백제의 힘을 등에 업은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내물왕 재위 9년에 이어, 38년에는 왜군들이 금성을 에워싸고 5일간이나 물러가지 않았다. 내물왕은 적들이 배를 타고 육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 기병을 앞세워 크게 무찔렀다. 재위 44년 399년에도 백제를 등에 업고 수도까지 침략해 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 국경지역으로 들어와 왜군과 가야군을 물리쳤다.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재위하다가 402년에 죽었다. 아들의 나이가 어려 고구려에 볼모로 10년간 잡혀있다 돌아온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대서지 이찬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내물왕과는 동서 간이다.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내물왕의 두 아들 복해와 미해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에는 내물왕이 보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많은 학자가 실성왕이 두 아들을 모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눌지왕: 눌지왕은 신라 19대 왕이다. 내물왕의 아들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417년에 즉위해 458년까지 4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한편,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몹시 원망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 했다. 실성왕은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라고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사람됨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실성왕이 그를 죽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눌지는 도성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이 부인의 아버지인 장인 실성왕을 살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형으로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신하들에게 동생들을 데려올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먼저 데려오고, 왜나라에 거짓 항복해 미해를 구하고 자신은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제상의 부인 이야기는 벌지지, 망부석, 은을암 등의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흔적△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교촌마을 북쪽에 있고, 1969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여 호석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밑지름이 22m이고, 높이 5.3m이다. 평지에 목관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다음 흙으로 덮어 봉분을 완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석곽묘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지정된 고분은 내물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현재 지정된 내물왕릉에서 서남쪽 500m 지점의 대규모 쌍분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첨성대 서남쪽과 일치하고, 윗부분이 함몰되어 시대적으로 적석목곽분의 형식일 것으로 보여 학자들은 이 고분을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 가운데 호젓한 호수에 물그림자를 데칼코마니로 만들며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왕릉으로, 남북으로 봉분이 이어진 쌍분이다. 황남동 98호분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아래는 남북으로 120m, 동서 80m, 높이 22로 신라 최대의 고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1973년 7월부터 3년여 시간에 걸쳐 발굴한 결과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큰 칼이 나오면서 남분이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무덤은 얕게 땅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에 이중 덧널을 설치하고, 따로 방을 만들어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무덤에서는 남분에서만 3만7천여 점을 비롯해 6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금관과 금동관, 금제관드리개, 금목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금제허리띠,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 금동신, 은제허리띠, 금은반지 등의 금은으로 만든 유물이 출토됐다. 또 금속용기와 칠기, 토기, 유리용기 등의 생활용구와 무기, 마구류까지 다양하게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실성왕이거나 눌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는 금관과 화려한 유물을 넣고 봉분을 더 크게 하지만, 왕인 남분에는 금동관을 넣는 등으로 미루어 눌지왕이 실성왕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눌지왕의 반격석씨들이 왕위 세습을 이어오던 당시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석씨가 왕위를 대물림하던 때에 흘해왕의 아들이 없어 내물왕은 김씨이지만 석씨의 배경에 힘입어 왕좌에 올랐다. 내물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고, 미추왕의 부인은 석씨 왕손이었다. 미추왕이 처가 석씨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듯 내물왕 또한 석씨의 권세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셈이다. 내물왕은 4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가뭄과 지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 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내물왕은 당시 김씨로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과 실성왕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우세한 힘을 확보해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내물왕과 비슷하게 미추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석씨 왕족과도 연대하고 있는 실성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왜나라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했다. 왜군들은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나쁜 짓을 일삼았다. 내물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의 심한 내정 간섭을 경험해야 했다. 내물왕 후대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제의해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신라는 대외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실성왕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었다. 실성은 고구려 후광을 업고 신라로 돌아와 내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물왕에 대한 보복 정치를 단행했다.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보해와 미해를 고구려, 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어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볼모로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구려 사신들을 초청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에게 눌지를 제거하라는 밀지와 함께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게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들이 눌지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실성왕의 밀지를 눌지에게 귀띔해 주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눌지가 거꾸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므로 눌지는 장인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년 만에 왕좌에서 사라졌다. 눌지왕은 또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하기 위한 구국단을 구성해 파견했다. 고구려에서는 설득전략이 먹혀들어 가 보해를 무사히 빼내어 왔다. 그러나 왜에서는 사정이 달라져 왕을 살해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러나 왜의 왕을 살해하려던 구국단은 성사 직전에 은잠술이 능한 왜의 비밀수호단에 잡혀 미해만 가까스로 도망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눌지왕은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후대에 접어들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수시로 침략해 오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죽음으로 왕족 구해낸 충신 그의 부인 슬픔으로 굳어버려

내물왕은 신라 17대 왕으로 본격적인 김씨 왕조 세습의 시작이다. 삼국유사는 내물왕과 눌지왕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당시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의 일화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김(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내물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 복호)를 구해온 데 이어, 왜에 잡혀 있는 내물왕의 또 다른 동생 미해(삼국사기 미사흔)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돌아온 이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내친걸음으로 바로 왜국으로 떠났다. 이 때문에 김(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고, 벌지지, 치술신모와 은을암 등의 흔적과 설화를 남기게 되었다.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충신 김(박)제상과 그의 부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설화를 고증하는 흔적이 있는 경주와 울산의 현장으로 가본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상세하게 더듬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내물왕 김제상신라 제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 되는 경인(390)에 왜왕이 사신을 조정에 보내와서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한 분의 왕자를 보내시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로 하여금 왜국을 예방하게 했다. 미해는 당시 10살이어서 말과 행동이 아직 미숙해 내신인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보냈더니, 왜왕이 붙들어 두고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는 기미(419)에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대왕의 아우님 되시는 보해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기를 원하여 각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절히 청하도록 하였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이 일로 인하여 화친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 그의 아우 보해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로 가게 하면서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임명하여 보냈더니, 장수왕도 또한 그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9년 되는 을축(425)에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내었다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짐이 고구려가 화친하자고 하여 사랑하는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역시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관리들이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이라 추천했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신은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이다”라 했다. 왕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당부했다. 제상이 변복하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의 처소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모의했다. 제상이 먼저 5월15일에 고성 포구로 돌아와 배를 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약속한 날이 닥쳐오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칠이나 조회에 참석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을 쳐 고성해변에 닿았다. 고구려왕이 사람들을 시켜 그들을 추격해 고성까지 와서야 따라잡았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들이 다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자 미해를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말하기를 “한 몸뚱이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 하나에 한쪽 눈만 있는 것과 같소이다. 비록 동생 하나는 찾았으나 또 한 동생이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라 했다. 그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떠나 곧바로 율포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으나 그의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애절하고 간절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단지 손만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서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데 저의 부친과 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했습니다”라 하니 왜왕이 이 말을 믿고 집을 주어 그를 편안하게 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게 되자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라 하니 미해가 “그러면 함께 갑시다”라 했다. 제상이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들이 알아차리고 뒤를 쫓아올까 염려가 돼 오니 신은 남아서 뒤쫓는 것을 막도록 하겠습니다”라 했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는 부모·형제와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나 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 하니 제상이 “신은 왕자님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만 위로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오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 하면서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제상이 나와서 “어제 사냥을 하시느라 말을 타고 쏘다니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한다”라며 말렸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미해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고 하자 그들은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말 탄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심문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라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뿐인데 어찌 구태여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왜왕이 화를 내며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한다면 응당 온갖 형벌을 가하겠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녹봉을 상으로 주겠다”라 했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봉은 받지 않겠다”라 했다. 왜왕이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를 걷게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 하니 대답하기를 “계림의 신하다”고 했다. 다시 그를 뜨겁게 단 철판 위에 서게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 물었다. 제상이 역시 “계림의 신하이다”라 하자 왜왕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가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렸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모든 관리로 하여금 굴헐역에서 맞이하도록 했다. 왕이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나라 안에 죄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여 크게 풀어주었으며 제상의 처를 국대부인으로 책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처음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 문의 남쪽 모래밭 위까지 와서는 거기에 누워 오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로 인해 모래밭을 장사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다. 한참 뒤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치술신모가 되었는데 지금도(고려시대) 이곳에는 사당이 있다. ◆흔적내물왕의 흔적은 경주 동부사적지에 능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능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사적지로 지정하고 능을 관리하고 있다. 눌지왕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울산광역시는 울산 도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 일대 박(김)제상의 유적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충렬공 박제상기념관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울산은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유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치술령 신모설화: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미해)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숨을 거두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변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 보게 하였던바 새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망부석: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망부석은 박제상의 부인과 딸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은을암: 은을암은 망부석의 남쪽 4㎞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바위다. 은을암은 동해가 바라보이는 큰 바위에 성인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이 어둡게 입을 열고 있다.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굴에서는 사시사철 샘이 흘러내리고 있다. 은을암에는 지금도 사당을 지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충렬공 박제상기념관: 울산시가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설화를 영상물과 그림, 조각 등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 옆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한 치산서원을 복원해 두고 있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 등 3동의 사당이 있다. -벌지지: 경주 남산과 낭산을 잇는 넓은 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있고, 제방에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어 일어서지 않았다는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동쪽에 보물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