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사법부독립수호특위, 김영식 청와대 법무비서관 임명 철회 촉구

자유한국당 문재인정권의 사법 장악 저지 및 사법부 독립수호 특별위원회(위원장 주호영 의원)가 김영식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한국당 사법부독립수호특위는 지난 22일 성명서를 내고 “문재인 정부의 편향된 인사에 대해 이제는 비판하기조차 지친다”며 “사법부 고위직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법무비서관을 특정 단체(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인사들이 연달아 맡고 있는 것은 전례조차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영식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청와대 내정설 보도에 ‘원칙마저 저버린 오보’라고 하더니 퇴직 3개월 만에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됐다”며 “자신의 거짓말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지 묻고 싶다. 양심이 남아 있다면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고 강조했다.또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법무비서관 직함을 대법원장 연락비서관이나 대법원 내통비서관으로 바꾸는 것이 어떤지 묻고 싶을 지경”이라며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전신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이 사법부의 요직 대부분을 장악한 채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그러면서 “출범한지 2년 된 정권이 70여년 동안 다져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며 “이것은 국민과 민주주의에 대한 능멸이다. 사법부와 행정부가 한 통속이 돼 삼권분립을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한국독립하키리그, 서울컵 2019 KIHL 개최…아이스하키팬들 주목

독립구단 웨이브즈와 새로운 독립구단 행오버국내 최초 아이스하키 독립구단 웨이브즈와 새로운 독립구단 행오버가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오는 27일부터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리는 ‘서울컵 2019 KIHL (서울컵 한국독립 하키 리그)’에 웨이브즈와 행오버가 참가한다.‘서울컵 2019 KIHL’은 지난 2015 시즌 독립리그 이후로 4년만에 다시 시작되는 독립리그로 국내 타이틀 리그였던 코리아리그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아마추어 아이스하키의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며 만들어졌다.서울 웨이브즈는 2015년 독립리그 이후 2016년 코리아리그 3위, 2017년부터 3년간 전국 동계 체육대회 아이스하키 일반부에 서울시 대표로 출전해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서울시 아이스하키 대표로 자리잡았다.2019년 탄생한 행오버는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은퇴 선수를 주축으로 꾸려진 팀으로 하이원 출신의 한건희, 황우태와 국가대표 골리 출신의 박성제가 포진했고, 또래 친구들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된 팀인 만큼 웨이브즈에 비해 젊고 빠른 하키를 구사한다.이 두 팀의 대결은 신구대결은 물론 서울을 대표하는 팀의 대결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개막 전 가진 프리 시즌 성격의 4차례 평가전에서도 팽팽한 접전을 보이며 앞으로의 대결을 기대하게 했다.‘서울컵 2019 KIHL’로 명명된 이번 리그의 명칭은 그간 열렸던 독립리그가 제니스 배, 인빅투스 배, 스켈리도 배 등 독립리그와 웨이브즈 스폰서에 나섰던 회사의 이름으로 진행했던 것과 더해져 그동안 일반 실업팀의 자격으로 웨이브즈의 큰 울타리가 되어준 서울시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결정됐다.웨이브즈 주장 이성준은 “그동안 동계체전 등 국내 대회 위주로 뛰다 오랜만에 리그에서 뛰게 되어 기쁘다”며 “선의의 대결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행오버 정재훈 주장 또한 “오랜만에 선후배가 모여 리그를 치르게 되어 무척 기대된다”면서 “부상 없는 시즌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전했다.웨이브즈와 행오버의 ‘서울컵 2019 KIHL’ 첫 경기는 오는 27일 토요일 밤 11시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다.online@idaegu.com

영해 3·18 독립만세 문화제

영덕군은 16일~18일까지 3일간 영해로타리 및 3·1 기념탑 일원에서 영해 3·18 독립만세 문화제를 개최했다.호국충절의 고장 영덕군에서 지난 16일부터 시작된 ‘제35회 영해 3·18 독립만세 문화제’가 18일 추념식을 끝으로 성대한 막을 내렸다. ‘영덕의 함성! 다시 100년의 약속!’이란 주제로 열린 이번 문화제에는 주민과 관광객 등 2천여 명이 참여해 100년 전 영해 시가지에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을 추모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이희진 영덕군수, 강석호 국회의원, 김은희 영덕군의회 의장, 김대훈 경북남부보훈지청장 등이 참석해 행사를 빛냈다.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회장 김수용)가 주관한 이번 문화제는 태극기 인장 찍기, 감옥·고문 체험, 독립선언문 써보기 체험 등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나라 사랑 정신을 높ㅇ다. 문화제의 하이라이트인 횃불 행진은 17일 밤 영해로터리 행사장에서 출발해 주제공연, 월월이청청과 함께하는 플래시몹, 군민의 함성 및 만세삼창 순으로 펼쳐졌다. 다양한 예술단체 공연과 독립운동 청소년 댄스경연대회, 연예인 축하공연, 독립운동 특별전시회, 불꽃놀이 등으로 구성된 기념공연도 열렸다. 횃불 행진에 참여한 한 관광객은 “아이들이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도 쓰고 감옥체험 및 만세운동을 함께하며 당시 치열했던 항일운동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화제에 앞서 영덕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품면 낙평리에 3·18 만세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고 대형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했다. 김수용 회장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이번 문화제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자연스러운 현장교육이 되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해 3·18만세운동은 1919년 3월18일, 영해 장날을 시작으로 축산·창수·병곡 지역의 민중이 합세해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경북지역 최대의 독립운동이다.영덕군은 국권 회복과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인 순국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3·18 독립만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희진 영덕군수는 “영해 3·18 독립만세 문화제는 지역주민이 주도해 역사문화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축제다. 경북에서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을 늘 기억하며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강석구 기자 ksg@idaegu.com

경주 기독교인들이 100년 전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 재현

“경주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선조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다.”이종래 목사(경주기독교연합회장)는 독립만세운동 재현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경주지역 기독교인 1천여 명은 16일 봉황대 잔디광장에서 100년 전의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다.이날 행사는 경주기독교연합회와 경주제일교회가 1919년 3월15일 경주 장날을 기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돼 추진했던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 다양한 행사를 추진한다. 경주기독교인들은 이날 기념 예배에 이어, 경주3·1독립만세운동 영상 상영과 아라키준 박사의 ‘경주 3·1운동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주제 강연을 갖는다. 이어 2부 기념행사로 경주제일교회에서 화랑로, 봉황대 잔디광장까지 시가지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한다.봉황대에 도착해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감사패를 증정하고, 3·1절 노래,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만세 삼창 등의 행사를 전개한다. 또 당시 3·1운동을 주도했던 박영조 목사의 후손을 비롯한 10명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재판기록에 따라 당시 일본 경찰들이 총검으로 만세운동을 펼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광경을 비롯해 경주의 만세운동 상황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도 펼친다. 김윤근 경주문화원장은 “민간차원에서 경주 3·15만세 운동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시민들이 마음을 모은 행사로 경주지역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말했다.경주시가 지난 1일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어 시민 3천여 명이 경주역 광장에서 봉황대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영덕군 독립 횃불 전국 릴레이 봉송

영덕군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횃불 봉송 행사 장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영덕군 행사가 지난 10일 영해 3·1 의거탑에서 영해 3·18만세운동 기념탑까지 펼쳐졌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행사’는 3월1월부터 4월11일까지 42일 동안 전국 100곳에서 독립만세 재현과 함께 펼쳐지는 횃불 봉송 릴레이다. 전국 22개 지역에서는 주자봉송, 78개 지역에서는 차량 봉송이 진행되며 영덕군은 전국에서 일곱 번째로 개최됐다. 경북은 안동과 영덕이 선정됐다. 이날 영덕군 행사에서는 기관단체장, 독립유공자 후손, 학생 등으로 구성된 100명의 주자가 영해 3·1 의거탑에서 영해 3·18 만세운동 기념탑까지 횃불봉송을 진행했고, 500여 명의 지역민과 함께하는 3·18독립만세 주제공연, 플래시몹 공연 등이 펼쳐졌다. 영해 3·18 만세운동은 100년 전 3월 만세운동 당시 경북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이 운동에 참여한 주명우·윤악이 부부, 김태을·신분금 부부는 부부독립유공자로서는 전국 최초로 상을 받았다. 이형성 주민복지과장은 “오늘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행사’를 시작으로 31.8m의 대형 태극기 게양대 설치, 독립운동 특별전시회, 지품 낙평리 3·18만세운동발상지기념비 제막식, 전국청소년댄스퍼포먼스 경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오는 16일~18일까지 열리는 ‘제35회 영해3.18독립만세문화제’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덕군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횃불 봉송 행사 장면강석구 기자 ksg@idaegu.com

영덕 영해3·18독립만세 문화제 개최

지난해 영덕군에서 열린 영해3·18독립만세 문화제 장면 영남지역 최대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영덕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6일~18일까지 3일간 대규모의 ‘영해3·18독립만세 문화제’를 개최한다. 일제에 항거한 3천 애국지사의 염원과 투지가 영해 시가지와 3·1의거탑 일원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횃불과 몸짓으로 되살아난다. 영덕군과 영해3·18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이번 문화제를 위해 만세운동의 상징물을 곳곳에 세워 지역 공간을 역사화 했다.또한 청소년 프로그램과 특별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해 참여자 범위를 크게 확대하는 등 축제의 장으로 승화할 계획이다. 영덕에서 항일 구국의 횃불을 밝힌 거사가 처음 논의된 곳은 지품면 낙평리다.기독교인 김세영은 낙평동 교회에서 구세군 관계자 권태원과 함께 거사를 논의했고, 영덕의 5대 성씨 유림 문중이 함께하면서 마침내 3월18일 영해 장날을 기해 독립의 염원이 폭발했다. 그 역사적인 3·18만세운동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군은 올해 지품면 낙평리 마을회관 앞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독립만세 문화제 첫날인 16일 제막식을 한다.또 영해 3·18 의거탑에 애국의 고장을 상징하는 31.8m 규모의 대형 태극기 게양대도 설치했다. 이곳에서 10일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과 연계한 독립만세운동 특별전시회도 10일~18일까지 영덕 사랑해요 휴게소와 영해로터리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문화제에서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은 전국 청소년 독립만세운동 댄스 퍼포먼스 경연대회다.청소년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올해 처음 시도하는 것으로 16일 오후 3시30분부터 영해로터리 행사장에서 열린다. 30개 청소년 댄스팀이 참가신청을 했다. 일제의 암울한 밤을 밝힌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횃불 행진은 17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된다.영해 로터리에서 시작해 영해버스터미널, 서문로터리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시가지 전역에서 펼쳐지는 횃불행진은 장대한 장면이 연출된다. 강석구 기자 ksg@idaegu.com

100년 전 울려 퍼진 대구의 독립 염원, (하) 3·1 독립 운동길에 서린 대구의 함성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 인근 3·1운동길에는 그날의 하성이 느껴지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기미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대구 출신의 이갑성은 1919년 2월24일 대구를 찾았다.그는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계성학교 백남채·김영서 교사, 신명여학교 이재인 교사 등을 만나 서울에서 계획 중인 3·1만세운동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하며 대구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켜달라고 권유했다.기독교 지도자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남산교회 조사 등 의기투합한 이들은 큰장(서문시장) 장날인 3월8일 오후 봉기를 하기로 뜻을 정하고 시위에 참여할 학생과 시민 모집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일제에 정보가 새어 나가 3월4일과 7일에 홍주일, 백남채 등이 체포됐다. 또 일제 경찰은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만세 운동 준비는 계속 진행됐다.대구 독립운동 유족 100곳 답사 여행을 펴낸 정만진 전 대구시 교육위원은 “1919년 3월8일 오후 1시 큰장 소금집 앞에서 모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 서울 탑골공원보다 일주일 늦게 시작된 대구의 독립 만세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고 전했다.남학생들은 장에 가는 것처럼 지게를 지고, 여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듯 태극기를 숨긴 대야를 인 채 움직였다.3월8일에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현재 동산병원과 제일교회를 가로질러 90계단까지 이어지는 3·1운동길은 당시의 함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이 길은 대구 3·1만세운동 행진로는 아니다. 학생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이곳에 지나간 비밀통로였다.지금은 반듯하게 길이 뚫려있고 길옆으로 3·1운동 함성을 느낄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마련돼 있지만 당시는 우거진 숲과 오솔길이었다.인근 선교사 사택도 좋은 은신처였다. 동산병원을 세운 선교사들도 성경을 기초해 대한독립을 지원하던 터였다. 거사에 참여할 학생들을 사택 곳곳에 숨겨주기도 했다.큰장은 오후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대구고보 학생 200여 명이 교복을 입은 체 일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뛰어왔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시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김태련 조사가 미리 준비해 둔 달구지 위로 올라섰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낭독을 하자 일제 경찰이 제지했다.이만집 목사가 달구지에 뛰어올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1천여 군중들은 일제히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했다.독립의 열망에 불타오르는 군중은 큰장 소금가게 앞을 출발해 동산교를 지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와 경북도청(경상감영공원)으로 달렸다.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전골목(약령시)과 종로, 대구읍성 남장대 터(중앙파출소)를 지나 달성군청(대구백화점)까지 향했다.일제는 달성군청 앞에서 총칼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의 대응은 강경했다.기세를 이어가 3월10일 오후 4시에는 대구 남문밖 덕산정시장(남산교회 인근)에서 교회 신도 200여 명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이어갔다.두 차례 만세운동에서 일제는 모두 225명을 검거했다. 계성학교 학생 37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 등 모두 76명이 실형을 받았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징역 3년, 김태련은 징역 2년6월에 처해졌다.전재규 전 대신대 총장은 “동산병원 언덕 솔밭은 대구 3·1운동 거사의 중요한 비밀통로였다. 그 길을 밟았던 용맹스러운 애국 학생들의 힘찬 발 디딤은 지금도 땅속에서 진동이 돼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고 회상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잊히지 않는 그 날의 함성, 구미 진평동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11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이상백의 집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초저녁부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네 청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이상백과 이영식, 이범성, 이내성,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허도언 등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이상백의 손엔 며칠 전 이영식이 건네준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었다. 나흘 전인 3월7일 대구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영식이 찾아와 독립만세운동 동참을 호소하며 건네준 것이다. 이영식은 기독교 신자로 동네 유지였던 이상백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국권 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이상백과 함께 있던 이내성은 그 자리에서 이를 수락했다. 이상백이 수락하자 거사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거사일은 12일로 잡았다. 다시 11일 밤. 이상백과 임용섭은 독립선언서 필사를 맡았다. 그리고 이영식, 이영래, 임점석은 거사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밤새도록 그렸다. 그렇게 운명의 날이 밝았다. 박명언과 허도언은 오후 8시 동네(진평동)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각 마을 주요 자리에 붙이도록 부탁했다. 당시 3·1운동 후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만세운동에 인동지역 일본군 헌병주재소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일제는 군경을 마을마다 배치하는 등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 드디어 12일 저녁 8시. 박명언과 허도언으로부터 거사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마을 뒷산으로 모여들었다. 이상백은 분연히 일어선 동민들 앞에 나서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도 멀지 않아 독립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합니다”라며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마을 주민들도 태극기를 움켜쥐고 감격에 겨워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일본 군경이 현장에 달려와 이상백(당시 34세)과 이내성, 이영래 등 8명을 체포하고,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했다. 하지만 일제의 총칼에도 주민들의 국권회복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불타올랐다. 이영식과 같은 대구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이 진평동 청년유지인 김봉술과 김성윤을 설득해 3월14일 2차 만세운동을 벌였다. 2차 만세운동에도 2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항일 저항의 위력을 과시했다. 1, 2차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진평동 애국지사는 이상백과 이내성,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이윤약, 장상건, 김봉술, 김성윤, 장준현 등 20여 명이다. 하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구미지역의 만세운동은 일본 군경의 탄압에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갔다.같은 해 4월3일 해평면, 4월8일 임은동, 4월12일 선산장터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진평동(인동) 만세운동이 구미지역 독립운동에 촉매제가 된 것이다. 1927년 10월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 장진홍, 이내성, 장용희 등과 친일세력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특공대원인 박희광, 1941년 대구 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다혁당 당수 겸 예술부장 권쾌복 등의 의열지사가 모두 구미 사람들이다. 한편,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사모)’은 1919년 진평동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당시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재연행사를 갖고 있다.1919년 3월12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주민 300여 명이 애국지사 이상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어 3월14일 제2차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같은 곳에서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은 매년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재연행사를 열고 있다.(행사 사진은 지난해 재연행사 사진)이창희 인사모 회장은 “올해는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큰 의미를 두고 재연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과 참여자들이 많아 아쉽고 안타깝다”며 “그날의 정신이 잊히지 않도록 교육과 연계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919년 3월12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주민 300여 명이 애국지사 이상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어 3월14일 제2차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같은 곳에서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은 매년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재연행사를 열고 있다.(행사 사진은 지난해 재연행사 사진)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100년 전 울려 퍼진 대구의 독립 염원, (상) 대구만세운동 발상지 큰장 옮긴 일제

대구시 중구 대신동 옛 서문치안센터 앞에는 원기둥 모양의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대구 3·1 독립운동은 1919년 3월8일 오후 2시 큰장 입구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이만집과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시작됐다”라고 쓰였다.이곳은 100년 전 1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독립을 외친 대구 만세운동의 발상지다.학생, 상인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일본 경찰과 군은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지만 시위대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시위를 이어갔다.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서울과 평양에 이어 대구 큰장(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 발자취를 되짚어본다.〈상〉대구 만세운동 발상지 큰장 옮긴 일제대구 만세운동의 발상지를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다. 엄연히 말하면 다르다. 1919년 당시 달성 서문밖에 있다고 불린 서문밖시장의 정식 명칭은 큰장이다. 서문밖시장이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큰장은 평양장, 충남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장이었다.큰장은 지금 대구시 중구 서성로 일대 이른바 오토바이 골목에 있었다.대구 만세운동의 시작점은 현 섬유회관 건너편 옛 서문치안센터 앞이다. 당시 큰장의 입구다.큰장이 서던 1919년 3월8일 오후 2시 인근 동산병원, 제일교회 등에 숨어있던 신명학교, 대구고보(경북고) 학생들과 상인 등 1천여 명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만집과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곧바로 만세 행렬이 시작됐다.3·1만세운동이 대구에서 3월8일 시작된 것은 이날 큰장이 서는 장날이었다. 군중이 쉽게 모여 만세운동을 펼치기에는 적격인 장소와 때였다.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일제에 들키지 않기 위해 선교사 주택단지 일대인 현재 3·1운동길 90계단을 올라 동산병원을 거쳐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으로 내려왔다.당시 3월1일 서울 파고다공원 등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터라 일제의 감시와 경비는 삼엄했다.당시 섬유회관 뒤편은 가파른 절벽이었기에 일제의 경계가 허술했다. 학생들은 이점을 노려 동산병원에 숨어있다가 이쪽을 통해 큰장으로 향했다.대구의 만세운동은 한 달간 3차례 전개됐다. 이날 큰장 만세운동에 이어 3월10일 덕산정 남문시장 만세운동이 이어졌다.일본은 큰장 만세운동 이후 서문시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만세운동 이후 사람들은 장날마다 큰장에 모여 3월8일 벌어진 만세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독립의지를 다졌다.일제는 식민주의자들이 흰옷을 입고 큰장을 서성거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큰장 만세운동 같은 거사가 다시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결국 1922년 일제는 큰장 터가 좁다는 이유로 지금의 서문시장 터로 시장을 옮겼다.일제가 강제로 옮겼다는 증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여러 문헌에 기록돼 있다.지금의 서문시장 터는 천황당이라는 커다란 못이었다.일제는 이곳을 객토하기 위해 인근 내당동과 비산동에 있던 수많은 고분군을 뭉개버리고 봉토를 실어다 못과 주변 늪지대를 메웠다.일제는 대구 독립 만세 운동의 시발점인 큰장을 없애버린 것이다. 또 문화재급 고분도 함께 뭉갰다.천황당 못의 정확한 크기는 기록에는 찾을 수 없으나 전재규 전 대신대 총장이 고증한 당시 지도를 보면 못 크기는 지금의 서문시장 2~3지구 정도다.일제는 앞서 1905년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대구의 역사를 상징하는 달성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대구 독립운동 유적 100곳 답사 여행을 발간한 정만진 전 대구시 교육위원은 “서문시장은 대구 독립운동의 발상지로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장날마다 독립의지를 북돋웠다”며 “그런데 일제에는 서문시장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고 결국 인근 천황당 못을 메우고 새 서문시장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또 “이 과정에서 내당동, 비산동 고분군까지 훼손한 것은 통탄할 일”이라고 지적했다.일제의 탄압으로 대구시 중구 서성로 현재 오토바이 골목에 위치해 있던 큰장(서문시장)이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로 옮겨졌다. 사진은 현재 서문시장 자리에 위치해 있던 천황당 못 전경이다. 뒤로 보이는 2층 양옥집이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이다. 사진제공 정만진 전 대구시 교육위원큰장 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천황당 못을 메운 뒤 옮겨진 직후 서문시장의 모습. 못을 메운 터라 지대가 주변보다 낮아보인다. 사진제공 정만진 전 대구시 교육위원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국내 첫 독립 아이스하키 구단 웨이브즈…1년 만의 도전, 끝나지 않은 도전

국내 첫 독립 아이스하키 구단 웨이브즈 (감독 : 김홍일)가 동계체전으로 시즌 첫 문을 열었다.웨이브즈는 1년 전 2월 13일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제99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아이스하키 일반부 (이하 '동계체전') 결승전 이후 첫 경기를 같은 대회인 동계체전에서 치렀다.이번 대회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강릉 하키센터에서 열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경기 전부터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1년 만에 치러지는 공식전이라 경기 초반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내리 2실점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이내 집중력을 되살려 2 - 3까지 추격해 국내 최강으로 군림하는 안양 한라를 긴장케했다.그러나 급격한 체력 저하로 3피리어드에만 내리 4골을 내주면서 결국 2 - 7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선수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짧은 대회를 마무리 지었다.한때, 거칠다는 평가를 넘어 위험한 선수로도 손꼽혔던 박태환은 이번 경기에 한층 성숙된 모습을 선보였다. 자신의 장기인 강한 체킹과 터프한 경기 운영은 물론 공격에서도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이 기록한 모든 득점에 관여하며 팀을 이끌었다.동계체전을 마친 웨이브즈는 골리 김영우를 포함, 공격수 이승준, 김영훈, 김형민, 조현수, 수비수 천석영 등이 안양 한라 육성 팀 선발에 도전하게 된다.웨이브즈 김홍일 감독은 "이번 동계체전 안양 한라와의 경기가 육성 팀 도전을 준비하는 선수에게 정확한 목표와 준비 자세를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으라 생각한다"라는 소회를 전했다.online@idaegu.com

정태옥 의원 “김일성에게 독립훈장, 김정은에게 독립유공후손 연금 지급할 것인가”

정태옥 의원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대구 북구갑)이 7일 국가보훈처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김원봉 등 북한정권 수립에 직접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라는 권고 방침과 관련, “김일성에게 독립훈장, 김정은에게 독립유공후손 연금을 지급할 것인가”라고 발끈하고 나섰다.정 의원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서훈키로 한) 의열단 김원봉은 영화 밀정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해방 후 월북해 인민공화국 검열성상(檢閱省相 남한의 감사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면서 “김일성에 의해 연안파 숙청 때 같이 숙청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6·25 전후로는 남파간첩을 파견하기도 했던 명백한 6.25전범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그는 또 “그러면 이는 가장 먼저 김일성에게 독립훈장주고, 후손인 김정은에게 연금을 줘야 할 것”이라며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누워있는 대부분의 6.25전범들에게 서훈하고 아들 손자에게 대한민국 세금으로 연금까지 주겠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그러면서 “오히려 한때 사회주의 활동을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직접 공헌하고, 농림부장관으로서 6.25직전 이승만 대통령과 협력해 토지개혁을 성공시킨 조봉암 선생은 하찮은 이유로 서훈을 미루고 있다”면서 “대한민국의 합법 정부와 국민에 죄를 지은 사람조차 서훈하고 연금 준다는 발상은 자유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절대로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창재 기자 lcj@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