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연가/ 김경호

Ⅰ.// 군데군데 떨어져 피어나/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다져 먹고/ 어지러운 하늘 속/ 가라앉지 못하는 먼지바람 하나도/ 버리지 마/ 밀리고 흩어진 벌판 위에/ 잠들지 않고 내리면서/ 굽은 등 펴고 눕게 하는 비/ 비 맞아도 젖지는 마/ 굽히고 잠들게 하는 어둠도/ 그리운 그대 이름도/ 이젠 따뜻한 아픔인 것을/ 군데군데 떨어져 피어나/ 떨어져 있어도 결코 쓸쓸하게/ 지워지지 마/ Ⅱ./ 잠든 것들은 움직이지 않고/ 비를 맞는다/ 마른 가슴을 내리고/ 잠 깨지 못하고 서 있는 나무들/ 그 억센 뿌리를 키운 벌판을 향해/ 비는 내리고/ 풀잎들이 거친 바람에 쓸리고 있다/ 흔들리면서 그러나 모여 서서 꿈꾸던 하루/ 풀잎은 자라고/ 내 방에 흩어 진 머리카락 같은 풀잎,/ 허름하게 피어나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질긴 풀잎이여/ 보아라 흔들려서 모든 것 눈 뜨고/ 소리치고 달려가게 하는 아침/ 버려진 돌멩이와 젖은 모래알에서 깨어나/ 마르지 않는 아픔을 키우며/ 언 손 부비며 다시 피어날/ 새봄의 풀잎이여/ 잠든 것들은 움직이지 않고 다만/ 다 뜨겁고 무성한 꿈을 위해/ 비 맞고 있다「대구문협대표작선집Ⅰ」 (대구문인협회, 2013)풀잎이 벌판에 드문드문 피어난다. 비록 외롭게 혼자 피어있어도, 세상이 어지러워도, 마음을 독하게 다잡아먹고 정신 바짝 차린 채 서 있다. 떠다니는 먼지바람 하나도 허투로 흘릴 수 없다. 너른 벌판 위에 비바람 불면 그냥 드러누워 등을 쭉쭉 편다. 그렇다고 비바람에 마냥 굴복하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 찾아와 몸을 눕히고 잠들어도 정신을 놓는 일은 없다. 서로 헤어져 있어도 그리움은 따스하게 영글고, 외롭게 홀로 있어도 존재감은 뿌듯하게 차오른다.비가 내리면 죽은 듯 마냥 비를 맞는다. 빗물은 마른 가슴을 적셔준다. 잠든 듯 벌판에 고요히 서 있는 나무들은 억센 뿌리를 땅속 깊이 뻗치고, 풀잎은 세찬 바람에 눕는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지만 함께 모여 서서 알찬 꿈을 지켜낸다. 풀잎이 바람에 머리털처럼 흩날려도 결코 꺾이지 않는다. 비록 볼품없이 피어난 풀잎이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사랑을 품는다. 해가 뜨고 아침이 찾아오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풀잎은 소리를 지르면서 꿈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련을 극복하고 비에 젖은 돌멩이와 모래 속에서 깨어나 풀잎은 꽃을 피운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새봄이 돌아오면 겨우내 얼었던 손을 부비며 풀잎은 다시 피어난다. 나무와 풀잎은 잠든 것 같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무성한 꿈을 꽃피운다. 지금도 풀잎은 비를 맞고 서 있지만.인간은 생각하는 풀잎이다. 거친 바람이 불어오면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때론 누워버리기도 하지만 굴복하는 일은 없다. 바람이 가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뚝이처럼 다시 벌떡 일어선다. 잠든 것처럼 꼼짝 않고 비를 흠뻑 맞지만 결코 빗물에 녹지도 않고 떠내려가지도 않는다. 땅속으로 힘차게 뿌리를 뻗고 하늘을 향해 발 돋음을 한다.홀로 떨어져 있어도 고독해하지도 않고 근본을 잊지도 않는다. 풀잎은 햇빛 하나 바람줄기 하나 놓치지 않고 꼭 보듬어 꿈을 가꿔간다. 함께 그리워하고 사랑을 품는다. 풀잎은 선 자리에서 생긴 그대로 살아간다. 선 자리를 탓하지도 않고 부탁도 없이 옮겨가려고도 않는다. 스스로의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따름이다. 오철환(문인)

남의 말 잘 들어주기

한 달 전, 50대 여성 환자가 찾아온 적이 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어째 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다. 며칠 전 우리 병원 근처의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병원은 의사가 여럿 있는 크고 유명한 곳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수술한 지인의 소개를 받아 일부러 찾아갔다고 한다. 거기서 의사 한 사람과 상담을 하게 됐는데….하도 자신 있게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 하길래 마치 무엇인가에 홀리듯이 바로 수술하기로 하고 수술대에 드러누워 수술을 했다고 한다. 눈꺼풀이 처져 눈이 작아 보여서 이것만 고쳤으면 하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결국 양쪽 눈썹을 당겨 올리는 수술을 하게 됐고 수술을 마치고 얼굴을 보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눈이 갑자기 커지고 강하고 날카로운 모습이 됐다고 한다. 게다가 눈의 뒷부분은 한껏 당겨져 올라갔지만 눈의 안쪽은 제대로 올라가지 못해서 앞으로 처지면서 마치 ‘도끼눈’ 같은 모양이 된 것이다. 이 지경이 되자 할 수 없이 병원을 다시 찾아가 그 의사를 만나 하소연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큰 병원이라 그런지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몇 시간을 기다려 만난 그 의사는 무조건 괜찮다는 말만 하면서 자신의 하소연은 들어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면서 몇 달 지나서 찾아오라고 매몰차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울화가 치밀어서 심한 말을 내뱉고는 병원을 나와 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우울증도 심해지고 잠 한숨 못 자는 지경이 되다 보니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병원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된 것을 다시 돌려줄 수 있는지, 아니면 고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러 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긴 설명을 마쳤다. 환자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 이제 수술한 지 1개월 정도 지났는데 아직 부기가 조금 남아있다. 아직 수술한 티가 조금 나기는 했다. 다만 양쪽 눈썹의 높이를 맞추는 것이 정확하지 못했고, 눈썹을 봉합할 때 너무 힘을 줘서인지 콱 찝혀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눈썹의 바깥쪽을 한껏 잡아당겨 주름이 다 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안쪽 눈썹을 충분히 들어 올려 주지 못했던 탓인지, 앞쪽 눈은 피부에 덮인 채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치 찢어지고 뒤쪽이 들려 올라간 눈이 된 것이었다. 앞쪽 부분의 쌍꺼풀을 교정해 주면 되는 문제가 남은 셈이다. 내가 개원을 처음 했을 때가 기억이 난다. 당시 한 선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이 원장, 이 원장이 수술한 환자인데, 어째 나에게 수술 결과를 상담하러 왔네, 내가 잘 타일러 놓았으니 다시 찾아오면 해결해 주게.”수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병원으로 찾아갔던 환자를 다시 나에게 가도록 설득해 주셨다. 그때 얼마나 그 선생님이 높이 보였던지….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 선배 의사 선생님처럼 이렇게 말해 주었다.“그래도 그 선생님이 수술을 했으니 상태를 가장 잘 아시겠지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다시 그 병원에서 상태를 확인하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굳이 다른 병원에 가 볼 필요는 없고, 수술한 병원을 다시 한 번 찾아가 이 부분에 대한 교정을 부탁해 보라고 말해 주었다.그러나 한 번 상한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던지 다시 찾아가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 별수 없이 재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달래주고는 돌려보냈다. 며칠 뒤 다시 나를 찾아온 그녀는 결국 나에게 재수술을 받고 문제를 해결했다. 내가 해준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결국 환자와 의사 사이에 솔직한 소통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부분에 대한 해결을 약속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있었어도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수술하기 전에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환자에게 충분히 이해시킨 다음, 이 수술을 통해 좋아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환자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환자가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의사와 환자가 일치해야 한다. 목적이 정확하지 않다면 필요하지 않은 수술을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면서 소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술의 첫걸음이라 하겠다.요즘 다시 전국을 뒤덮은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일상을 겪고 있다. 이제껏 있어 왔던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일상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기억에 길이 남을 2020년이 된 셈이다.이런 시기일수록 새로운 연대,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타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태도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시계들의 소풍

시계들의 소풍우경주달리의 시계들이 소풍을 나온다/ 평생 기대어 서 있느라 허리 휜 시계들/ 오늘은 가벼운 차림으로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창으로만 내다보던 세상을 걸어 나온다/ 납작한 몸 반쯤 꺾어본 후/ 넓은 바다를 눈 속에 넣으며 모래 위를 달리고/ 파도를 걷어차 하얗게 구겨 놓기도 한다/ 잎새 떨군 나무에 겉옷이 되어주고/ 출생을 짐작할 수 없는 물체위에 앉아보면/ 탁자위에서 눈 녹듯 흘러내리고 싶어진다/ 흘러 흘러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애초부터 말랑말랑한,/ 연체동물이었는지 모른다/ 사각의 벽에 갇혀 다른 이의 일상을/ 끌어당기며 밀고 가던 고된 삶/ 나는 저 시계의 성화에 눈 부비며 일어나/ 얼마나 많은 아침을 쪼였을까/ 너울에 감겨 소리 아득하게 들려도/ 고집스런 저 목소리가 밉지 않다/ 이제는 파도소리 자장가삼아 푹 쉬고 싶다고,/ 기약 할 수 없는 앞날을 향하여/ 마냥 달리기가 불안하다고,/ 시간 멈추어 놓고 월담한 시계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나뭇가지에 걸린 시간과 모서리에 접혔던 시간들이/ 고삐를 풀고 화폭 속에서 걸어나온다『시계들의 소풍』 (고요아침, 2015)......................................................................................................................시인은 초현실주의 대표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란 그림을 머릿속에서 불러낸다. 기억 속의 그림이 시어로 재탄생한다. 「기억의 지속」은 ‘늘어진 시계’ 또는 ‘녹아내리는 시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바다와 해안선, 황금빛 절벽이 보인다. 달리의 고향 카탈루냐의 해안풍경이다. 죽은 올리브 나뭇가지에 시계가 널브러져 걸려있다. 관처럼 생긴 상자에 반쯤 걸터앉은 시계가 늘어져 졸고 죽은 갈매기 같은 희멀건 물체 위에 시계가 드러누워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상자 위에 제법 형체를 갖춘 회중시계엔 개미가 바글바글하다. 파리 한 마리가 상자에 얹혀 늘어진 시계 위에 앉아 시간을 희롱한다.시계는 바다가 보이는 해변으로 소풍을 나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쉴 새 없이 늘 일만 해온 시계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파란 바다가 내다보이는 나뭇가지에 늘어지게 매달려 각박한 현실을 비웃는 놈. 상자위에 앉아 파리가 농락하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벗어나 정신 줄을 놓고 있는 놈. 시간을 빼앗긴 작가의 몸뚱어리에 올라타 함께 녹아내리는 놈.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긴 하나 벌레에게 몸을 맡기고 앓아누운 놈. 빈 틈 없이 진행되는 일상에 지친 시계가 자기 방식대로 맘껏 힐링한다. 그대로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들 것만 같다. 시간은 원래 흐물흐물한 연체동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원초적으로 유연한 존재임을 망각한 채 시간의 딱딱한 벽에 갇혀 이리저리 끌려 다닌 일상을 돌아본다. 고지식한 시간에 쫒기여 여유 없이 팍팍하게 살아온 나날이다. 시계소리가 파도에 아득하게 묻힌다. 시계도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마냥 달린다고 될 일은 아니다. 마침내 시계도 일상을 일탈한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시간은 흘러간다. 담을 넘어 소풍 간 시간들이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시간은 상대적이다. 늘어나기도 하고 휘기도 한다. 시간이 정지해도 중력은 시간에도 작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심은 시간을 극복한다.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영혼은 시공을 넘나드는 힘을 가진다. 시인의 심미안은 일상을 변형하여 낯설게 뵈는 초현실주의 작품에도 색다른 새 생명을 불어넣는 향기로운 시의 자궁이다. 오철환(문인)

수난의 장

수난의 장 구상우 몰려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쇠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곡괭이를 휘저으며 마구 쫓아오는데/ 돌아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상여 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에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워싸고 빙빙 돌아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꼭 죽였다//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도깨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었다// 상여 속에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 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을 풍경/ 나의 달가운 꿈속의 꿈이여// 추억의 연못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홍신은 벗어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꽃수레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수난의 장』 (민족문화, 1950).................................................................................................................... 꿈은 현실과 시공을 초월하는 까닭에 그 제약과 한계는 빈곤한 상상력일 뿐이다. 도달 가능한 현실 속에 터 잡고 있다면 희망이지만 현실과 동 떨어진 상상이라면 헛된 몽상이다. 꿈은 돈도 들지 않고 규제나 제약도 없기 때문에 작가의 무대 공간으로 제격이다. 예로부터 덧없는 인생을 깨치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로 꿈을 활용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남가일몽과 한단지몽도 꿈의 무제약성에 기댄 이야기다. 최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로 꿈을 과학과 접목시키는 작업이 활발하다. 사람들이 무섭게 쫓아온다. 쇠똥과 곡괭이로 미루어 판단컨대 비루하거나 맞아죽을 짓을 했음직하다. 정부수립 직후임을 감안하면 부르주아지 지주가 좌파 민중시위대에 쫓기는 상황 쯤 된다. 그 반대 상황일 수도 있다. 이마를 맞아 피가 흐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더 이상 도망 갈 구석이 없다. 평소 같으면 얼씬도 하지 않을 상여 집으로 숨어든다. 시위대가 욕설을 퍼부으며 상여 집을 에워싸고 돈다. 마침내 상여 뚜껑을 열고 들어가 시신처럼 눕는다. 의외로 마음이 편하고 흥겹기까지 하다. 단잠이 들고 꿈속에 또 꿈을 꾼다. 누군가 몸을 닦고 염을 하는 모양이다. 사랑했던 여인이 소환된다. 무표정한 그녀가 넋을 잃고 버선발로 외로이 서 있다. 울긋불긋 화려한 꽃상여에 실려 저승길을 향해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화, 어화. 그리스도가 삼일 후에 부활한 성소, 림보로 가는 길이라 곡성조차 즐겁다. 소복 입은 여인이 뒤따라온다. 삼일만 기다리면 보란 듯이 부활하여 그녀 앞에 다시 서리라. 치안이 불안하고 좌우 이념대립이 심했던 해방공간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한 나날이었다. 못 배우고 잃을 게 없는 머슴보다 마름이나 지주가 더 불안했다. 남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인과 집에서 부리던 머슴의 눈치를 살핀다. 낮엔 그나마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잠을 자야하는 밤이 두렵다. 그 와중에 악몽을 꾼다. 상여 안에 들어가 누워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탓인지 긴장이 풀리고 잠이 온다. 꿈속에 또 꿈을 꾼다. 장례를 치르는 꿈속의 꿈이 왠지 슬프지 않다. 멋진 부활을 꿈꾸고 있는 탓이다. 시인은 꿈속이지만 수난 속에서 반면교사를 본다. 오철환(문인)

우리는 어디서나

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시집『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 본다.’ 2007년 1월, 그러니까 타계하기 열흘 전 병문안 온 지인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다는 그의 유작이다. 오규원의 시는 그렇듯 시가 문자로 드러낸 것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준다. ‘우리는 어디서나’를 읽으면서도 감춰진 시 너머의 의미를 찾는데 잠시 골똘해졌다. 의자에 머문 시인의 시선에서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이란 지혜를 발견한다. 쉽게 읽히다가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는 대목에 탁 걸려 잠시 주춤하는데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서는 어깨를 낮추고 얹힌 힘도 빼고 밑바닥도 챙겨보라는 의미로 수습한다. 의자에 앉듯 무게의 중심과 균형을 잡으라는 뜻이리라. 역사관 역시 삐딱하게 서거나 드러누워서 볼 게 아니라 차분히 앉아서 보라는 거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의 입장에서 진술되어지고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이설 없이 교육현장에서도 통했다. 오백여 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토착 인디언의 입장에서 콜럼버스는 침략자의 첫발일 뿐이다. 갑자기 바다 위로 솟구친 땅도 아니고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 대륙도 아니었다. 서구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진 역사 인식을 진작 바꿨어야 했다. 탈 서구적 시각인 인디오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관도 균형 있게 함께 다뤄졌어야 했다. 과거 교육 현장에서 아프리카는 식인종이 득실거리고 북한 사람은 모두 흉하게 생겨서 뿔이라도 달린 양 교육을 받았다. 아니지 않는가. 모두 왜곡되고 편향된 서구중심의 세계관과 지나치게 기울어진 우측 이데올로기 탓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북한의 대규모 군사열병식을 생중계할 정도로 북한의 정보가 여과 없이 전해지는 세상이지만 과거엔 북에 대해 입만 뻥긋해도 신상이 위태로운 시절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의식이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리라. 국사교과서에 주체사상의 개념을 소개하고 김일성과 김정은의 사진을 실으면서 3대 세습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다루어졌다면 좌 편향된 역사 기술이라고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해방공간에서의 균형을 잃은 역사해석을 포함해 무조건적인 친미사관이라든가 친일사관의 부활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파적 이익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하는 자체가 역사적 난센스다. 사안에 따라 쟁점이 있을 수 있고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정파의 입맛에 맞추어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오류는 없어야겠다. 최근 언론보도나 방송의 토론 프로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조국사태와 관련해서는 경마저널리즘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모두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